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오고 있다. 가고 있다.
“걱정하지 않는다라…….”
염백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럼 그저 연민이라고?
불쌍해서라고?
염백은 그것이 더 짜증나고 역겨워졌다.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돌봐주어야 하는 아이 취급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났다.
“칠절선생, 좋은 마음으로 온 손님인 건 알겠습니다. 한데 주인이 싫다면 손님은 떠나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허.”
염백의 말은 부드러운 존대였지만 억양은 달랐다. 신경질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그럼에도 칠절선생은 웃으며 너털거렸다.
“몰랐나 보구나. 우리는 원래 뻔뻔한 자들이란다.”
“제가 그걸 모를 리 있습니까.”
염백도 잘 알고 있었다.
뻔뻔한 자들.
후공의 졸개들.
후공을 졸졸 따라다니던 자들.
후공이라면 무조건 추앙하는 이들, 후공의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실행에 옮기는 이들.
하나둘 모여 열 명이 되었다.
그렇게 천하십객이 되었다고 했다.
천하십객이란 칭호를 부여받은 건 후공이 무림맹주가 된 뒤.
맹의 열 명의 손님이란 의미였다.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니 언제 떠나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라고 들었다.
그럼에도 천하십객은 맹을 떠난 적이 없었다.
후공이 쫒아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천하십객은 후공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뻔뻔한 자들이었다.
후공이 떠나고 더 이상 없는데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
‘역겨워.’
의(義)와 정(正)?
혹은 정(情)?
아니, 이건 위선이다.
위선이면서 동시에 나른한 포만감에 불과하다.
내가 이렇게 자비롭지 않냐며.
우리가 이토록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아니냐며 과시하고 그걸로 위안 삼는 정신적인 포식 행위가 아니면 무엇인가.
“선생,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다.”
칠절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공과 그 아우들이 쓸어버린 귀운종.
거기에 가담한 당시 강호의 명숙들.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
철천지 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령곡을 훨씬 뛰어넘는 귀운종이었기에 더욱 마음을 쓰기도 했다. 귀운종은 규모도 컸던 만큼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후공의 생각이 그러했고, 십객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죄를 묻는 사람은 많았다.
피를 되갚아주고 싶어 하는 이들은 넘쳤다.
유령곡보다 더 많았다.
귀운종은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죽게 마련이 아닌가.
어차피 한 세월. 흙이 된다.
그따위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
귀운종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겐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 상처받은 이들은 반드시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어서, 귀운종은 뿌리를 뽑아야 하고 하늘 아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한 일이 아니다.
후공의 생각이 그러했고, 칠절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지. 난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싶다. 함께 강호 유람도 하고, 천하 각지에 가본 적 없는 곳에서 맛좋은 요리도 함께 나누고 말이다.”
그 말에는 염백이 웃었다.
“술을 퍼붓고 크게 노래도 불러야겠군요.”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안광은 불타올랐고, 살기도 진득하게 흘려냈다.
“칠절선생…….”
귀운종이 모두 염백과 같은 건 아니었다.
사람은 각양각색.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여기요. 드셔 보세요.”
천하십객이 베푸는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삼십 대 중반.
눈이 큰 여인.
아름다운 여인.
연청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모옥을 짓고 있던 천하십객 중 초류객은, 연청이 내민 잔을 내려다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건……?”
“왜요?”
“전설의 영수(靈水)인 공청석유? 이 귀한 걸 어찌 내게.”
연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잔에 든 건 그냥 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초류객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잔을 받아들고 소중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초류객께선 공청석유를 본 적이 없나 보죠?”
“넌 있나 보구나.”
“하하, 그럴 리가요.”
“난 본 적이 있다.”
연청의 눈이 커졌다.
“언제요? 어떻게요?”
초류객이 다 마신 물잔을 들어 보였다.
“방금. 이렇게.”
“하하하하! 순 사기꾼.”
사기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연청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내민 한 잔의 물이, 자신이 내민 간단한 호의가 공청석유로 돌아온 것이다.
“진짜 본 적이 있긴 있어요?”
“없어. 슬프네.”
초류객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기에 연청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있었다.
후공이 건네줬었다.
후공은 연청이 물잔을 건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공청석유를 주었다.
대수로울 것 없다는 식이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음을 멈춘 건 당장 그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후공의 협박을 듣고 나서였다.
굳이 그걸 말할 이유가 없어서 없다고 했을 뿐.
“그렇게 아쉽고 슬퍼요.”
물 한 잔에 후공이 떠올라 초류객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을 뿐이었다. 서운하고 슬퍼졌다.
“어험!”
헛기침으로 기분을 환기시킨 초류객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렇게 보였나요?”
“그래 보인다. 넌 필시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이겠지? 어디 무엇인지 들어보자. 기쁨을 함께 나누면 만 배가 된다고 하지 않더냐.”
“두 배가 아니고요?”
“두 배인가? 뭐 아무튼.”
“왜냐면 손…….”
“손?”
