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그건 지옥에 가서 들어.
‘탄외존.’
찾아온 건 회영사존 탄외존.
후공이 본 건 아니다.
그저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 반양장을 덮친 기운 때문이었다.
회영사존은 탄외(呑畏).
공포를 삼키는 자.
혹은 허무존이라 불린다.
회영십존에 대해서는 이미 태언장을 멸절하면서 모든 정보를 얻었고, 그 후로도 정보는 더해지고 보강되어 세밀해진 터.
탄외존은,
내공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에겐 공포.
내공을 연마한 이들에겐 짙은 허무함을 선사하는 자. 스스로 삶을 끝내게 한다.
그래서 바로 알아차렸다.
이유도 없이 마음에 헛헛함이 찾아오면 알게 된다. 탄외존이 왔노라고.
놀라운 공능이 아닐 수 없다.
결코 흩트러지지 않는 명정한 마음을 뚫고 일어난 변화였기에 후공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운으로 형체를 파괴하는 건 어렵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기운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 풍제의 섭혼도 기예라 부를 만하지만 한계가 있다. 현경의 중에 이른 자는 섭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파의 정종심법을 깊이 연마한 이도 영향 밖.
마음이 무너졌을 때라야 파고들 수 있다.
한데 탄외존은 어처구니없다. 옷이 물에 스며들어 젖어가듯 그저 파고들어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같다.
이미 준비는 되어 있다.
후공은 검결지를 맺은 손을 들어 허공을 두드렸다.
‘화극삼주, 만화(滿火).’
붉은 빛이 엄청난 속도로 번져나가며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헛헛함이 삽시간에 날아간다. 활기가 차오른다.
“짜증 나! 신경질 나!”
“배가 고파! 난 쇠라도 먹어야겠다!”
악인곡의 악인들도 같았다.
짙은 허무감이 날아가는 동시에 삶의 열정으로 가득 찼다. 생을 갈구하고 유쾌해졌다.
‘이 정도면 되었고……. 확인해 보자.’
이제 확인할 차례.
탄외존이 혼자 온 것인지, 여럿인데 먼저 도착한 것인지.
후공은 검령과 번쾌친을 향해 의식을 전했다.
‘더 멀리, 적의 후방으로.’
검령과 번쾌친이 선회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땅 속에 머물며 적을 탐지하고 있던 검령과 번쾌친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가 땅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소리없이 탄외존을 지나 멀리 나아갔다.
없다. 없다!
하지만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 풍제, 확인. 다른 방향.
전음에 풍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의 뜻을 모를까.
하나이냐 여럿이냐에 따라 대응은 다르다. 그러니 추가 인원을 확인한다.
대형이 이미 탄외존 쪽을 살피고 있는 듯하니, 탄외존 쪽의 염혼은 거둬들였다. 반면 동쪽과 서쪽, 남쪽의 염혼은 더 멀리 보냈다. 염혼의 형체는 흐릿했다. 마치 검은 연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에선 색관조가 날았다.
혹시 시안조가 있는지 살폈다.
노란 눈동자 혹은 하얀 눈동자를 찾았다.
그때 탄외존은 멈춰 있었다.
그의 눈빛은 무심했지만,
‘사라……졌다.’
마음은 이미 내려앉았다.
붉은빛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파공(波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반양장에서 들려온 목소리도 충격.
더할 나위 없이 활기찬 목소리였다.
마음에 침잠이 일어나면 현경의 고수라도 화경 급으로 전락한다. 싸울 의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의지가 불러오는 힘은 크다. 그런 의지가 사라진다면,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이긴다 한들 어떠하고, 패배한들 어떠한가.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한데 어떤 영향도 없다. 도리어 흥겹게 느껴질 지경.
그러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걸음 너머, 눈앞에 보이는 붉은빛 앞이었다.
이건 무엇인가?
어떤 공능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마음도 외쳐댔다.
‘죽는다. 도망쳐. 지금 즉시 도망쳐!’
그 외침을 듣는 순간 탄외존은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공포를 선사하는 자.
