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모든 걸 기억할 필요는 없다 해도.
반양장의 뜨락.
타닥, 타닥.
붉고 노란 모닥불이 타올랐다.
‘이제 제법 악인곡 같군.’
모닥불에서 불씨가 터져나왔다.
순간적으로 튀어오른 불씨는 몇 개일까?
총 일흔셋.
찰나간에 후공은 숫자를 헤아렸다.
불씨들은 붉은빛을 띠었다가 빛이 사그라들었고, 이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타닥, 타다닥.
새로운 불씨가 터져나왔다. 이번엔 예순일곱.
점멸하며 하나둘 소멸되어 갔다.
원래는 나무였는데 불꽃이 되고, 이제 재가 되어 흩어지는 변화는 신기한 일이었다.
그 변화만큼이나 검선과 검존, 현이가 변했다.
잘할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기대 이상.
모두가 고정된 틀에서 빠르게 벗어나 자유로워졌고, 심지어 검선은 종달새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날아가자를 외쳤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현이와 검존ㄷ…….’
“이 꼽추새끼야, 넌 왜 아무 일도 안 하는 거냐! 곡주면 다야? 응? 그런 거야?”
모닥불 앞쪽.
산돼지를 사냥해 온 검존이 돼지를 손질하면서 시비를 털었기에 후공의 상념은 끊어졌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잘하네.
“웃어?”
“독응아, 좀 웃고 살자.”
“그럼 일을 하라고오오오오!”
검존이 꽥 소리쳤다.
일은 검존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현음과 현이신녀는 관을 준비하러 나갔다.
공령존을 넣어둘 관이었다.
풍제와 당명도 바쁘게 움직여 반양장에 머물고 있던 이들을 분류해 누군 죽이고, 누군 살려 보냈다.
살려 보낸 이들은 대부분 시녀나 하인으로 잡혀온 이들. 그들은 당연하게도 떠나는 와중 풍제의 섭혼에 의해 일정 기간의 기억을 삭제당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머리 숙여 인사한 다음 반양장에서 멀어졌을 때 기억이 소실. 놀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응? 이 사람들은 누구?’
서로가 돌아보며 갸웃거렸다가 어떤 영문이냐며 대화를 나누다 아무 답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각자가 집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면 반년 만의 귀가, 혹은 일 년 만의 귀가.
하지만 반가워할 테지.
다 같이 기뻐할 테지.
모든 걸 기억할 이유는 없다.
몸은 공포를 잊지 않아 잠들었을 때 악몽을 꾸게 될지라도, 깨어나면 꿈이었다며 안심할 것이다. 그것이면 된다.
타닥, 타닥, 타닥.
치이이이.
모닥불 위에 고기가 올려졌다.
“야, 다들 먹고 해! 회영부 놈들 언제 올 줄 알고.”
검존의 말에 어느새 돌아온 현음와 현이가 관을 들고 내려섰다. 다른 이들도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늦은 건 검선.
“가자, 늙은 거지 새끼야.”
늙은 거지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이곳 장원의 지하에서 발견한 개방 장로 천포개였다.
천포개는 쭈뼛쭈뼛 주눅들고 의아한 낯빛으로 장작불 한쪽에 자리했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돌아가는 상황이 도통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는 것이다.
그는 환비존에게 붙잡혔고,
반양장에 끌려왔으며,
죽음의 순간 추굉자와 추영자가 장원에 들어서면서 잠시 목숨을 연명한 터.
누구에게 잡힌 걸까?
화경의 중에 이른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제압하였으니 분명 절세고수일 텐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죽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 이들이 나타났다.
누군가 날 구하러 왔구나!
한데 악인곡.
그리고 그 와중에 듣게 된 대화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악인곡도 처음 들어보았지만, 회영부도 마찬가지.
환혼은 무엇이고, 동맹에 대한 제안은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왜 나를 안 죽이지?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천포개는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들은 악인곡.
그리고 악인곡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출중한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살이 떨릴 지경.
악인곡에 소속될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로운가.
최소한 이 정도씩은 생겨야 악인곡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천포개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거지야, 뭐하냐?”
“자, 이거 받아.”
앞쪽에서 돼지 갈빗살이 건네졌기에 천포개가 멍해졌다. 악인곡 중 가장 무섭게 생긴 이가 고기를 건넬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 한 터.
“저는…… 괘, 괜찮습니다.”
“나 무시해? 나 악인곡주인데 방금 무시당한 거야?”
“아, 아닙니다. 그럼…….”
천포개가 고기를 받아들고 뜯었다.
분명 맛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맛있어! 잘 구웠어! 그래, 죽기 전 마지막 만찬이겠지. 뭐 까짓 고기 한 덩어리쯤 먹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틀렸다.
한 덩어리가 끝이 아니었다.
다 먹기 무섭게 또 한 덩어리가 건네졌다.
이번엔 다른 사람.
“편하게 먹어.”
그렇게 네 번이나 받아먹은 뒤에는 폭언이 쏟아졌다.
