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미녀도 발현.
석양 아래,
거대한 독수리가 날았다.
붉게 물든 노을에 독수리의 깃털은 검붉게 물들었다.
독수리의 등 위에는 세 사람.
한 사람은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서 있었다.
누구도 흔들림은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탓에 거센 바람이 밀려듦에도 그들의 모습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카락은 날리지 않았고, 옷자락도 펄럭임이 없이 차분했다.
“탄외존은 여전히 떠돌고 있음인가?”
칠흑 같은 흑발의 중년인의 모습.
눈동자가 기이했다. 말을 시작할 때와 달리 마칠 때는 그의 두 눈은 흰자위가 모두 사라지고 온통 검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에 곁에 선 회영육존 쇄후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어쩌면 탄외존은 반양장을 찾은 걸지도.
은령존의 실종이 악인곡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었을 것이다.
쇄후존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반양장의 하늘 위에서 화공신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떠올리면 들리는 듯했다. 화공신타의 음산한 목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어른거린다. 지면에서 올려다보던 끔찍한 눈빛도 잊을 수 없었다.
그 눈빛이 실로 기이했다.
모든 걸 관통하는 눈빛이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죽음이 확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눈빛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만약 탄외존이 홀로 찾아갔다면…….’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곁의 중년인은 회영삼존.
제금존의 눈이 온통 검게 물들 때는 되도록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는 것이다.
회영십존이 서로 간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해도 서열은 명확한 터. 지닌바 힘이 곧 서열이며 그중에서도 일존과 이존, 삼존은 특별한 것이다.
그럼에도,
‘감당할 수 있을까?’
이존과 삼존이 악인곡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화공신타! 그 꼽추를 상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쇄후존, 두려워 마라.”
어느덧 석양이 어둠에 삼켜진 하늘.
눈을 감고 고요히 좌정하고 있는 명정존이었다.
쇄후존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을 때, 명정존이 눈을 반개했다. 청명한 기운이 새어나왔고, 온전히 눈을 떴을 때는 각각의 눈동자 테두리에 여덟 개의 푸른 보석이 빛을 내며 흐르듯 천천히 회전했다.
“후후, 대답이 마음에 드는군.”
명정존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정기 어린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고 멀리까지 날아갔다. 눈동자에 박힌 푸른 보석이 강렬한 빛을 냈다가 빛을 거두었다 하면서 번쩍였다.
마치 거리를 가늠하듯, 시간을 가늠하듯.
이내 명정존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도착은 새벽. 제금존, 서두르는 것이 좋겠군.”
“바라던 바.”
고개를 끄덕인 즉시, 제금존이 훌쩍 뛰어내렸다.
구름층에 파묻혔다가 구름을 뚫고 나왔다.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였고 지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나아갔다.
작게 보이던 산이 점점 커졌고, 좁쌀만 하던 산자락의 가옥도 빠르게 커져 갔다.
어느샌가 땅은 지척.
그럼에도 제금존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지면이 가까워질수록 더 빨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을 뚫고 들어갔다.
거대한 충돌의 여파와 굉음에 산이 흔들릴 정도.
잠들었던 산이 놀라고, 새가 날아올랐다. 산 주변의 가옥마다 놀라 하나둘 불을 밝혔다.
무슨 일이야?
지진이 난 거야?
놀라 움츠러 들고, 누군가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지면이 아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지하! 땅 속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으면 볼 수 없다.
땅 속을 이동하면서도 독수리보다 빠르면 누가 볼 수 있을 것인가.
오행 중 토극(土極)을 품은 제금존은 지천(地天)과는 비할 바가 아닌 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지천은 지정으로부터 공능을 얻고 낮을 잃었지만, 토극을 품은 자는 낮도 밤도 같았다.
지천은 피를 복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토극을 지닌 제금존은 어떤 제약도 없었다.
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더욱 빨라졌다.
땅속을 헤쳐나갈 때면 기운은 더욱 왕성해지는 것이다.
바람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그 신속한 이동에,
‘후후, 자정쯤엔 도착할 수 있겠군.’
명정존이 느긋이 동행했다.
뒷짐을 진 채였고, 허공을 딛고 있었지만 새도 산짐승들도 알아볼 수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스륵.
후공의 소맷자락에서 미녀도가 빠져나왔다.
이내 둥실 떠올라 허공에 멈추었고, 펼쳐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미녀도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
후공의 시선은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숫자는 이(二).
잠시 후 자정을 넘게 되면 일(一)이 될 터.
거기서 다시 하루가 지나면 미녀도 안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자정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멀리 자리를 옮긴다.
그건 반양장에 모두가 알고 있었고, 지금 대형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풍제와 당명도 인지하고 있었다.
- 대형, 아직까지 좋은 감정이 드십니까?
당명이었다.
눈빛에 염려가 가득했다.
지난밤 어떤 방법을 써도 미녀도를 훼손하지 못한 터라 수심은 더 깊어진 터.
- 여전하다. 그러니 너무 염려할 것 없다.
그럼에도 안심이 안되는지 당명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 혹여 그동안 다른 변화는 없었습니까?
이번 물음은 풍제.
-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숫자가 줄어갈 뿐.
- 혹여 짐작 가시는 건?
