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391화 (391/460)

391화. 귀운종의 후인들.

손광의 심장은 멎었다.

얼굴은 아예 검게 변했다.

그래도 웃고 있었다.

얼굴이 검게 변했어도 손광의 마지막 얼굴이 웃고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죽지 마라! 죽지 마!”

은령존이 외치며 손광의 손을 잡았다. 기운을 불어넣고 독기를 유도해 황급히 뽑아냈다. 검은 액체가 은령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가,

스스스.

삼매진화에 날아갔다.

이어 은령존은 손광의 심장 부위에 손을 얹었다 떼었다.

투웅!

손광의 몸이 출렁였다.

다시금, 투웅!

심장에 격한 충격을 주어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는 것이었다.

“제발, 살아나라!”

투웅! 투웅!

십여 차례를 이어갔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죽었다.

“으으으!”

은령존이 신음을 발하고는 이내 고함을 내질렀다.

애송이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피가 들끓는 것이다.

살리지 못한 것도 분통이 터져 이가 갈렸다.

놈을 살려야 했다.

어떻게든 살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처절한 죽음을 선사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얼굴은 웃음 대신 고통과 비굴함이 되었을 테니.

한데 놈의 마지막은 너무도 환한 웃음.

은령존이 두 손으로 손광의 어깨를 잡았다.

이내 그는 종이 찢듯 갈가리 찢어버렸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나도 손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은령존은 그 얼굴마저 부숴버린 후,

신형을 날렸다.

‘반드시 찾아내주마. 귀운종을 지키려한 너의 희생을 헛되게 해주마! 나를 위해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를 죽여주마!’

한편,

후공과 현이신녀는 허공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곧 도착.

아직 그곳에 있겠지.

후공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운종이 새로운 터전으로 옮긴 건 얼마 전.

귀운종의 아이들은 3년 정도에 한 번씩 터전을 바꾸니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2년 만에 옮길 때가 있고, 더 빠를 때도 있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상황.

정들었다 싶으면 옮겨야 하는 것이 불편할 테지만 귀운종의 아이들은 그걸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귀운종의 숙명이었다.

그 생각도 잠시, 후공은 흘깃 옆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현이신녀의 발밑. 그녀의 발아래 연신 얼음 원반이 생성되었다가 그녀가 발을 떼고 나아가면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떤 이치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대기 중의 수증기를 빠르게 응집하여 얼린 다음, 그것을 반발력 삼아 나아간다.

단순한 이치였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구현은 다른 차원.

무엇보다 이토록 빠르게 허공을 질주하는 경우는 그 모든 것이 찰나 간에 이루어져야 하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타, 뭘 봐?”

“어, 너는 발까지 못 생겼네.”

“호호호, 꼽추새끼 말하는 것 좀 봐.”

“놀리지 마. 여자들이 얼마나 날 추앙하는지 알아! 내가 지나가면 다들 난리가 나!”

“진심이야?”

“……그래.”

“대답이 왜 늦어!”

“잠시 침 삼켰어.”

“호호호호호호!”

현이신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웃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화공신타, 아니 대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게 된 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웃게 되니 신기한 일이었다.

이내 현이신녀가 입을 열었다.

“은령존이 귀운종을 먼저 찾은 거면 어쩌지?”

“잘된 일이지. 다 죽어버렸을 테니.”

거리낌없는 말투였지만, 현이신녀는 어감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조금은 무거운.

대공자는 귀운종과도 인연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알 수 없었다.

대공자는 강호에 친구가 많으니 인연이 있을지도.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우리 손으로 귀운종까지 죽여야 해.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

“한데 은령존이 문제야.”

“은령존 그놈이 음공을 다루니까. 내가 도움이 안 될 것 같거든. 그거 알아?”

“그건 귀신도 몰라!”

“호호호!”

다시 웃음을 터뜨린 현이신녀가 말을 이었다.

“소리는 허공보다 물에서 더 빠르게 이동해. 그리고 소리가 얼음을 관통할 땐 더 빠르지.”

