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제가 가져왔습니다!
섬서 안강.
어둠에 잠긴 뜨락을 제갈혜가 천천히 거닐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였다. 잠들 수 없어서였다.
“언니.”
돌아보니, 천산의 후인인 설영이었다.
제갈혜는 미소로 반겼다.
“어서 와.”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 생각도.”
“그 얼굴로요?”
설영이 고개를 가까이 들이미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제갈혜는 그만 웃고 말았다.
“눈치가 보통이 아닌걸.”
“에헴~.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 편이긴 해요.”
설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다. 지금도 눈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하지만 제갈 언니의 표정은 눈치가 필요 없었다.
누가 봐도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고, 요며칠은 더 심해진 터.
“언니, 좋은 말로 할 때 이야기해 봐요.”
“협박은 무섭지만, 미안.”
“그럼 제가 맞춰 볼까요?”
“결사 반대.”
“너무해.”
설영이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기에 제갈혜는 다시 웃었다.
그 모습에 설영도 웃었다.
언니를 웃게 하고 싶었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유는 짐작된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자신도 걱정하고 있으니.
천공단주.
언니가 옳아.
누군가 그랬다.
걱정은 말로 꺼내는 순간, 현실이 된다고.
그러니 가만히 곁을 걷자.
‘맞아.’
더 이상 묻지 않는 설영에게 제갈혜가 마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고마워.’
그저 곁에 있어줘서. 함께 걸어줘서.
“사형, 난 알지.”
“거지야, 그걸 누가 몰라.”
“누나가 형아를 좋아하는 거?”
지붕 위에서 소천개와 은앙개가 소곤거렸다.
“천하가 다 알지.”
“그럼 말해도 되는 거잖아?”
“그렇네?”
“하하, 멍청한 사형.”
따라 웃으며 은앙개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갈 군사는 천공단주를 좋아한대요~~.”
제갈혜가 미소 지었다.
백부가 보고 싶었다.
풍 백부도, 당 숙부도.
“누가 야밤에 시끄럽게 떠드냐!”
“자꾸 이런 식이면 우리도 떠든다?”
항마삼협은 물어놓고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바로 떠들었다.
“나도 천공단주를 좋아하지!”
“형님이 좋다! 보고 싶구만!”
“너무 걱정되지 않아! 적들이 걱정된다고! 형님 손에 모조리 죽어나갈 테지. 불쌍한 새끼들!”
그러면서 깔깔대며 웃었다.
그 뒤를 이어 천공단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이번에도 제갈혜는 동의했다.
백부는 건재할 것이다.
누구와 맞서더라도.
어떤 사람과 마주해도.
그럼에도 걱정은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그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것이다.
미녀도. 그 안의 미녀.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갈혜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을 헤아렸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들아 지켜줘.
그 밤,
반양장은 다시금 그물이 되었다.
그물 외곽에는 염혼과 신검들이 감시.
그물에 가까워지면 알게 된다.
그물에 들어오길 기다린다.
그물에 들어오면 죽인다.
빨아들인 후, 섬멸.
스스로 표적이 되는 건 훌륭한 타개책이다.
먹잇감이 되어 기다리면 알아서 달려들게 되어 있다.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잠시 전략을 바꿔야 할 때.
후공은 악인곡을 불러모았다.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 한 사람을 바라봤다.
천화서고 대공자. 천공단주. 악인곡주. 화공신타.
여러 칭호.
무엇이라 부른다 해도 어울린다.
고작 이십 대 초반의 나이.
고작 애송이.
오란다고 갈 것인가.
모이라 한다고 순순히 따를 것인가.
원래라면 그럴 수 없다.
연배가 그렇고, 명성이 그렇다.
누구 한 사람 드높은 명성이 아닌 자가 없다.
그럼에도 순순히 모였고, 입이 열리길 가만히 기다렸다.
대공자가 악인곡주가 된 건 그저 연극.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서열이 느껴진다.
서열을 따로 구분한 적도 없었다.
한데 이상하다. 자연스럽게 대공자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어울렸다. 다른 누군가가 우두머리가 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말이 나오길 기다릴 뿐.
기다리다 먼저 지친 건 화산의 검선이었다.
“신타, 언제 말할 거냐! 아주 속 터져 죽겠다.”
분명 풍제 아니면 암향야가 먼저 인내심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검선은 괜히 진 것 같아 씩씩거렸고, 그런 검선을 검존이 거들었다.
“꼽추새끼야, 말을 하라고!”
이어진 채근에 후공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잠깐 잤어.”
“미친 새끼냐!”
“답도 없는 새끼였네!”
“호오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
현음신녀까지 궁시렁거렸지만 현이신녀는 웃었다.
대공자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어 그냥 말하는 것만 듣고 있어도 재밌는 것이다.
“이틀 뒤 잠시 반양장을 떠난다.”
“뭔 소리야?”
“이제 겁나?”
검선과 검존, 현음신녀가 발작하듯 물었다.
풍제와 당명만은 고요했다.
둘은 이유를 아는 것이다.
‘미녀도의 남은 날은…….’
‘사흘.’
대형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대형도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미녀도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이 되었을 때, 그 와중 회영십존이 찾아오게 되면 곤란해진다.
굳이 곤란한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틀 뒤였다.
잠시 이곳을 떠나 미녀도를 맞이한 다음, 다시 반양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현명했다.
“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구?”
“이 와중에?”
후공은 품에서 미녀도를 꺼냈다.
촤르륵.
두루마리를 펼쳐 내밀었다.
“절세미녀.”
검선이 받아들었고, 다들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흐르는 개울가.
아름다운 여인이 개울물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그림 속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현실의 구름처럼 느껴졌다.
