379화. 악인곡의 칠대 악인.
“악인곡?”
“악인곡이라…….”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가 새로운 조직의 칭호를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특이해서는 아니었다.
대공자로부터 악인곡이라는 매우 원색적인 이름까지 듣게 되자 비로소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불똥이 튈 것이 염려스럽다고.
구대 문파가 모조리 증발했다.
시간도 경과했다.
그러니 그 결과를 지금쯤 회영부는 인지하고 있을 터.
무당, 화산, 소림, 공동, 종남를 노렸던 이들은 섬멸당해 보고할 수 없었겠지만 곤륜과 아미와 청성, 그리고 점창파를 노렸던 이들은 텅 비어 있는 각 문파의 광경에 놀라 전서매든 시안조든 띄워 보냈을 것이다.
그 결과 잠깐은 우왕좌왕할 수 있다.
잠시 동안은 웅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생각은 정리될 것이고, 분노를 불태울 것이다.
그다음은 보복이다.
사라진 구대 문파를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다.
만약 못 찾는다면?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면 일반인들을 학살할 수도 있다.
가만히 있던, 아무 연관도 없는 이들이 괜한 분풀이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건 정파의 약점이기도 하다.
의와 협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좋네.”
“대공자, 마음에 드는군.”
“멋진 생각이에요!”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는 기쁜 마음으로 수긍했다.
악인곡의 소행이 되면,
회영부는 애먼 분풀이를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죽어 나가든, 몇천 명이 죽어 나가든 악인들이라면 전혀 양심의 가책 따위 받지 않을 테니.
그러니 회영부는 오로지 악인곡을 섬멸할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연신 곱씹고 생각할수록 멋진 생각이다 싶으니 수긍은 이내 감탄이 되었고, 이어 크게 웃기까지 했다.
“하하하, 너무 멋진 생각이네!”
“하하하하! 대공자, 자넨 정말 천재일세.”
“호호호! 대공자 그대는 사기꾼입니다.”
세 사람이 연신 웃었지만,
풍제와 당명은 고요할 따름.
이게 놀랄 일인가.
대형과 함께하면서 자주 사용하던 수법에 불과했다. 그래도 감흥은 있었다. 이젠 다들 나이가 지긋해졌지만 과거 젊은날의 추억이 한순간 해일처럼 덮쳐오는 것이다.
이제 역용을 할 차례.
악인의 면모를 갖추어야 할 시간.
그런 자각에,
“대, 대공자…….”
감탄도 잠시, 이내 검선이 더듬거렸다.
대공자가 말했던 못생기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선께선 왜 더듬거리십니까?”
“그러니까 이제 날 구겨버리는 건가?”
대공자가 손속에 자비를 안 둘 때는 사람을 구겨버리는 광경을 보았기에 틀림없이 그 묘용을 발휘할 것 같은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나?”
“살짝만 하는 거라 아프지 않으실 겁니다.”
“그게 참말인가?”
검선은 미심쩍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여태 지켜본 대공자는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었기에, 고통스럽게 구겨놓고는 ‘이 정도가 아프다는 겁니까? 검선께선 참을성이 없으시군요’ 따위의 말을 태연히 하고도 남을 사람인 것이다.
괜한 염려는 아니었다.
사람마다 참을성이 기준이 다른데 대공자는 무려 삼악을 이룬 존재인 것. 아픔과 고통에 대한 기준이 아득하니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검존과 현음도 마찬가지.
괜히 딴청을 부리면서 먼저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의외로 나선 건 현이신녀.
멀찍이 떨어져 거닐고 있던 현이신녀가 대공자를 바라봤다.
“대공자, 부탁드려요. 편한 대로 하세요. 저는 아파도 괜찮습니다.”
현이신녀가 빙긋 웃어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 후공도 마주 미소 지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직접 보았으니.
빙벽 안에서 칠십 년을 보낸 여인.
인내심의 차원이 다른 이가 아닌가.
어쩌면 현이신녀라면 자신과 같이 삼악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으니.
“현이신녀, 염려 마십시오. 그저 천상의 손길입니다.”
이내 현이신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교릉의 일곱 기운을 흘려보냈다.
느리게,
다정하게,
부드럽게.
