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나의 공간에서?
그때 여인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밤에도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지날 때마다 소로의 좌우에선 노랗고 하얀 꽃들이 연신 피어나 그녀를 반겼다.
이곳은 그녀의 세상.
그녀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구현되는 곳.
“즐거워.”
여인은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
이곳에 온, 자신을 찾아온 손님 때문이었다.
“기이한 사람이야.”
어린 친구의 평정심이 놀랍다.
그의 여유가 놀랍다.
새가 되었을 때 웃음을 터뜨릴 줄이야.
웃음 소리는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새가 된 순간 모든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후 그는 내내 장단을 맞춰준 것이다.
작은 새라 높이 날지도 못하고 날개를 많이 펄럭여야 함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다.
잡힐 걸 뻔히 알 텐데도,
언제라도 잡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따뜻한 사람이야.”
또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산기슭에 살고 있는 노인과 노파를 보면서 그는 흐뭇해한 것이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노인을 노파가 돌려 타박하는 말을 정겨워했으니,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칭찬도 잘하는 사람이다.
여태 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마치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후후, 도망치는 와중 칭찬이라니…….”
듣기 좋았다.
그리고,
“재밌는 사람.”
동굴 안 장작불에 날개를 태울 때였다.
‘앗 뜨거!’라니.
종종걸음으로 동굴 입구로 나와 고개만 살짝 내밀어 살피던 모습에도 웃고 말았다.
도토리를 끌어안고 있던 다람쥐를 쫓아내던 말에도.
“후후후.”
그다음은 젊은 남녀를 바라볼 때의 마음.
그리고 이 밤.
그가 생각했다.
그가 말해왔다.
‘그녀는…… 외로웠구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자신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재밌는 사람만이 아니다.
따뜻한 사람인 것만도 아니다.
그는…….
“멋진 사람이야.”
그 말에 별들이 호응했다.
하늘의 별들이 쏟아져내렸다.
수만 개의 별들이었다. 별빛은 숲에 닿고, 땅에도 닿으며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며 사라졌다. 그럼에도 밤하늘에선 셀 수 없는 별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내렸다.
별 비였다.
그건 후공에게도 내렸다. 장관이었고, 새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나뭇가지에도, 잎사귀에도 부딪히며 터져나가는 빛들은 여인이 보내오는 선물 같았다.
이쯤 되면 감사 인사는 해야 한다.
그녀가 건넨 육포도 맛있었고.
‘선배.’
대답은 없었다.
대답이 없으면 어떠한가.
괜찮다. 그녀는 듣고 있다.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멋진 선물입니다.’
숲길을 걷는 여인이 웃었다.
“무슨 소리지? 어디 모기가 있나? 귓가에 앵앵거리네.”
‘선배, 술래잡기는 이쯤에서 그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흐음, 그럴 수 없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시간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후공이 그 의미를 모를까.
자신이 미녀도의 발현을 기다린 건 180일.
하지만 이곳의 시간은 다르다.
그녀는 180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잠들고 또 깨도 시간이 더디 흐른다고 했다.
이곳의 일 년이 바깥의 하루.
지금 바깥쪽은 이제야 회영부와 마주했을 터.
이곳에서 열흘을 보내도 반시진(약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빨리 나가면 나갈수록 좋은 건 당연한 일.
‘친절히 설명해주셨으니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배도 알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제가 어떤 사람인지.’
“흐으으으음…… 전혀.”
여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영원히.”
‘후우, 숨이 턱 막히는군요.’
“지금 말은 실망스럽네.”
‘그냥 숨이 좀 막혔습니다만.’
“하하하!”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 소리가 산과 들에 울려펴졌다.
“돌이키긴 늦었어. 난 이미 실망하고 말았으니 술래잡기를 이어가야겠다. 이번엔 무엇이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군. 넌 음흉하니 새보다는 늑대가 되어라.”
그 말이 끝났을 땐,
팡!
순간 후공은 작은 새에서 회색 늑대가 되었다.
딛고 있던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우지끈 부러졌기에 후공은 훌쩍 뛰어 땅에 내려섰다.
‘흐으음…….’
몸이 커졌다.
비록 날아오를 수는 없어도 다리가 무려 네 개.
다리가 둘에서 넷이 되었으니 꽤 나아진 것이라고 봐야 했다.
후공은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숲, 나무, 풀, 꽃.
저만치 보이는 멧돼지.
이곳은 또 다른 세상.
여인이 의식으로 만들어놓은 세상.
허상.
후공은 늑대의 눈으로 땅을 바라봤다.
영원히, 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적어도 삼 일 안에는 나가야 한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바깥의 시간으로는 대략 일다경.
사흘 안에 여인이 보내줄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처분만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녀는 이미 한 차례 약속을 어기고 날짜를 지워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장단을 맞춰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
설득이 안 된다면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
찍어 누른다.
이곳의 세계와 맞선다.
‘나의 세상을 만든다.’
후공은 의식을 집중했다.
순식간에 몰아지경에 들었을 때,
꿈틀꿈틀.
응시하고 있는 지면의 한 지점이 움직였다.
‘된다.’
살포시 흙이 뒤집어지더니 푸른 싹이 올라왔다. 점점 자라났다. 이윽고 이파리가 나왔고, 꽃망울이 보였다. 그 꽃망울이 투둑,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꽃이 피어났다.
‘해냈다.’
후공은 웃었고,
‘꽃을…… 피웠어?’
여인은 눈이 커졌다.
나의 공간에서?
*
그쯤,
- 야, 온다. 온다고! 시발, 땅을 뚫고 와!
- 으으으…….
멀리 피하라는 풍제의 명에 반양장에서 벗어나 도주하던 무흔신투와 지귀객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땅속이었다.