- 전혀. 뭐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 너무 태평하십니다.
풍제가 언짢다는 듯 눈매를 꿈틀했기에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 후후, 대화는 짧았고 신묘함은 가득하니 추측할 수가 있어야지. 여인이 초대한다고 했던 말도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부른다는 것인데 그것이 그녀의 꿈속일 수도 있고, 나의 꿈속일 수도 있다. 꿈이 아니라면 내 혼이 끌려갈 수도 있고, 여인의 혼령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겠지.
- 나타난 것이면 좋겠습니다.
풍제가 나직이 바람을 말했다.
그럼 대형 혼자만이 아닌 함께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후공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 들어라.
전음과 함께 분위기가 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음성에 풍제와 당명도 진중해졌다.
- 아침이 오면 멀리 옮길 테지만, 회영부에 대해서는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공능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으니, 혹여 추적의 수단을 갖추고 있다면 찾아올 수도 있다.
- 네.
당명이 답했고, 풍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의 염려는 하나.
미녀도가 발현할 때, 회영십존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을 대형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후공의 전음이 이어졌다.
- 혹여 그와 같이 공교로움을 맞이하면 좋지 않다. 미리 파악하고 물러서라. 맞서지 않는 것이 좋다. 오행기가 있다지만 회영이존 명정존의 눈은 알아차릴 것이다. 또한 손쉽게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회영십존 중 남은 이는 넷.
그중 회영육존 쇄후존은 문제될 게 없으니 셋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셋의 공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공능.
- 원신단을 활용해라. 복용하고 도주해라. 그들을 상대하는 건 내가 너희와 함께할 수 있을 때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당명과 풍제는 동시에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지금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그런 마음.
최악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일어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다.
정작 가장 큰 문제와 직면하게 될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순순히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 허허, 대답해야지.
채근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명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고, 풍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난날,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여러 일들, 여러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괜찮겠지.
아무 일 없겠지.
그런 마음도 제갈유가 떠오르면서는 흔들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
예상치 못했던 사건.
미친 비명소리. 그리고 울부짖음, 울부짖음.
긴 호흡과 함께 떨쳐낸 후, 시간을 측정했다.
이제 곧 자정.
미녀도의 숫자는 다시 바뀌게 될 터.
삼에서 이로.
‘오.’
함께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
여인을 함께 맞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삼.’
대형을 잃게 되진 않겠지.
‘이.’
그럴 리 없다.
‘일.’
그렇게 두지 않는다.
풍제는 비로소 눈을 떴다.
대형을 바라보니 대형은 미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 바뀌었습니까?
- 대형,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게 웃을 일인가.
그 어떤 재난이 온다 해도 풍제는 웃을 자신이 있었지만, 미녀도라면 사정이 달랐다.
막연함은 언제나 두려운 법.
미지의 것은 공포를 불러온다.
그것이 혈육보다 진한 감정을 불러오는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더욱 무서워진다.
- 대형, 혹시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겁니까?
그저 숫자가 줄어든 것이라면 웃지 않았을 것 같았기에 당명이 물었다.
- 운이 따르는구나.
- 네?
- 오고 있다.
미녀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미녀도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의 미녀도는 이전과 같았다.
자정이 되며 숫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오고 있는 건 회영부.
둘.
하나는 지하를 돌파하며 다가오고 있으니 회영삼존인 제금존일 테고, 다른 하나는 지상. 회영일존 혹은 회영이존. 번과 쾌가 그 미세한 기운을 읽고 알려왔다.
- 오고 있다니요?
- 놈들이다. 둘.
- 아!
당명도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운이 좋다.
둘이라니 더 좋았다. 미녀도가 발현하기 전에 두 놈을 제거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겠는가.
- 오는군요.
뒤이어 풍제도 웃었다.
염혼이 느꼈기에 풍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염혼을 흩었다.
그렇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고개를 갸웃했다.
당명도 놀라 눈이 커졌다.
- 대형?
대형이 눈빛을 강렬히 빛내고 있는 것이다.
이내 자줏빛 광채가 폭사했다.
시선은 여전히 미녀도.
- 무, 무슨 일입니까?
- 잠깐. 잠깐. 뭔가…….
후공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미녀도가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멈춰 있던 구름이 움직이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리까지 들려왔다.
‘왜…… 지금?’
그림 속 새가 날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부는 소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착각인가? 환상?
아니면 남은 날을 방금까지 잘못 보았던 걸까?
다시 시선을 옮겨 그림의 오른쪽 상단을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숫자는 이(二).
그때는 여인도 움직였다.
걸터앉아 있던 여인이 시냇가로 내려선 후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직 날이 남았는데?’
그 의문에 답하듯 여인이 손을 들어 우측 상단을 가리켰다.
슥슥 지워지더니 숫자가 바뀌었다.
이(二)가 일(一).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자니,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숫자가 바뀌었다.
일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후,
- 지금.
순간 암전.
후공은 온 시야가 검어졌다가 다시금 눈부신 백색 광채를 맞이했다.
허공에 걸려 있던 미녀도가 맥없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후공의 고개도 아래로 축 처졌다.
‘대형!’
풍제와 당명이 달려들어 붙들었지만 마치 짚단인 것처럼 흔들릴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