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84화 (384/460)

384화. 영혼까지 서늘해지는 귀곡성.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깜박 잠들었던 것일까.

그럴 것이다.

설취개가 죽고, 설취개를 죽인 이가 방주라니.

하하하, 말도 안돼.

분명 나는 설취개와 이야기를 하다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겠지.

한동안 방주를 못 보았고, 찾고 다닌다고 원망하고 있었으니.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꿈을 꾼 것일 테지.

‘꿈이라니 다행이군.’

호운개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났다. 피 맛도 느껴졌다. 통증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눈 앞에 있는 건 설취개가 아닌 방주.

깔끔한 모습이었고, 바라보는 눈빛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호운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방주, 이유나 들어 봅시다.”

꿈이 아니란 걸 몰랐을까.

단지 호운개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래선 안 되는 것이니까. 그저 만약에, 만약에…… 신이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꿈을 꾼 것으로 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하지만 신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호운개는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마화(魔化)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못 알아보았던 것인지.

‘마화한 것이라면 좋겠다.’

그것이 호운개의 마지막 바람.

방주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면 너무 슬퍼지는 것이다.

곤오신개가 고개를 저었다.

공령존이 고개를 저었다.

“난 거지가 싫다. 이 몸도 마음에 들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환혼일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한 호운개가 미간을 좁혔다.

공령존의 말이 이어졌다.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나. 난 정말이지 질려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이 몸이 내겐 최적의 몸이었거든.”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난 고통을 느낄 수 없거든.”

듣고 있음에도 호운개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그래서 난 상대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호운개가 눈을 부릅떴다.

언제 파고든 건가? 언제 다가온 것인가? 방주의 손이 어느샌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거짓말 같았다.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통증 대신 뚫고 들어온 손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묘한 상쾌함이 퍼지고 있었다. 분명 손이 파고들고, 손목을 타고 피가 흐르는데도.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운개, 나의 자비가 어떠냐? 심지어 이렇게 해도 고통은 없다.”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

이내 호운개가 본 것은 자신의 심장이었다.

어이없게도 몸에서 빠져 나왔다. 믿을 수 없게도 아프지 않았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보는 것도 놀랍지만, 그 심장이 자신의 것이란 점에서 호운개는 웃음이 났다.

“방주, 그대는 지옥에 가겠군.”

“흐흐, 먼저 가 있어라.”

공령존이 손으로 호운개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 순간, 호운개의 머리가 맥없이 잘려 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 굴렀다. 어찌된 일인지 아직 죽지 않아 호운개의 세상은 빙글빙글 돌았다. 땅이었다가 숲이었다가 밤하늘이었다가.

그렇게 구르다 멈춰선 후 보았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천포개란 놈은 언제 오려나. 지금쯤 환비존이 잡았을 것 같은데 말씀이야.”

악인곡의 추적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검존은 점점 더 난감해지고 있었다.

- 현이신녀, 이제 그만합시다.

현이신녀가 줄기차게 전음을 보내오는 것이다.

문제라면 그것이 욕이라는 점.

게다가 이젠 충분히 잘하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연습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계속 자신에게만 전음을 보내니 이젠 괴로울 지경이었다.

- 닥쳐, 뭘 그만해!

멀리 더 떨어져 신형을 날려도 소용없었다. 까마득히 아예 멀어지지 않는 이상 전음을 듣지 않을 방도는 없다.

결국 참다못한 검존이 구원을 청했다.

- 대공자, 나 좀 도와주게.

- 대공자? 그건 누구냐! 곡주라고 불러!

돌아온 건 싸늘한 전음.

여기서도 치이고, 저기서도 치인 검존이 시무룩해졌다. 전음일 뿐인데 왜 그리 차갑게 구는 거냐고 따질 순 없었다.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는가.

그동안 봐온 모습이 있다.

어디 대공자가 위세를 부리고, 곡주로서 존중받기 위함이겠는가.

그저 대공자는 실수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방심하여 실제 상황에서도 ‘대공자’라는 말이 튀어나오면 자신들은 곤란해지는 것이다.

아니, 모두가 곤란해진다.

악인곡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그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연관도 없는 많은 이들이 희생당할 것이고, 인질극에서도 취약해진다. 인질을 두고 마주하면 난이도는 수백 배로 올라갈 터.

그러니 악인 대 악인의 구도를 철저히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도 속일 정도로 악인이 되어야 했다.

- 곡주, 빙심마희를 어떻게 좀 해 줘.

- 그래? 맡겨 둬.

- 고맙다.

- 밥 사.

- ……그, 그러지.

여기서 갑자기 밥을 사라는 말이 나올 줄은 짐작도 못한 검존이 더듬거렸다. 곡주가 괜히 곡주가 아니구나, 생각할 때…… 현이신녀의 전음이 뚝 끊어졌다.

- 빙심마희, 이제부터는 내게 해라.

현이신녀는 화공신타의 전음을 들은 터.

그녀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검존과 대공자는 아예 다른 존재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같은 의미일지 몰라도 그녀에게 대공자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그런 머뭇거림은 당연하게도 화공신타의 폭언을 불러왔다.

- 뭐여? 사람을 가려?

- 그, 그게…….

