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공령존.
이동 방향은 서북.
섬서를 돌파해 감숙성에 진입.
조금 더 북쪽으로 나아가는 와중, 어느 산야에서 둘은 만났다.
“추굉자?”
둘의 출발 지점은 달랐지만 목적지는 한곳인 것이다. 서로가 바라보며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그리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짐작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은 한쪽 팔이 날아갔고, 또 한 사람은 허리쯤에 피가 흥건했다.
“악인곡이겠지?”
“그래. 난 시안조를 통해 놈을 보았다. 화공신타를 보았다. 너는 누구를 보았지?”
“난 혈종마군에게 휩쓸렸다. 한데…….”
추굉자가 말을 주저했다.
추영자는 듣지 않았음에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바로 답했다.
“너의 짐작대로. 뇌신존과 흑야존이 죽었다.”
추굉자는 깊게 침음성을 흘렸다.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흑야존이 어떤 존재인가.
회영십존 중 칠존. 칠존의 자리에 있다 해도, 흑야존은 오존인 은령존조차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흑야존의 어둠조차 화공신타를 어찌하지 못했다니.”
“그보다 서둘러야 해. 소문은 들었겠지?”
소문은 추굉자가 들었다.
이동 중에 듣기 싫어도 들려온 이야기들.
악인곡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소문보다는 먼저 도착해야만 한다.
이내 둘은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는…….
느긋하게 악인곡이 뒤따르고 있었다.
추굉자와 추영자가 만났기에 추굉자를 뒤쫓았던 당명도 합류한 상태.
대화는 없었지만, 전음은 오갔다.
- 쌍년아!
검존과 현이신녀였다.
둘이 어설프다면서 화공신타가 연습을 종용했기에 검존과 현이신녀는 전음으로 악인스러움을 겨루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욕에 현이신녀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내 원망스럽게 바라보니, 검존이 너털거렸다.
- 신녀, 우리는 악인곡이오만. 나도 쌍년이란 욕은 처음 해보는 것이니 그리 원망스럽게 바라보지 마시오. 자, 이제 신녀의 차례외다.
- 검존, 악인곡이라고 해서 꼭 욕을 해야 하는 걸까요?
- 어쩌겠소. 악인곡주가 화공신타인걸.
반박할 말이 없어 현이신녀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곤 이내,
- 시발……놈.
- 하하, 좋소, 좋아! 그렇게 하는 것이외다.
- 다, 닥쳐!
- 허허, 누가 닥치라는 말을 더듬고 한단 말이오.
- 닥쳐!
- 바로 그거요! 잘하셨소이다.
검존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 검존, 지금 웃으신 건가요?
- 그렇소만.
- 화내는 줄 알았습니다.
- 허허, 화낼 일이 뭐가 있겠소.
얼굴이 흉악하게 변해, 웃어도 웃음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
- 어쨌든 계속합시다.
- 뭘 계속해! 미친 새끼야!
- 옳지!
- 옳지는 뭐가 옳지야! 내가 개로 보여?
현이신녀가 조금 능숙해졌다.
옳지, 라고 했다가 싸늘하게 들려온 전음에 검존이 내심 웃었다. 누군가를 평가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방금 현이신녀의 말은 제법 자연스러운 것이다.
- 개년에게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 개……개년?
현이신녀의 낯빛이 크게 상했다.
아무리 그대로 개년은 너무 심한 것이다. 개년에 비하면 쌍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체 무당의 검존은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 배운 건가.
그때 검존이 한 번 더 몰아붙였다.
- 왜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다시 불러줄까?
- 개새끼야!
현이신녀가 받아쳤다.
검존은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어렵게 끌어올린 분위기가 아닌가. 이어갈 필요가 있었다.
- 나는 개새끼, 너는 개년. 클클, 천생연분이로군.
- 방금 그 말 취소해.
- 무슨 말? 개년?
- 천생연분.
현이신녀가 서늘한 기운을 흘려내니 검존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움찔도 잠시, 검존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화가 난 상황이 더 낫다. 이보다 연습하기 좋은 분위기가 어딨겠는가.
- 쌍년이 눈 흘기기는. 천생연분이 어때서?
- 뭐라고?
- 왜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라도 있나?
- 없어. 그만해.
- 뭘 그만해, 이년아!
그 말에는 현이신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검존……, 그만하세요.
- 싫은데? 낄낄낄.
검존이 끔찍한 얼굴로 낄낄댔다.
하다 보니 이제 재미가 붙을 지경이었다.
- 그만하세요.
- 쌍년, 개년, 잡년! 낄낄낄낄…….
- 그만.
- 난 개새끼, 넌 개년. 우리는 천생연분. 혼인은 어디서 올려야 하나? 낄낄낄!
- 제발요.
현이신녀는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검존은 점점 더 탄력이 붙은 터라 신바람이 났고, 이젠 그냥 술술 나오는 지경이었다. 악인이며 마인이며 자유롭다고 하더니 왜 그런 말이 나온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개새끼, 너는 개년. 으하하하하하! 우리가 아이를 가지면 그건 바로 개새끼, 개새끼! 하하하하하하! 이거 너무 웃긴데? 으하하하하하!
자신이 말해놓고 자신이 터져버렸다.
무당파의 도사의 입장으로 보자면 선을 아득히 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악인곡의 입장이라면?
평범한 수준.
그 커다란 간격에 검존은 스스로 취했다.
이런 기분이었군!
내가 이런 날을 맞이할 줄이야!
- 웃겨 죽겠네! 그렇지 않느냐, 빙심마희!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나는 게 개새끼라니! 으하하하하하하!