한데 지금은 자신이 공포에 질려 외쳐대고 있으니 그 역설에 어이가 없어서였다.
한 걸음 내디뎌 붉은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빛에 닿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빛이 스며들듯 번져왔다. 손목으로, 팔로, 어깨를 타고 목으로. 그러다 완전히 빛에 잠식당했다.
이제 그의 미소는 짙어졌다.
눈도 웃었다.
그것도 잠시, 진심으로 유쾌해져 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탄외존은 파공의 공능을 끌어올렸다. 썰물처럼 붉은빛이 빠져나갔다.
자신의 공능과는 상반된 공능.
하지만 마음을 뒤흔다든 점에선 동류.
‘단혼각이었다고?’
자연스럽게 단혼각이 떠올랐다.
회영부와 단혼각은 애초에 하나.
단혼각주는 지존의 유일한 제자.
불세출의 천재.
스승을 배신한 제자는 환혼을 멸절하려 노력해 왔다. 환혼을 이어가려는 자와 환혼을 끊으려는 자의 격돌. 그 기간이 무려 천년에 달한다. 그렇게 들었다. 그러니 회영부와 단혼각의 요체와 묘리는 같다.
‘도망쳐!’
다시금 마음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악인곡의 실체가 단혼각이라면 살아날 수 없다.
심장도 떨려왔다.
그럼에도 탄외존은 움직이지 않았다.
은령존. 아우가 죽었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으니 죽었을 것이다.
그런 아우에 대해 물어야 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늦었다.
이미 지척.
붉은빛이 삼키듯 몸을 덮쳐왔다.
파공을 극한으로 운용하여 붉은빛을 떨쳐냈다. 그건 고작 부근의 영역뿐. 채 일 장도 되지 않는 범위만이 붉은빛에서 벗어났다.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클, 탄외존!”
“너 왜 혼자 왔냐?”
“동맹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고?”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탄외존은 일곱 인영에 둥그렇게 포위 되었다. 탄외존이 한 사람 한 사람 둘러봤다. 남자는 다섯, 여인이 둘. 모두가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외모.
그중 가장 흉악한 모습의 꼽추에게 시선을 던졌다.
“네가 화공신타겠군.”
“맞아.”
“물어보자.”
“틀려!”
탄외존이 미간을 찡그렸을 때, 들려왔다.
“클클, 너부터 답한다.”
“혼자 온 이유가 뭐냐?”
“확인을 위해서.”
“뭘?”
“은령존.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겠지?”
“관심 없다. 동맹 제안은?”
“논의 중이다.”
“늦어! 이 답답한 새끼들아! 함께하면 좋은 걸 몰라? 앙?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사냐!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 아냐고!”
며칠?
열흘이 넘었다.
아우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시간은 중요치 않다.
탄외존은 그리 생각했다.
놈의 질문에서 의미를 찾는 건 무리.
어떤 진지함도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이제 자신이 물을 차례였다.
“너희는 단혼각인가?”
“아냐! 악인곡. 그리고 나는 악인곡주다. 기억해.”
“은령존은? 은령존은 누가 죽였지? 알고 있나?”
“알고 있다.”
“……!”
그 말에는 탄외존이 어쩔 수 없이 동요했다.
“알고 있다고?”
“죽었다. 네 짐작대로.”
“누구의 짓이냐?”
탄외존의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격렬함에 부근의 붉은 빛이 잠시 밀려날 정도.
“그놈이 죽였다.”
“노, 놈이 살아 있었다고?”
“그래. 아직 안 죽었더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잊어버려. 사람 하나 죽는 게 뭔 대수냐.”
잊어? 어떻게?
분노에 찬 탄외존의 눈이 이글거린 것도 잠시, 그의 눈에서 청록색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신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그 외침에 땅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화공신타는 머리를 기괴하게 틀며 웃을 뿐.
“왜? 네 아우가 죽었다니 슬프냐? 너도 많이 죽였을 텐데? 넌 이유 없이 사람을 자결시키는 자니까. 넌 죽여도 되고,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거냐?”