- 정신 똑바로 차려. 가면을 쓰고도 머뭇거리면 너와는 함께할 수 없어.

가면은 역용.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으니, 아무도 너인 줄 모를 테니 멋대로 하라는 뜻이었지만…… 대공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현이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대공자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이쯤에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오면 되돌릴 수 없다.

- 신타, 같잖은 말을 하네.

- 웃어?

- 미안해.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란 말이냐.

- 미친 새끼. 넌 거울을 안 보나 보네?

- 호수에는 종종 비춰 봐.

-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해?

- 호수에 비친 내 모습…….

- 닥쳐, 상놈의 새끼야!

갑자기 잘했기에 화공신타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 마희,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겨우 받아쳤을 때, 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 호호호호호! 미친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 ………….

화공신타, 아니 후공의 목젖이 출렁.

‘이렇게 잘한다고?’

비록 전음이었지만 후공은 현이의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이쯤이면 거의 온 셈. 특히 마음에 든 건 방금 전 현이의 웃음소리였다.

- 빙심마희, 이렇게 웃어 보는 건 어떠냐.

- 어떻게?

- 더 기괴하게, 더 귀신처럼. 그럼 더 매력적일 것 같거든.

- 흥! 어줍잖게 조언은.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현이는 이내 웃음소리를 냈다.

- 호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귀신이 웃고 있는 건가,

귀신이 울고 있는 건가.

앞을 길게 끌어 웃으니 기괴함이 더해졌고, 웃음임에도 서글픔이 묻어났다.

- 좋군.

그 칭찬은 현이신녀를 춤추게 했다.

- 호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계속 웃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 호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현이는 둑이 터져버린 터.

마지막 방어선과 같았던 대공자 앞에서까지 욕을 해내고 나니 마음에 자리한 규격이 부서져 나갔다.

‘하하, 마치 내가 천공단이 된 것 같아.’

천공단도 규격이 없었다.

제멋대로요, 천변만화.

그 모습에서 한없는 자유로움을 볼 수 있었고 또 부러워했는데, 현이는 이제 넘치는 해방감을 맛보며 마치 자신이 천공단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현이는 천공단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더 기괴하고 더 귀기스럽게 끊임없이 전음으로 귀곡성을 흘려보냈고…….

‘이런 기분이었군.’

후공은 검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밤.

추굉자와 추영자는 반양장에 도착했다.

둘의 몰골에 놀랐던 공령존은, 두 사람이 쏟아내는 말에는 더 큰 반응을 보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뇌신존과 흑야존이 죽음을 당했다니!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였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헛소리!”

그건 회영십존인 환비존도 마찬가지.

회영구존인 뇌신존은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칠존인 흑야존은 죽을 수 없는 자가 아닌가.

오십 대 초반.

머리카락 한 올 없는 환비존이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거짓이라면 결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그렇게 탐색하듯 노려보았음에도 추영자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 제가…… 시안조를 통해 보았습니다. 분명 화공신타였습니다. 그가 크게 떠들기도 했습니다. 그가 뇌신존을 멸하고, 이어 흑야존까지…….”

추영자는 자신이 본 바를 상세하게 말했고, 추영자의 말이 끝났을 땐 추굉자가 입을 열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화공신타와 악인곡이 화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손에 모두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한 환혼진도 악인곡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풍제는? 그 무리는?”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도 악인곡에 당했습니다. 죽거나 크게 다쳐 도주했다는 말이었습니다.”

“흐으음…….”

환비존이 침음성과 함께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공령존은 아니었다.

공령존의 눈은 가늘어졌고, 어느샌가 그의 두 눈에는 살기가 번져나왔다.

“한데……. 너희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우, 운이 좋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기운에 휩쓸렸을 따름입니다. 부디 믿어주십시오!”

“저도 그렇습니다. 산 하나가 쓸려나갔습니다. 갑자기 몰아친 엄청난 기운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공령존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공령존의 손이 추영자의 목을 파고들었다.

파고들어 손이 절반가량 박혔음에도 추영자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케엑, 켁! 저희가 거짓을 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짓을 고하려…… 켁, 크엑…… 이곳까지 올 이유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라면 하나뿐이지.”

공령존이 시선을 돌려 창 쪽을 바라봤다.

그래, 이유라면 단 하나뿐이다.

추적.

이 두 놈을 길안내자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악인곡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악인곡에는 섭혼을 운용할 수 있는 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추영자의 목에서 손을 뺀 공령존은 이내 추굉자의 머리에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넌 섭혼에 당한 것이겠지.”

역시 고통은 없었기에 추굉자가 웃었다.

“알아차렸네?”

“하하하, 이제 곧 주군께서 오신다. 위대한 칭호, 악인곡의 혈종마군께서 곧 너희를 쓸어버릴 것이다! 으하하하하…….”

공령존이 손을 뽑아내면서 추굉자가 허물어졌다.

그럼에도 여운처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이 끝을 보였을 때,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졌다.

마치 겨울밤이 된 것처럼.

그와 함께,

“호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어디선가 귀곡성이 들려왔다.

귀기어린 소리였고,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끔찍한 소리였기에 공령존과 환비존의 낯빛이 굳어졌다.

“호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흐흐~~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주변의 차가운 공기와 맞물려…….

정녕 귀신이 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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