“설마 이 여자?”
“뭔 개소리야!”
“곡주, 심심해 죽겠으면 잠이나 자는 게 낫지 않아?”
현이도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거창하게 불러모아 놓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무, 무슨 그런…….”
“이 여인이 말, 말을 걸어왔다고?”
설명을 들은 후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공자, 여기 적혀 있는 숫자가 바뀐단 말인가? 자네 눈에는 이 숫자가 다르게 보이고?”
심지어 검존은 잠시 악인곡인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에 후공도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 대답에 모두가 멍해졌다.
화공신타의 모습이 될 때면 대공자는 철저히 신타가 되어 말했다. 마치 철칙처럼. 그렇게 철두철미한 대공자가 지금은 대공자가 되어 진지하게 답하니 더 이상 농담으로 여길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말한 이가 대공자.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검선이 시선을 돌렸다.
“풍제, 암향야. 두 사람은 알고 있었던 거요?”
이런 상황에 아무런 동요가 없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풍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당명은 찡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알고 있으면 진작 좀 이야길 해줄 것이지.”
“우리라고 못 볼까? 어디 우리도 미녀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그래요.”
검존의 말에 현음까지 가세했다.
그렇게 모두가 미녀도를 들여다봤다.
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아무리 바라봐도.
- 거참, 기괴한 일이야. 안 그래?
- 검선, 다시 말 편하게 하는 거요?
- 독응마군, 정신 안 차리냐!
검존이 시무룩해졌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다.
아까만 해도 악인곡이 아니었는데, 이젠 또 악인곡이라니. 그리고 지금은 전음 중인데 말이다.
검존이 머리를 긁적이곤 전음을 발했다.
- 그럼 사흘 뒤에 미녀가 튀어나온다는 거지?
-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겠지.
- 뭔가 굉장하네.
- 굉장히 셀 것 같기도.
- 무섭네. 회영부를 쓸기도 전에 쓸려나갈 판이로군.
그림 속에서 말을 걸어온 여인.
대공자는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경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사흘 후면 그런 여인을 맞이하게 된다니.
‘말도 안 돼.’
검선과 검존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있다는 것이 우스웠고, 실제로 나타날 것이 걱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한 것이 대공자가 아니었다면 코웃음쳤을 것이다.
풍제와 암향야가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면 끝까지 헛소리라 여겼을 것이다.
- 한데 그 둘은 뭔데 철석같이 믿지? 원래 그런 놈들 아니잖아?
- 그러게. 신타의 말이라면 팥을 콩이라고 해도 믿을 기세이니.
뒤숭숭한 밤이었다.
현이와 현음도 미녀도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 사저, 어떻게 생각해요?
- 사실이겠지. 대공자가 말했으니.
현이신녀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공자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 그 미녀가…… 악인곡에 동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악인곡에 어울리긴 해.
- 그렇죠? 음침하고 서늘하고.
- 흠, 그럼 진짜 악인인데…….
뒤숭숭한 밤.
갑자기 걱정이 많아진 밤.
하지만 진작부터 걱정하고 있던 풍제와 당명의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당명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지도 않고 방 안을 서성거렸기에 풍제가 진정시켰다.
- 정신 사납구나.
- 저는 진정이 안 됩니다. 형님, 정말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또 그 이야기로군.
풍제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당명은 미녀도를 없애버리고 싶어 했다.
그럼 걱정도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제가 미녀도를 훔쳐오겠습니다.
-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다.
- 젠장.
풍제의 칭찬에 당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대형이다.
형님의 말은 대형의 손에서 무슨 수로 훔쳐올 수 있냐는 뜻인 것이다.
처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 그래도 이렇게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흘입니다. 사흘.
- 그럼 시도해봐라.
- 네!
당명이 성큼 방을 나서는 모습에 풍제가 혀를 찼다.
‘쯧쯧, 불쌍한 놈. 어떻게 된 게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질 못하는 건지.’
천하제일인의 품에 있는 걸 무슨 수로 훔친단 말인가.
삼대 대도 중 으뜸이라는 무흔신투가 대형의 비둘기거늘.
‘죽어나겠군.’
풍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너, 너 누구냐?
당명이 멀쩡히 돌아온 것 때문은 아니었다.
당명의 손에 미녀도가 들려 있으면 풍제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 흐흐, 귀신 아닙니다. 제가 가져왔습니다!
- 어째서 안 죽고?
- 아니, 말씀을 하셔도…….
- 어떻게 된 거냐?
- 그냥 주시던데요?
- 그래?
풍제는 더욱 갸웃.
대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형도 없애길 원했던 걸까?’
당명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미녀도를 없앤다. 분명 대형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을 것이다. 많이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낫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미녀도를 태워버렸다.
불길이 미녀도를 휘감는 모습에 당명이 흐뭇하게 웃다가,
이내 얼굴이 딱딱해졌다.
불이 휘감았지만, 미녀도는 불타지 않는 것이다. 연기조차 없었다.
이내 삼매진화를 거두고 내력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잡고 갈기갈기 찢어버릴 참이었다.
눈동자만 커졌다.
‘무, 무슨……. 찢어지지 않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현경의 고수가 찢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 넌 막상 찢으려니 겁이 나나 보구나.
- 그게 아니라.
- 그럼?
이내 풍제가 시도했다.
풍제는 대형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시작은 조심해서 다뤘다.
처음은 약간의 힘.
그러다 조금 더 큰 힘.
이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작은 흠집조차 낼 수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미녀도 속 미녀의 미소가 비웃음으로 보였고, 두려워지기도 했다.
‘기물(奇物)!’
그때 전음이 들려왔다.
-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가져와라.
대형의 전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