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후공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은령존은 수만 조각으로 흩날렸다.
그래서 분명 죽음이었는데 죽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잘게 잘라놓은 종잇장 뭉치를 손에 쥐고 있다가 한순간 허공에 뿌린 것만 같은 광경이니.
그조차도 이내 소멸되어 갔다.
거기에 슬픔이 깃들었다. 눈물이 감돌았다.
후공은 깊은 허전함과 상실감을 느꼈다.
‘묘하군.’
연민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건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터.
그래서 묘했다.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 외부.
소멸되는 은령존의 부근, 주변.
흩날리는 은령존을 향해 슬픔이 찾아왔다.
아주 먼 곳에서 온 슬픔이요, 상실감이었다.
이는 누군가 은령존의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봐야 했다. 존재와 존재가 긴밀히 연결된 자다.
그는 어떤 이치로 알아차렸음인가?
나는 어떻게 그 슬픔을 알 수 있는 건가?
그건 후공로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후공은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회영사존.’
이내 후공은 손을 뻗었다.
한데 묶인 금색 방울, 은색 방울이 손으로 빨려들었다. 은령존의 손에 납작해진 종을 잠시 바라봤다. 군데 군데 금이 갔고, 떨어져나간 부분도 있었다.
사용하는 건 무리.
애초에 음산함이 가득하기도 하다.
기물(奇物)이면서 동시에 귀물(鬼物).
어느 정도인가?
천람으로 귀기를 쓸어갔다. 단번에 귀기를 떨쳐내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화극을 일으켰다. 세상에 남겨둘 이유가 없다.
화르르.
푸른 불길이 치솟으면서 방울은 쇳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때 오행기가 스러져갔다.
후공의 신형은 흔들.
오행기 안쪽의 면면이 흐릿하게 드러났을 때, 이미 후공은 그 앞에 있었다.
오행기가 온전히 거둬진 후,
모두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의 말이 쏟아지듯 뒤따랐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누가 온다 해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자신 곁의 소중한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목소리마다 격정이 묻어났다.
귀운종만이 아니었다. 천하십객도 마찬가지.
칠절선생조차 천화서고 대공자가 살렸다. 대공자가 영단을 삼키게 했다는 이야기를 칠절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기에, 어떤 감사의 말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후공의 시선은 팔객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다.
칠절선생, 무연객, 단심객, 능소화…….
다시 보니 반가웠고, 한편으로 실망스럽기도 했다.
“다들 몸은 어떠십니까?”
“우린 괜찮네.”
“대공자, 모두 자네 덕분이네.”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이곳에선 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대공자니이이이임!”
무흔신투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후공은 손을 뻗어 반겼다. 신투의 얼굴을 손으로 막은 다음 옆으로 치웠다.
무흔신투는 잘못이 없다.
오행기를 적절히 사용하기도 했고.
그때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있잖아요.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열 살 남짓의 어린 사내 아이.
“거짓말도 잘하네. 염후, 너 아까 엄청 떨었잖아.”
“맞아. 나도 봤어. 하지만 난 진짜야. 못생긴 얼굴 때부터 알아봤어.”
“나도 나도!”
여러 아이들이 다가와 있었다.
후공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시 그 모습이어도?”
“당연하죠!”
“하나도 안 무서워!”
“아주 호감이랄까!”
다시 얼굴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후공은 아이들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웃게 될지, 겁먹고 주춤할지.
웃게 되겠지?
“그럼 다시 보여주마. 너흰 아마 놀라 까무라치겠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얼굴에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강아지야!”
“하하, 여우가 됐잖아! 하하하하!”
“하하하, 너무 웃겨. 여우라고 써 놓은 것 좀 봐! 하하하하하하!”
여우 가면을 보고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가면 속에서 후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 웃음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런……. 왜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거지?”
오늘 일어난 일 중에서 여우 가면만 기억하길 바랐다. 언제라도 오늘을 떠올리면 기분 좋게 웃었던 날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거기에 색관조와 금섬이 동조했다.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까르르르르르! 여우만 있는 게 아니야. 여기 새와 두꺼비도 있는데!]
[그윽, 그윽, 극극!]
“우와아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와아, 들었어? 새가 말을 했어!”
“하하, 금두꺼비 너무 귀여워!”
아이들은 다시금 깔깔거렸다.
후공은 한동안 웃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웃음일 뿐인데 온기가 느껴지고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내 따로 자리를 가졌다.
천하팔객이 함께했고, 무흔신투가 합석했다.
귀운종에서는 세 사람. 염백, 관담, 백위천이 자리했다.
“대공자!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어요.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더니, 그 말대로군요.”
소문은 지나칠 정도로 축소 되었다.
대체 어떤 얼간이가 대공자를 화경의 고수라고 한 것인가. 직접 보니 말도 안되는 소문이었다.
그런 능소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악인곡주가 된 것도 놀랍고, 맹주의 신검을 다루는 것도 놀라움을 더한다. 또한 상황을 타개함에 얽매임이 없고 신출귀몰하기까지 하니, 소문이 얼마나 축소된 것인지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물었다.
현 상황에 대해, 회영부에 대해, 환혼에 대해.
후공은 간략히 정리해 답했다.
핵심적인 내용만 담았음에도 다들 놀라워했다.
소림에서의 격전.
환혼의 시연.
그리고 회영십존.
소향객이 환혼을 다시금 들으면서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함께 대항하는 이들의 면면을 알게 되면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겠나?”
물은 건 단심객이었다.
단심객 뿐 아니라 모두가 눈동자마다 돕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어허, 자네 대답이 너무 빠르군.”