그건 현이신녀도 느낄 수 있었다.
일곱 개의 기운이 스며들어 유유히 몸 안을 흐르는데, 온화하고 따스할 따름이었다.
빙벽 안에서 대공자를 처음 마주할 때,
그때 대공자가 지어 보이던 미소처럼 따스했다.
그렇게 따스하게 전신을 유영하던 기운이 상승했다. 위로, 위로. 목을 지나 휘감으며 뚜득. 고통은 없었다. 목이 조금 줄어들었고, 뚜드득, 뚜득.
안면 근육과 뼈가 변형되며 얼굴 형태가 달라져 갔다.
이윽고 후공이 손을 거뒀을 때,
현이신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공자의 눈동자가 거울이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현이신녀, 마음에 드신 것 같군요.”
현이의 시무룩함은 깊어졌다.
눈동자에 비친 여인은 여간 표독스럽고 신경질적인 모습이 아닌 것이다. 악녀도 이런 악녀가 없었다.
“대, 대공자……. 조금 온화하게 다시 부탁…….”
“자, 다음 분.”
끝났으니 그만 비켜라는 말이어서 현이신녀가 힘없이 물러났다.
“하하하, 전혀 아프지 않나 보구만. 다음은 내가 하겠네.”
나선 건 검선이었다.
아프지 않았다.
이전 제갈세가에서 성숙노괴를 역용해 줄 때와 지금의 후공의 경지는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그저 온화한 기운으로 조율해 가며 못생기게 만들어간 터.
그 결과,
“허허허, 이거 내가 봐도 무섭구만.”
검선도 마주한 눈동자를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고, 흡족해했다.
“그리고 하하하하하! 거북목이라 강인해 보이기도 하니 좋군.”
검선은 아플 것이 염려되었을 뿐,
못생겨진 건 상관없었다.
그렇게 검선은 모가지가 거의 사라졌고, 코가 들렸으며 광대뼈가 한쪽은 튀어나오고, 한쪽은 움푹 파인 모습이 되었다.
다음은 무당의 검존.
마친 후, 검존은 조금 수정을 요구했다.
“대공자, 목이 조금 틀어졌네만.”
“괜찮습니다. 좋아 보입니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네. 앞을 똑바로 볼 수 없어! 몸을 틀어야 그제야 정면이 똑바로 보인단 말이네.”
검존은 한쪽 눈이 반쯤 감기듯 했고, 코는 살짝 들렸으며 턱은 뭉특해졌다. 무산쌍웅과 비슷한 느낌,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험악한 모습.
거기까진 상관없는데, 문제는 모가지였다.
목이 좌측으로 틀어져, 정면을 보려면 눈동자를 우측으로 굴려야 앞을 볼 수 있었다.
“의도한 겁니다.”
“한 사람쯤은 모가지가 틀어져 있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그게 왜 나냐고오오오오!”
“에헴~ 다음 분!”
“에헴이고 뭐고 모가지를 똑바로 좀…….”
검선은 말을 맺지 못하고 옆으로 치워졌다.
다음 차레는 빙궁의 궁주 현음신녀.
그녀도 확연히 달라졌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소녀의 외모 대신 조그마한 악녀의 모습.
사람을 죽이고 흘러나온 피를 혀로 찍어보며 싱글 벙글 웃을 것 같은 잔혹함이 묻어났다.
마지막은 당명.
본래 차갑고 신경질인 얼굴이었던 당명은 조금 바보 같아졌다. 눈매가 축 처짐과 동시에 입이 유달리 튀어나와, 어찌 보면 억울해 보이기도 하고 모자라 보이기도 했다.
“하하하하하하하!”
당명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형의 눈동자를 통해 들여다보고 나니 대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본 것 같은 것이다.
- 대형, 제가 여태 이렇게 보였던 겁니까?
- 그럴 리가.
후공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스스로에게 교릉을 적용했다.
뚜드드드드드득!
화공신타가 되었고, 거의 동시에 풍제도 역용을 시전하여 혈종마군이 되었다.
“하하하, 화공신타를 보니 위안이 되는군.”
“목이 조금 틀어진 것 정도야.”
화공신타의 등장.