이제 현이신녀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이었다.
언제나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안색이었던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듣고 있자니 떠오르고 만 것이다.
- 그만은 무슨. 재밌잖아. 상상해보라고! 하하하하하하! 니년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개새끼라고! 으하하하하하하하!
검존은 거의 뚝이 무너진 상태.
한번 경계가 허물어지자, 이미 악인이 다 되어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자유를 만끽했다.
전음이어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냥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 그만 좀 하세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 하하, 들었을 텐데. 떠올렸을 텐데~~~. 하하하하하!
- 그만!
- 그만은 개뿔! 으하하하하하!
현이신녀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만하라고, 시발 새끼야!”
전음도 잊고 크게 소리치며 검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란히 신형을 달리던 중. 검존이 벗어나기엔 너무 가까웠고, 설마 손을 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단번에 목이 틀어잡혔다.
“시, 신녀. 으드드드…….”
검존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치아를 연신 부딪혔다.
목을 붙든 현이의 손에서 한기가 흘러나오는데 호신강기를 그대로 뚫고 전신이 얼어붙어 가는 것이다.
“드드…….”
급기야 치아를 부딪히는 것도 무리.
쩌저적.
검존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완전히 빙벽에 갇힌 검존을 현이가 노려볼 때였다.
“빙심마희!”
들려온 목소리에 현이신녀가 고개를 돌렸다.
말한 건 화공신타였다.
화공신타가 엄지를 척 하니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건,
짝짝짝.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혈종마군, 흡혈악, 만악귀, 소악녀였다.
혈종마군이 박수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현이신녀가 죽었군.”
모두가 동감했다.
북해빙궁의 현이신녀가 죽고, 빙심마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현이신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내가 결국 해낸 건가?
칭찬받고 있었지만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나아가는 길.
해동된 검존은 현이신녀에게서 떨어져 신형을 날렸다. 다시 얼어붙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어붙을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득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샌가 감숙성 중부.
- 다녀와라.
후공은 색관조에게 하나의 향을 맡게 했다.
색관조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색관조가 향한 곳은 감숙의 태언장 쪽.
금방 도착했다.
태언장 부근에서 이제나 저제나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지귀객을 만났다.
[두더지님, 우리가 왔어요!]
“하하, 넌 참으로 똑똑하구나. 어떻게 날 찾아온 거냐?”
하오문이 마련해 준 거처에 있던 지귀객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색관조와 금섬을 반겼다.
[두더지를 못 찾을까 봐. 까르르르르르!]
“하하, 뭐 그렇다 치자. 가자! 가면서 그동안의 일도 이야기해 주렴.”
[가자아아아!]
합류는 어렵지 않았다.
추굉자와 추영자는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상처 부위를 지혈했음에도 한 번씩 피가 터져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었다.
감숙성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유원장이란 현판이 걸린 장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추굉자와 추영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추영자가 한 전각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비밀스럽게 감춰진 서신을 찾아냈다.
서신에는 가야 할 곳이 기록되어 있었기에 이내 다시 신형을 날렸다.
이제 목적지는 반양장.
그곳에 공령존과 환비존이 있다.
추굉자와 추영자가 반양장에 도착하기 전.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밤.
멀리 반양장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두 노인이었고, 거지였다.
- 호운개, 안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떤가?
- 어허, 그리 급해서야. 새벽이 되면 가자고 몇 번을 이야기해. 천포개도 기다려야 하고.
개방의 두 장로였다.
호운개와 설취개.
커다란 나무 위에 앉아 있었고, 한 번씩 호리병을 입에 가져가 술을 들이켰다.
- 근데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
- 방주님?
- 그래. 방주가 기행을 벌이는 것이 거의 일상생활이라곤 해도, 아예 다른 생활을 또 하고 있다는 건 너무 나간 것이 아니냔 말이네.
- 잠시 잠깐의 유희겠지.
- 잘못 본 건 아니고?
- 어허, 제대로 보았대도.
- 그 모습과 똑같았다고?
설취개의 물음에 호운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니까. 그때 그 모습과 같아. 후공에게 빨래를 당하고 아주 깨끗해졌을 때. 솔직히 아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내가 오죽했으면 ‘누구세요?’라고 물어봤을까.
호운개는 확신했다.
분명 어딘가 종적을 감췄던 방주가 반양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는 본 것이다.
말끔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본다 해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 무림맹주에게 왜 씻고 다니지 않느냐며 강가로 끌려가 강제로 목욕당한 후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다.
- 아니라면 각오해.
- 맞다면 각오해.
서로 말하고 함께 웃었다.
그것도 잠시 설취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설취개는 갸웃.
호운개가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이 굳은 것뿐 아니라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다.
“말을 해?”
“그, 그게…….”
호운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호운개의 시선이 얼굴에서 자신의 가슴께로 옮겨갔기에 설취개는 비로소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설취개의 눈동자도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었다.
“……거, 거짓말.”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와 있는 손이 보인 것이다.
문제는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환상인가?’
호운개가 놀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손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는데도 설취개가 여전히 웃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환상은 아니었다.
이내 시야가 흐릿해진 설취개가 무너져내려 나무 위에서 추락했다.
털썩.
호운개는 떨어지는 설취개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럴 틈이 없었다.
방금까지 설취개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다.
익숙한 체형,
낯설면서도 알고 있는 얼굴.
“방, 방주……. 어째서?”
“흐흐…… 왜일까?”
개방 방주 곤오신개가 웃음을 머금었다.
공령존이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