“정 걸리적거리고 싶다면 함께해도 좋습니다.”
그 말에는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프기도 했다. 진실은 아픈 법이니.
오행기 덕분에 겨우 살아났을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안강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분간 무림맹은 안강입니다.”
모두가 침묵으로 수긍했다.
물론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공자, 우리 귀운종도 다시 옮겨야겠군요.”
입을 연 건 염백이었다.
후공은 염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어릴 때의 염백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는 울부짖고 있었다.
유령곡의 이령과 같았다.
죽여!
나도 죽여!
죽이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 날이 올 테니!
눈물 범벅으로 그렇게 외쳤었다.
어떤 아이들은 귀운종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패배가 확실시 되면서 부모의 손에 먼저 죽음을 맞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 중 하나가 염백.
아버지는 귀운종 삼대 호법 중 하나.
이름은 염추선.
이름보다는 별호로 더 많이 불렸던 남자.
하지만 염백은 이령과 달랐다.
이령보다 더 높은 성취가 기대되는 아이였고, 지금보다도 앞으로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이지만, 다르다.
“자제분이 귀엽더군요.”
“제 아들을 알아보셨습니까?”
갑작스런 언급에 염백이 너털거렸다.
“아버지를 많이 닮아 뒤늦게 눈치챘습니다.”
뒤늦게는 아니다.
아들은 염후.
후공은 염백은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염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 눈앞에서 울부짖던 염백의 모습과 염후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아주 멀리 동쪽으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멀리 동쪽이라면 안휘…… 천화서고 부근이 되겠군요.”
“그 부근이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백이 고개를 끄덕였고, 관담과 백위천도 동의를 표했다.
‘이렇게 되는구나.’
후공은 기분이 묘해졌다.
천화서고 부근을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멀리 동쪽이면 그만이었다.
한데 염백이 천화서고 부근에 있길 원하니 운명의 기묘함을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맹주일 때는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고,
찾을 생각조차 없던 귀운종이 자석처럼 끌려온 것만 같은 것이다.
“대공자, 이번 일이 지나고 어느 때인가는…… 강호를 함께 걷고 맛좋은 요리를 찾아 이곳저곳 함께 다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후후, 그거 좋군요.”
후공은 웃어 보였다.
나쁘지 않다. 좋은 일이다.
후공은 그 날이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에 한 사람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내내 업혀 있다가 지금은 한쪽에 눕혀진 칠절선생이었다.
‘염백 너……. 내가 말했을 때는 그렇게 성질을 내더니…….’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그 후 귀운종은 바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해가 저물어갈 땐 모두가 그곳을 떠났다.
누군가는 다시금 안도했고,
누군가는 슬픔에 잠겼다.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연청이었다.
이젠 전서를 보내도 돌아오지 않을 손광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연청의 손을 현이신녀가 잡아주었다.
말없이, 따뜻하게.
북해빙궁의 절세고수의 손은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어둑해지면서 귀운종과는 작별을 고했다.
채 하루도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귀운종은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한 것처럼 아쉬워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귀운종이 먼저 멀어져 갔다.
귀운종은 밤새 달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곧 숙소를 잡아야 한다.
그렇게 남겨졌을 때, 우드드드드드득!
후공은 악인곡주가 되었다.
흉악스런 화공신타가 되어 천하팔객을 바라봤다.
“대공자, 우리와 좀 더 가려는 것 아니었나?”
초류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가 대공자냐?”
“하하, 실수했네. 미안하군, 악인곡주.”
음산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저기…… 왜 그러나?”
초류객 뿐만 아니라 초류객의 등에 업힌 칠절선생도 고개를 갸웃했다. 모습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적의가 느껴지는 것이다.
제대로 보았다.
적의.
초류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속절없이 끌려온 초류객이 목이 졸려 괴로워했다.
“대……공자. 이게 무슨…….”
“대, 대공자, 정신 차리게!”
“왜 이러는 건가!”
대답은 손이 대신했다.
그대로 초류객을 던져버렸다. 날아가 처박히니 업힌 칠전선생도 나뒹굴었다. 이어 무연객의 향해 발을 날렸고, 진정하라며 달려드는 단심객의 금나수를 무력화시키고 목을 움켜쥐었다.
“대, 대체 왜……?”
철담객과 옥면자, 환우자가 당혹을 금치 못하고 주춤 물러났다.
왜? 진작에 하려고 했던 일을 하고 있을 뿐.
“그걸 몰라서 물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왜 무흔신투의 말을 듣지 않았지?”
“그, 그야 말이 너무 황당하니…….”
“후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야…… 존경하고 있네.”
“신투가 후공의 비둘기였는데도 황당해?”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비로소 대공자가 추궁하는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일찍 확인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귀운종을 재촉해 멀리 동쪽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대공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있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후공이었어도 화를 냈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했네.”
“맘껏 때려주게. 얼마든지 맞겠네.”
후공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졌기에 다들 받아들였다.
마음껏. 그 말이 씨가 되었다.
모두가 일각이나 맞았고, 결국은 축 늘어져 그만 때리라고 빌어야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호오오~~~ 호호호호호호호호!”
“하하하하, 꼴 좋다!”
빙심마희와 무흔신투까지 가세했다.
얼마나 맞았을까.
팔객 모두가 널브러져 밤하늘을 바라볼 때, 들려왔다.
- 너흰 귀운종을 호위해라.
왜일까.
이 말은 팔객에게 다르게 들렸다.
분명 화공신타의 전음인데,
왜 후공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
‘너무 맞아서겠지?’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