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 누군가에겐 악몽.
은령존은 웃을 수 없었다.
어찌 웃을 수 있을 것인가.
방금 꼽추가 자신을 은령존이라 부른 터.
놈의 목적은 애초에 자신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미 알고 찾아왔다는 의미다.
어떻게? 누구를 통해?
자신이 귀운종으로 향한 걸 아는 건 회영십존뿐.
십존 중 누군가가 이미 놈에게 당했다고?
공령존이 당했나? 환비존까지?
누군가 당했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
놈은 풍제와 검선 등을 제거한 것뿐 아니라 회영부를 노리고 있음인가?
회영부만 노리고 있다고 해야겠지.
풍제와 검선 등은 제거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다.
현재 드러난 상황이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꼽추놈은 천하십객과 귀운종까지 기이한 영보(靈寶)를 통해 지키려 했고, 지켜냈으니.
‘설마…… 그런 건가.’
풍제 혹은 검선의 역용?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건 무리인 것이다. 역용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큼 기의 손실이 따라온다. 생사를 오가는 절체절명의 결전에서는 한 방울의 기운도 아쉽다. 그걸 역용을 유지하는 데 소모하는 자가 있을 것인가.
아니, 그보다 전력을 기울이게 되면 역용은 자연히 해제되기도 한다.
한데 그대로.
한데 처음 보는 얼굴.
그런 의문을 후공이 모를까.
“클클, 은령존아!”
은령존이라 부른 건 놈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함.
더 흔들어놓기 위해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구나. 난 상냥하니까 알려주마. 공령존과 환비존은 내 손에 죽었다. 환비존은 뭐 버러지 수준이었고, 공령존 그놈은 개방 방주의 얼굴을 하고 있더군. 응? 뭐야! 너 이 새끼, 안 놀라네?”
“그럼 이건 어떠냐. 마른하늘에 벼락을 치던 뇌신존도 내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클클, 어디 그뿐일까. 주변 일대를 어둠으로 물들이던 흑야존도 죽었다. 흑야존, 그 괴상한 새끼는 밤인데 더 캄캄하게 해놓으면 내가 저를 못 볼 줄 알고 어찌나 기고만장하던지. 클클클.”
이 말에는 결국 은령존의 동공이 흔들렸다.
흑야존이 언급될 때는 어쩔 수 없이 등이 서늘해지고 피가 차갑게 식고 말았다. 흑야존이 어떤 자인가. 자신이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럼 벌써 넷.
회영십존 중 남은 건 여섯.
놈이 누구길래?
궁금해한 건 은령존만이 아니었다.
“대, 대체 누구지?”
“신투, 어떻게 된 거냐? 저 사람은 누구냐?”
“신녀(神女)께선 누구십니까?”
오행기 안에서도 물음이 터져나왔다. 신투에게 묻기도 하고, 빙심마희에게 예를 갖춰 묻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선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는데, 대답은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염후였다.
“그쵸?”
염백이 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말이 옳다.
좋은 사람이다.
아들이 여전히 자신의 품에 안겨 있고 따스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니, 염백은 그보다 더 나은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대화에 은령존이 마음을 다잡았다.
이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오행기 안에서는 바깥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토(土)의 역행으로 오행기 밖에서는 오행기 안의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기에,
‘좋은 사람?’
그래, 그리 여겨라.
그 좋은 사람이 어떤 최후를 맞게 될지 보여주마.
누군지도 알려주마.
놈의 허리를 절단한 뒤, 놈의 상체를 들어 올려 철철 피를 쏟아내는 광경을 보여주마. 그렇게 놈의 눈을 들여다보며 누구인지 들려주마.
환혼대법의 부작용이 시작되었지만, 지금만 놓고 본다면 최상의 상태. 정기신의 결속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꼽추 놈을 처절하게 짓밟고,
귀운종을 섬멸하고,
아들을 안고 있던 놈을 데려간다.
흐흐, 당연히 그 전에 그 아들놈을 아버지 앞에서 죽이는 것도 잊지 않아야겠지.
그건 그저 착각.
같잖은 희망.
후공은 이미 음공의 파훼법을 찾았다.
뚜득, 두드드드득!
교릉을 해제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
카르르르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자주빛 광채가 땅을 뚫고 솟구쳐올랐다.
검령과 번, 쾌였다.
이 시기만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답답했다는 듯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흩어져 하강하며 기다란 자줏빛 광채를 남기면서 주인의 몸을 맴돌았다.
거기에 친이 가세한 건 당연한 일.
“후공!”
“맹주의 신검?”
“어, 어떻게?”
오행기 안에서 팔객의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어찌 그들이 후공의 신검을 몰라보겠는가.
하지만 그런 외침도 잠시,
“청년?”
“천화서고 대공자?”
흉악한 꼽추가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대신 그곳에서는 하얀 피부에 고귀하면서도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보이는 것이다.
“대공자님! 으하하하하!”
무흔신투가 비로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기에 확실해졌다.
십객도 들은 것이다.
도난당한 맹주의 신검을 천화서고 대공자가 찾았노라고.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은령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네놈이 감히…….”
놀라움도 놀라움이지만 분노를 금치 못했다.
대체 몇 번째인가.
농락이 끝이 없다.
악인곡이었다가 귀운종을 구했다가 이젠 천화서고 대공자.
분노에 차 흔들린 파천오종이 가볍게 부딪힌 직후,
‘파천오종의 극, 만파!’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만파가 울려퍼졌다.
기이한 영보는 날아갈 것이다.
환혼을 위해 잡아가야 할 몸도 날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은령존은 그런 자각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뿐.