소리는 대기보다 물에서 빨리 전달되고, 얼음에서는 물보다 더 빠르게 이동한다. 음공이 절세적인 경지에 오른 자를 상대함에 있어 빙궁의 무학은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는 의미였다.

현이가 음공의 대가를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빙궁에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역사는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빙궁의 무학은 음공을 가로막기보다는 도리어 음공을 증폭시키니, 자신이 도리어 방해가 되지 않을까 현이는 염려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비웃음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넌 쓸데없는 소릴 하고 앉았네.”

“그냥 놈을 초반에 죽여버리면 되잖아! 방울 소리 낼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래, 안 그래?”

“소리 내기도 전에?”

“그렇다니까.”

“와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넌 정말 잘 났구나!”

“욕이냐?”

“칭찬이야.”

“고맙다.”

“푸훗!”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현이신녀가 뿜어버렸다가 이내 사레가 들려 헛기침을 했다.

그때 후공은 갸웃. 미간도 찡그렸다.

그 모습에 현이신녀가 헛기침을 잠재우고 물었다.

“왜 그래?”

“거의 다 왔는데…….”

“없다.”

그 말에는 현이신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산 하나를 그대로 지난 후 촌락 위에서 멈췄다.

골짜기였고, 여러 모옥들이 보였지만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흔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백여 개의 모옥.

생활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먼지가 많이 쌓여 있지 않다.

기대는 벗어났지만 다행인 점도 있었다.

사람이 없다는 점이 다행. 산 사람도 없지만, 죽은 사람도 없는 것이다.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고, 부서진 가옥도 없었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저 말끔히 사라졌기에 후공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후공은 옅은 향도 맡을 수 있었다.

많이 옅어졌지만 분명 무흔신투에게 남겨둔 천향의 무향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신타, 찾을 수 있겠어?”

“찾아야지.”

후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색관조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대로 하강해 주인의 팔에 내려앉았다.

[악인곡주, 나의 주인님! 명을 내려주세요!]

“이 향이다.”

[네!]

“무흔신투를 찾아라!”

[존명!]

지금은 천화서고 대공자의 영물이 아닌 악인곡주의 영물. 깃털도 그에 걸맞게 검붉은 색으로 무섭게 바꾼 상황이었기에 아주 씩씩하게 답했다.

그건 금섬도 마찬가지.

눈을 무섭게 뜨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미 금섬도 금빛을 벗어던지고 청록색 두꺼비가 되어 있었기에 제법 사나운 표정과 몸의 색깔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색관조와 금섬이 날아오른 후, 후공과 현이신녀는 하늘로 솟구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느 산기슭.

여러 모옥들이 자리했고, 또 다른 모옥을 짓고 있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밭을 일구고 있었다.

밭을 일구는 이들 중에는 무흔신투도 있었다.

그륵, 그르륵.

쟁기로 땅을 갈아엎는 중.

도둑놈이었다가 천공단이 되었다가 이젠 거의 농부였다.

그렇다해도 자신이 맡은 임무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무연객 님, 아주 여기에서 눌러 사실 생각입니까?”

“그것도 좋지.”

옆쪽의 밭.

오십 대 중반, 무연객이 턱을 주억거렸다. 그의 얼굴형은 네모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각형이어서 끄덕거려도 무게감이 있었다.

“도둑놈아, 엉뚱한 소리 말고 밭이나 갈아라.”

“아니 진짜 지금 밭이나 갈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환혼이란 말입니다, 환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 제 이야기를 듣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연객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천화서고 대공자, 천공단.

강호에 그 위명이 진동을 하고 있지만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무림맹이 통째로 거처를 옮겼다니.

무림맹이?

그리고 환혼을 다루는 이들이 있다고?

소향객이 환혼되어 나타났다고?

모조리 말 같지 않은 소리뿐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도둑놈이 와서 알릴 일인가. 맹에서 연락을 해왔을 것이다.

스승은 요로선인.