연청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멈췄다.
“죄송하지만 비밀이랍니다.”
“아, 너무하네. 말을 하다 말아. 공청석유까지 줘놓고 대체 손은 왜 이야길 못 한단 말이냐!”
연청은 그저 웃기만 했다.
마음으로만 생각을 이어갔다.
‘손광……. 손 오라버니가 오겠지.’
새로운 터전으로 옮길 때면 천하각지로 떠나 있는 귀운종의 후인들에게 전서가 전해진다.
그러면 다들 잊고 있다가도 새 터전으로 돌아왔다.
장소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오니, 그 시기가 가장 많은 이들을 볼 수 있는 때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손광 오라버니는 올 것이다.
아직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함께 떠나게 될지도.
나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가 될지도.
‘그랬으면 좋겠어.’
“청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냐?”
“좋은 꿈을 꾸고 있었어요.”
“잤어?”
“하하하, 저는 금방 금방 잠이 들곤 한답니다.”
저는 요새 자주 꿈을 꾸곤 한답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지.”
“내가 응원하마. 공청석유도 대접받았는데 백번이고 천번이고 응원해야지.”
그래, 꿈은 이루어질 거야.
조만간.
한 달 안에.
굉음이 울렸고, 소리를 따라 시선을 주었을 땐 모옥 한 채가 날아가 흩어지고 있었다.
날아가버린 모옥 안쪽으로 보인 건 두 사람.
칠절선생이었고, 염백이었다.
칠절선생은 여전히 앉아 있고, 찻잔을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염백은 아니었다.
선 채였고, 분노에 찬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걱정되게 해주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칠절선생이 사과했다.
“그럼 꺼져! 당장!”
“그러마. 그렇게 하겠다.”
칠절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표정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기에,
‘야호! 간다. 드디어 가!’
무흔신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어쨌든 대공자님의 명을 수행하게 되었으니 쟁기를 팽개쳤다.
‘대공자님, 보시고 계실까요? 제가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하하하하!’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없는 아우성을 토해내고는 곁에 있는 무연객을 바라봤다.
“무연객님, 이제 가시……. 응?”
바라보다 신투는 갸웃.
무연객이 멍하니 한곳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연객님, 왜 그러십니까?”
“단심객이 오고 있다.”
“아! 돌아오시기로 하셨던 거군요?”
이곳에 있던 건 천하십객 중 팔객.
그중 단심객이 갑자기 안 보여서 따로 볼일이 있어 떠났다가 생각했는데 돌아올 줄이야.
“어딜 다녀오셨……?”
무흔신투는 다시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연객이 신형을 날려 칠절선생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말을 끝까지 듣질 않는 거야. 도둑놈이라고 무시하나? 매번 투명한 사람 취급이니 원.’
그렇게 신투가 내심 불평을 토해내고 있을 때였다.
“신투. 이쪽으로.”
부르며 손짓했기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이고, 부르셨습니까요. 무슨 일…….”
“너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군.”
“네? 아!”
말한 이는 단심객.
신투는 반문했다가 바로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맹에 다녀오셨군요?”
내내 관심 없는 척하더니 확인하고 온 모양이었다.
“하하하, 제가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맹이 텅 비어 있다고요, 아주 박살 나버렸다고요. 하하하하………….”
크게 웃던 신투의 웃음 소리는 급격히 작아졌다가 이내 완전히 소멸되었다.
천하십객.
정확히는 팔객의 표정이 누구 할 것 없이 어두운 것이다.
시간이 흘렀기에 이제 자신은 웃을 수 있다지만,
십객은 처음 맞닥뜨린 진실.
천하십객은 신투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안색으로 서로가 전음을 교환했다.
- 어디로 가야 하지?
- 우선 섬서 안강으로.
- 안강으로 갈 이유가 있을까? 그건 천화서고 대공자의 계획일 뿐이잖은가.
- 맞는 말이군. 그는 우릴 배제하려는 생각이니.
- 그럼 대공자의 행방을 찾는 건?
- 그게 좋겠군.
그 곁에 염백이 서 있었지만 염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여태 천하십객을 여러 차례 봐 왔지만 지금처럼 분위기가 험악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무흔신투가 내내 함께하고 있었으니…….
‘설마…… 그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고?’
환혼대법. 회영부.
천하십객 중 하나인 소향객의 환혼.
무림맹을 비우고 아예 맹 전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에 관한 이야기들.
‘그런 터무니없는…….’
“하늘 아래.”
하나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큰 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곁에서 소곤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도 없는 목소리.
“귀운종과 함께할 수 없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너희를! 귀운종을 멸살할 것이다.”
그 목소리에 천하십객이 반응했다.
염백도 마찬가지.
귀운종의 모두도 마찬가지.
일제히 일으킨 기운에 주변 공기가 출렁거릴 정도였다.
그건 은령존이 던진 미끼.
그 강대한 반향에,
은령존이 위치를 포착했다.
그건 다른 곳도 마찬가지.
후공과 현이도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