바람보다 빠르게 만파가 퍼져나갈 땐, 이미 번쾌친과 검령도 움직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번과 검령이 짝을 이뤘다. 나아가다 한순간 서로 부딪혔다.
투콰아아앙!
둔탁한 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졌다. 부딪히면서 자줏빛 광채가 폭죽의 불꽃처럼 찬란하게 하늘을 물들였다.
쾌는 친과 함께였다.
번과 검령이 부딪힌 직후, 쾌와 친이 그 뒤를 이었다.
차아아아아앙!
자줏빛 불꽃이 사방으로 번지듯 물든 건 같았지만 소리는 달랐다. 경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와아, 멋있어!”
“폭죽이야!”
귀운종의 어린아이들은 대낮임에도 자줏빛 불꽃놀이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은령존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명이…… 깨진다.’
음의 조화가 뒤틀리고 있었다.
같은 공명, 음의 조화로 인하여 음의 파장은 겹겹이 쌓여 증폭되면서 멀리 나아가고 가속된다. 더욱 강력해진다.
한데 그 조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과거 어느 시대 사자후를 터뜨려 산악을 먼지처럼 날려버리는 이가 있다고 했고, 그런 자를 만난다 해도 자신이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방식이 다르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마주하여 강력함을 겨루는 대신, 스며들어 교란하며 음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었다.
땅이 뒤집히고 산악이 통째로 날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모옥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영보도 그 안에 있는 모두도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럴 순 없어!’
쩌저어어어어엉!
쩌어어어어어어어엉!
은령존은 전력을 다해 파천오종을 운용했다.
혼파, 극음, 만파!
하지만 그럼에도,
차아아아아아앙!
모든 음파는 자줏빛 불꽃이 터지면서 그 조화가 교란당했고 흐트러졌다.
후공은 허공에 선 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파훼법을 찾은 건 은령존 덕분이었다.
은령존이 알려준 셈이었다.
현이신녀의 빙벽이 원형으로 하늘까지 뒤덮었을 때, 은령존의 음파는 하염없이 증폭된 터. 빙벽에 튕겨 합해지고 또 합해지니 더 강대해졌다. 그 과정에서 몇 번에 걸쳐 음파의 창날에 꽂혔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화극이 일어 삼악을 정비했고, 파훼법을 찾았다.
소리의 중첩에 의해 증폭.
분명 다른 소리지만 어우러지는 음.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우러지는 소리가 아니라면?
간섭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답임은 빙벽이 무너질 때 드러났다. 조화롭지 않은 소리가 났고, 즉시 음공의 파장이 흐트러진 것이다.
이제 기다리면 그만.
음공이 아니라면 은령존의 무위는 십존인 환비존 수준에 불과하다.
거기에 더해 은령존의 내력은 곧 고갈될 터.
“아버지, 너무 멋있어요!”
“아까 제가 그랬죠? 좋은 사람이라고요?”
염백도 모두 동의했다.
자줏빛 붗꽃이 비산하는 모습이, 마치 폭죽놀이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보게 된다 해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저 사람이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그가 후공의 신검을 손에 넣었다고?
‘마치…… 후공이 그를 보낸 것 같구나.’
후공이 귀운종에 선물을 보내오는 것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태평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때쯤 은령존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연신 파천오종을 흔들고 있었지만, 이제 울림은 미미했다.
그저 일반인들에게 극심한 두통을 일으키는 수준.
그런 은령존을 향해 후공이 나아갔다.
허공을 천천히 걸어 나아가는 길.
투콰앙아앙!
마치 주인이 가는 길을 빛내듯 번과 검령이, 쾌와 친이 그 앞쪽에서 연신 부딪히며 찬란한 자줏빛 광채를 퍼뜨렸다. 그건 검령과 번쾌친의 환호성.
우득.
은령존이 이를 깨물었다.
허공을 걸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흑야존의 죽음이 실감 났다. 자신에게도 죽음이 올라탄 느낌이었다.
꽈직!
파천오종을 으스러뜨린 은령존이 신형을 쏘아갔다.
남은 모든 진기를 모두 끌어모아 우수에 담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맞이한 건 신검들.
차아아아아아아앙!
서로 부딪히던 검령과 번쾌친이 주인의 몸을 한차례 선회하며 주인의 천람을 입고 은령존에게 날아갔다.
천람이 쇄도하는 은령존의 장력을 흩어버렸고, 그대로 나아가 은령존의 몸을 관통했다.
너무도 빨랐다.
은령존이 화끈함을 느꼈을 땐 이미 네 줄기 자줏빛 광채는 그를 지나 멀리 날아오르고 있었다.
피가 날 새도 없이 은령존은 아득해졌다.
눈이 흐려져 시야가 흐릿하게 보였다가 선명해졌다. 질끈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눈앞에 천화서고 대공자.
머리는 더욱 아득해졌다.
희미해졌다, 선명해졌다. 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순간 암전. 내가 눈을 감았나? 눈을 뜨자. 그래도 어둠.
눈을 감았다 뜨자.
그렇게 눈을 감았을 때,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눈을 뜨며 은령존은 멍하니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고,
자신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보게.”
후공이 말이 없으니,
“여긴…… 어딘가? 내가 누구인가?”
환혼의 부작용.
기억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
정기신이 분리되며 자신의 존재를 잊은 은령존이 물었다.
“나는 누구야? 내가 누구냐고! 당장 말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악의가 면책될 순 없다.
크르르르르릉.
카르르르르르르릉.
검령과 번쾌친이 답했다.
자줏빛 광채가 폭사하며 은령존을 먼지처럼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