스승께서 무흔신투 같은 도둑놈을 보낼 리가.

그런 마음은 다른 천하십객도 같았다.

“신투, 계속 헛소리를 해대면 오늘 술은 없다.”

“어? 그건 안되죠. 절대 그럴 순 없습죠.”

무흔신투가 양팔을 교차하고는 고개까지 격렬히 저었기에 모옥을 짓고 있던 철담객과 칠절선생은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그럼 그렇지.’

신투의 헛소리에는 술이 약이었다.

그래도 희한하고 의아한 마음은 있었다.

술은 이곳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고, 신투가 굳이 이곳에 남아 밭을 갈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환혼은 너무 황당한 일이다.

무림맹의 일도 그렇고.

생각은 거기까지.

천하십객, 정확히는 소향객과 청우자가 갈 곳이 있다며 벗어났으니 팔객은 귀운종의 새로운 거처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

무흔신투도 에라 모르겠다의 상태.

마침 귀운종은 원래 있던 곳에서 멀리 거처도 옮겼으니 별일이야 있겠냐 싶은 마음으로 소처럼 쟁기를 끌었다.

그르륵, 그륵.

‘설마 대공자님께서 날 죽이기야 하겠어?’

나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러다가도 한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아니야. 대공자님은 날 죽일 거야. 틀림없어. 모산의 보물인 오행기까지 쥐여 보냈는데 밭이나 갈고 있었냐면서 때리실 거야! 틀림없다고!’

그 생각에 쟁기를 잠시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이게 아닌데.

그래, 이건 천하십객의 잘못이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또 천하십객을 탓하기도 뭐해.’

이내 신투는 시무룩해졌다.

내내 지켜봤다. 천하십객은 귀운종의 후인들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귀운종의 이전 거처가 노출되었다. 수상한 이들이 사흘 정도 얼쩡거렸다. 천하십객이 그들을 쫓아냈지만, 노출된 이상 거처를 옮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아래 이곳으로 옮겨온 터.

이곳에 온 후에는 여러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무리를 떠나 외부에 있는 귀운종의 후인들에게 그렇게 새로운 거처를 알렸다.

그 외에는 모를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런 가운데 천하십객은 조금 더 머물고 싶어 했다.

조금 더 가꿔놓고 싶어 했다.

밭을 갈고, 모옥을 짓고, 길을 내고.

‘그래,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무흔신투는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듯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곳의 한 모옥.

모락모락 찻잔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중에,

“칠절선생,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십니까?”

귀운종의 후인 염백은 천하십객 중 하나인 칠절선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었다.

염백은 귀운종 후인들의 지도자.

추대된 적도 없고, 따로 부르는 칭호도 없었지만 모두가 그를 따랐고,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 곧 갈 테니 염려 마라.”

“염려가 됩니다.”

“서운하구만.”

칠절선생이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허약해 보입니까?”

염백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

뱉어낸 말과 함께하니 무심함 속에 언짢음이 묻어나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만 같았다.

“허약하지 않지.”

“그럼 강해서 그렇습니까?”

“허허, 강하긴 하다. 어느덧 네가 현경을 넘보고 있으니.”

“그래서 두렵습니까?”

“두렵진 않다.”

“그럼 같잖은 호의는 그만 베푸는 게 좋겠습니다.”

“같잖으면 또 어떠하냐. 호의면 되는 것이지.”

“과연 호의일까요?”

염백의 눈이 빛을 발했다.

날카롭게 날아든 염백의 눈빛을 칠절선생이 지그시 바라볼 때, 염백의 말이 이어졌다.

“호의가 아니라 감시겠지요? 후공이 떠났고, 유령곡이 이미 날뛰었으니 귀운종도 그렇게 될까 걱정하는 것 아닙니까?”

칠절선생은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하지 않는다.”

아니다.

실은 걱정하고 있었다.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고,

잘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떠난 후공의 의지였으니.

천하십객은 그 뜻을 따를 뿐.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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