“상놈의 새끼야!”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알아서 처먹으라고 좀! 우리가 하나씩 네놈에게 갖다 바쳐야겠냐! 니가 곡주야! 거지잖아!”
‘시발…….’
안 먹는다고 화를 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천포개가 이젠 알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이상한 놈들이네.’
왜 내게 잘해주지?
못생긴 놈도, 흉악한 놈도, 사나워 보이는 여인도.
어떻게 봐도 다정하잖아.
아니, 이건 그런 건가? 유희인가?
지독한 자들은 간혹 이렇게 한다는 걸 천포개는 알고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전 평온함을 선사한다. 거기에서 오는 배신감과 황망함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그런 것이겠지.’
한데…… 술을 건넨다.
한데…… 물을 건넨다.
계속 살펴도 다정함이 가시지 않는다.
기분 좋게 배도 불러왔기에 천포개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졌다. 용기를 냈다.
“저기…… 아까 들었습니다. 악인곡이시라고…….”
“그래서 뭐?”
“어…… 그러니까 저는 개방 장로 천포개라고 합니다.”
모두가 천포개를 바라봤다.
그걸 모르겠는가.
후공도 알고 있었고, 풍제도 당명도, 그리고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도 알고 있었다. 현이신녀도 검선의 전음을 통해 누구인지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저기…… 실은 제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야? 허어…… 혼인을 한 거야? 거지인데?”
천포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두 명의 장로와 이곳에 함께 왔었습니다. 그 둘은 호운개와 설취개입니다. 호운개가 말하길…… 하하, 이거 말하려니 우습긴 합니다만, 방주가 깨끗한 모습으로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 뭐겠습니까.”
돌아오는 말 대신 모두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다시 천포개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하하, 제가 말을 해놓고도 우습긴 하군요. 여하튼 제가 궁금한 건 두 늙은 거지의 행방입니다. 저처럼 이곳에 잡혀왔나 싶었는데 없는 걸 보니 어디로 간 것도 같고…… 흐흐, 혹시 보셨나 해서 말입니다.”
또 답이 없고 다들 물끄러미 바라봤기에 괜히 민망해진 천포개가 고기를 뜯어 입에 가져갔다.
“허허, 왜들…….”
왜겠는가.
이미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오는 길에 호운개와 설취개를 보았다.
살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디로 갔겠지. 고기나 처먹어!”
“왜 그 두 놈을 걱정해? 넌 네 목숨이나 걱정해! 네놈이 살아서 돌아갈 것 같아? 어? 고기 줬다고 살려보낼 것 같냐고!”
검존은 나름 차분히 말했지만 검선은 윽박질렀다.
험악한 악인곡에 둘러싸여 있는 와중에도 천포개가 호운개와 설취개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천포개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고기가 있고 술이 있고, 악인곡분들과 함께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습니다.”
천포개가 호기롭게 말했다.
분명 처음에는 겁이 났다. 한데 이젠 아니었다.
왜 그러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대답할 말은 없었다.
그저 이 자리가 유지되고 또 한 마디 두 마디 대화가 오가다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더 이상 무섭지가 않았다.
천포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알고 계시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꼭 알고 싶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온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물론 대답이라면 할 수 있었다.
죽었노라고.
한 사람은 심장이 뽑혔고,
한 사람은 가슴이 꿰뚫린 채로.
그중 심장이 뽑혀 나간 호운개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호운개가 남긴 마지막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불신의 빛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통해 누가 살수를 펼쳤는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운개는 죽음 직전까지도 방주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걸 기억할 필요는 없다.
비록 악몽을 꾸게 되더라도 차라리 악몽이 낫다.
이미 천포개에 대해서는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풍제의 섭혼.
기억을 지워 보낸다.
호운개와 설취개와 함께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만 남겨둔 채로 돌려보내기로 이야기는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기억을 지운다 해도…….
단 한 순간이라도 슬픔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검존은 괜스레 투덜거렸고, 검선은 술병을 들어 입에 거칠게 털어넣었다. 현이는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했고, 현음은 고기를 집어들었다.
풍제도, 당명도 마찬가지.
풍제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고, 당명은 나무를 주워 장작불에 던져 넣었다.
‘다들 한심하군. 내가 틀렸어.’
그런 모습에 후공은 내심 혀를 찼다.
다들 이젠 악인곡의 악인으로 손색이 없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한심하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쯤이면 들리게 된다.
알게 된다.
다정함은 이미 우러나왔고, 어떨 때 침묵은 더 큰 외침이 되기도 한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모두가 말했다.
그리고 듣지 않은 사람도 들었다.
모두를 둘러보던 천포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보았구나……. 죽었구나.’
주륵.
대답을 들은 천포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들려주시오!”
또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악인곡이 아니란 것도 이제 천포개는 알 수 있었다. 호운개와 설취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걸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지만…… 난 알고 싶소. 난 기억하고 싶소! 잊고 싶지 않소! 난 언제까지고 이날의 슬픔을 기억하고 싶으니, 그러니 내게 알려주시오!”
흐느끼던 천포개가 이내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