그 말에는 탄외존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굳었다.
머리를 한 대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방금 말은 결코 악인이 할 말이 아닌 것이다.
“너는 누구냐?”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디에 있지?”
“여기.”
탄외존이 주변을 둘러볼 때는 이미 공세가 펼쳐졌다.
슈슈슉!
폭발하듯 당명의 암기가 탄외존에게 쇄도했고, 검선과 검존의 검이 땅을 뚫고 튀어올랐다.
탄외존이 급히 신형을 솟구쳐 올렸을 땐, 그곳엔 이미 염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히죽 웃는 염혼과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격중.
콰아앙!
염혼의 주먹이 탄외존의 얼굴을 직격했다.
호신강기에 의해 머리가 날아가진 않았지만 충격에 의해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방금 저건……?’
그 형태가 마교 교주의 독문 무공과 흡사해 보였다.
생각을 이어가긴 힘들었다.
다시 비검이 날아들고, 암기가 폭사해 온 터.
튕기듯 신형을 휘돌아 빗겨낸 후 장력을 퍼부었다.
대상은 어린 소녀.
쇠사슬처럼 굵은 연격의 장력은,
갑작스레 나타난 얼음벽에 막혀 튕겨 나왔다.
‘빙공? 북해빙궁?’
악인곡이 아니다. 결코 악인곡이 아니다.
한 호흡에 기운을 회복하려 할 때, 폐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동시에 전신이 얼어붙는 감각. 피가 얼어붙는다.
또 다른 여인이 귀신처럼 스쳐 지나간 후였고, 신형이 급속도로 느려졌다. 진기를 일주시켜 한기를 몰아내려 할 때는 다시 비검이 날아들었다.
선홍빛의 매화.
비검이 짓쳐 드는 그 뒤로 뿌려지는 빛깔은 마치 수백 송이의 매화가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기에,
‘화산파. 검선?’
매화를 벗어난 순간, 가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호신강기에 반탄되면서 음과 양으로 교차하는 태극의 문양이 선명히 피어났다가 스러져갔다.
‘무당파!’
그럼 검존이다.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
‘놈들이었구나!’
이쯤이면 모르기가 더 힘들다.
마교 교주의 독문 무공.
비산하며 모든 걸 찢을 듯한 수많은 암기.
매화와 태극. 그리고 빙공.
너무 감쪽같아서,
실로 악인처럼 보였는데 어찌…….
상념은 잠시 끊어졌다.
매화가 날아들며 오른팔이 끊어져 나가면 어쩔 수 없었다.
이어 왼팔.
양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내며 결국 탄외존은 비틀거렸다. 진기는 진탕되어 호신강기는 더 이상 운용할 수 없는 상태.
그런 탄외존의 머리를 염혼의 손이 덮쳤다.
콰악!
머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탄외존이 두 발을 버둥거렸다.
“클클클…….”
“그러게. 누가 혼자 오랬냐.”
그런 탄외존 앞으로 악인곡이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탄외존이 눈에 담았다.
눈이 흐릿해져 가는 탓에 뿌옇게 보였다가 한 번씩 선명하게 보이는 가운데, 그의 시선은 화공신타를 향했다.
다른 이들은 이제 누구인지 안다.
풍제, 암향야, 검선, 검존, 그리고 북해빙궁의 두 고수.
하지만 한 사람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화공신타.
화공신타가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의미였다.
탄외존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흐흐흐……. 너로군. 너였어. 천화서고 대공자.”
숨을 몰아쉰 후 말을 이었다.
“답을…… 듣고 싶다. 내 아우, 은령존은 어떻게…….”
꽈아아아악!
탄외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염혼의 손가락이 머리를 파고든 것이다.
‘무, 무서워…….’
공포를 선사하는 이.
그런 탄외존이 처음으로 극한 공포를 느꼈을 때는,
[그건 지옥에 가서 들어.]
염혼의 비웃음과 함께,
퍼석.
머리가 터져 나갔다.
미녀도의 남은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