그 광경에 검선은 자신의 변한 모습이 꽤나 잘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검존 또한 모가지 정도는 불만도 아니다 싶어져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 목이 옆에서 끄덕여져서 잠시 흠칫하긴 했지만.
그렇게 모두가 악랄한 모습이 되고 나니 그 모습만으로 화산파의 정경은 달라졌다.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착각했으리라.
화산파가 일곱 악인들에 의해 점령된 것이라고.
“이젠 별호를 정해야겠군. 난 흡혈악(吸血惡)으로 하겠네.”
검선이 스스로에게 별호를 부여했고, 검존이 뒤따랐다.
“본 도는 독응마군(獨凝魔君)으로 하겠소이다.”
“난 만악귀(萬惡鬼).”
“저는 소악녀(少惡女)로 하겠어요.”
이미 생각해 두었는지 당명과 현음신녀가 별호를 말했다. 그 뒤를 이어,
“빙심마희(氷心魔嬉)…… 어떤가요?”
현이신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허허……. 신녀, 훌륭하오.”
“사저의 별호가 가장 멋져요.”
검선과 현음신녀가 추켜세우는 말에 현이신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검선과 현음이 흠칫했다. 현이가 다정하게 웃는다고 웃었지만 정작 드러나기는…… 언제 기회가 되면 죽여버릴 것만 같은 잔혹한 미소였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별호가 정해졌을 때,
“모두 주목.”
화공신타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모이자, 화공신타가 말을 이었다.
“명심해. 악인곡의 두목은 나야!”
곧바로 검선이 반박했다.
“대공자, 그게 무슨 소린가! 두목이라니!”
“대공자?”
화공신타가 갸웃하고는 이내 소리쳤다.
“시발, 뭔 개소리야. 나 화공신타야!”
검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해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자신도 화산의 검선이 아니라 흡혈악. 모습이 달라졌고, 별호도 바뀌었으며 말도 악인처럼 해야만 한다고 대공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공신타의 말이 이어졌다.
“나보다 더 못생긴 사람 있어? 내가 제일 못생겼어! 내가 강호에서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두목이야! 그래, 안 그래!”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가 설득당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현이신녀만 웃음을 보였다.
“후후, 대공자. 그렇게 해요.”
그 결과, 바로 쌍욕을 들었다.
“빙심마희, 돌았냐?”
현이도 이내 시무룩해졌다.
화공신타가 모두를 둘러보며 히죽거렸다.
“우린 이제 악인이야. 악인곡의 칠대 악인. 나는 곡주고. 그러니까 욕도 잘해야 해. 막 신경질도 내고! 어디 잘하나 들어보자. 흡혈악부터.”
검선, 아니 흡협악이 킬킬대면서 크게 소리쳤다.
“시발, 화산파 새끼들 다 어디로 꺼진 거야! 다음에 만나면 뼈를 발라버릴 테다!”
“합격.”
잘했기에 합격.
화공신타가 고개를 주억거리곤 검존, 아니 독응마군을 바라봤다.
검존이 바로 쌍욕을 날렸다.
“시발 것들 다 죽여버릴 테다아아아아!”
“그만!”
“어설퍼. 연습해.”
그다음은 현음신녀였다.
성격이 쾌활한 현음은 바로 합격했지만, 뒤이은 현이신녀는 모두의 우려를 샀다.
“시ㅂ…….”
평생 욕을 해 본 적이 없는,
슬픈 눈으로 빙벽 너머를 바라보며 칠십 년을 지낸 현이신녀는 끝을 맺지도 못했다.
“빙심마희.”
“넌 안 되겠다.”
“넌 말을 못하는 걸로 가자.”
“싫어.”
화공신타의 제안에 현이신녀가 거부했다.
“말수가 적은 걸로.”
“좋아. 노력해. 알았지?”
현이신녀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또 폭언을 불러왔다.
“대답 안 하냐!”
“……알았어.”
“어휴, 한심한 ㄴ…….”
현이신녀는 입이 바짝 바짝 타들어갔다.
빙벽에 머물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자.”
화공신타가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악인곡의 악인들이 따랐다.
“시발, 시발, 개새끼들아아아아!”
달리며 무당의 검존이 격렬히 소리치며 연습했고,
‘시…….’
현이는 마음 속으로 연습했다.
잘 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