신형을 펼쳐 달리다 이쯤에서 더 안전하게 땅을 파고들자고 한 것이 패착이었다.
이쪽은,
구르르르르르르르르르.
하지만 다가오는 놈의 소리는,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대체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다가오는 진동만으로 지하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 야, 더 빨리 뚫으라고오오오오!
- 시발!
지귀객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 마음을 다잡는다고 순간적으로 한계가 돌파되던가. 이미 지금도 자신의 역량을 초월해 땅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기에 지귀객은 좌절감이 휘몰아쳤다.
지천보다 더했다.
아니, 아니다. 지천은 지금 쫓아오는 제금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금존, 이 개새끼야! 그만 좀 따라와라. 제발! 우리는 그냥 도둑놈들이라고!’
마음으로 빌어보았지만 그 소망이 이뤄질 리 만무했다.
구르르르르르르르.
차라리 지상으로 올라간다?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신투 선배라면? 선배의 경공이라면?
- 선배, 지상으로 올라갑시다.
- 그, 그러자. 차라리 그게 낫겠다.
- 갑니다.
구르르르르르르.
위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갈 때 신투의 머리로 퍼뜩 하나의 생각이 스쳐갔다.
- 너 설마 나만 보내려고?
- 선배는 살아. 내 몫까지 살아.
- 미친 새끼야. 그런 게 어딨어!
- 시발, 한번씩 생각나면 제사나 지내줘.
그 말에는 신투가 눈물을 터뜨렸다.
자신을 땅 위로 올라가게 한 후, 이놈은 지하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려고…….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 꼭 살아남아! 대답해!
어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신투가 흐느끼기만 했다.
지면은 어느새 지척.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제금존도 거의 지척.
- 땅이 뚫리면 곧바로 달려. 미친듯이! 시발놈아, 대답하라고!
신투는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귀객을 두고 혼자 도망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함께 죽는 것이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함께 죽으면 지귀객의 원망의 말을 들을 것 같고,
혼자 떠나면 지귀객의 웃음을 볼 것 같았다.
‘그 웃음을 보고 싶지 않아!’
차라리 원망을 듣겠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제발.
놈이 우릴 볼 수 없게 해주십…… 응?
- 지금이야!
땅이 뚫리며 지상이 보였다.
지귀객이 신투의 어깨를 잡고 위로 던졌다.
하지만 잡은 건 무흔신투도 마찬가지.
도리어 지귀객의 손을 떨쳐낸 후, 지귀객의 목덜미를 붙잡고 함께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멍청아!’
지귀객이 신투에게 욕을 퍼부을 때, 신투가 품에서 다섯 개의 깃발을 뽑아 내던졌다.
파바바바박!
그리고 뒤이어,
쿠르르르릇!
제금존이 튀어나왔다.
제금존은 사방을 둘러보고 미간을 좁혔다.
고개도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은 들판. 숲이 아니다. 나무가 듬성듬성 있어 시야는 확 트여 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디로 숨었지?’
밤이리서 못 보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의 안광은 수백 리를 꿰뚫는다.
은신인가?
아니, 자신에게 은신따윈 통하지 않는다.
기운을 못 읽을 리가.
그럼 대체 뭔가?
문제는 심지어 소리도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일 리가.
제금존은 뚫고 나온 땅의 구멍을 바라보다 이내 신형을 날려 주변을 크게 휘저은 다음 다시 돌아왔다.
그 모습에,
- 야, 야! 숨 쉬지 마!
- 선배, 팔에 닭살이 오돌토돌 일어났는데 이거 소리가 나는 건 아니겠지?
- 닭살도 그만!
오행기 안에서 신투와 지귀객은 서로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면서 덜덜 떨었다.
- 근데 선배. 시발, 오행기가 있었으면 진작에 좀 말하지 그랬소!
- 깜박했지.
- 아니, 깜박할 게 따로 있지.
- 염병하고 자빠졌네. 너도 깜박했잖아. 안 그래?
- 뭐래. 난 당연히 대공자님께 돌려준 줄 알았지. 하여튼 도둑놈 아니랄까 봐 손에 쥐면 돌려주질 않아.
- 하하, 덕분에 살았잖냐.
귀운종이 은령존을 맞이했을 때 이후, 오행기는 줄곧 신투가 지니고 있던 터.
워낙 경황 중이고 두려움에 질려 떠올리지 못했다가 겨우 떠올린 상황이었다.
- 아직 아니야.
- 그러게. 저 새끼 왜 안 가냐. 무섭다.
제금존이 갈 수 있을 리가.
상식적으로 사람이 증발할 수는 없다.
자신의 눈을 벗어나 도망치는 건 무리다.
땅 위에서는 다른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훨씬 전에 땅을 뚫고 지상으로 올라왔어야 했다.
그러니 이곳에 있다.
제금존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후후후…….”
이내 득의만면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찾았다.”
- 서, 선배. 들켰어! 지금 도망쳐야 해!
- 이 멍청한 새끼야, 속임수잖아!
- 어? 어?
- 명정존이면 몰라도 저놈은 못 봐!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제금존의 안색은 더욱 무거워졌다.
분명 부근에 은신하고 있다면 동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때였다.
제금존의 시선이 돌아갔다.
먼 곳이었다.
그곳에서 땅을 파헤치며 나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괴이한 공능을 숨기고 있었구나.”
분명,
구르르르르.
옅게 들려왔고 그 소리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기에 제금존이 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 갔다, 갔어!
- 만세! 만만세!
신투와 지귀객은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멈췄다.
- 근데 왜 갔지?
- 그러게.
[구르르르르르르…….]
그건 색관조가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켜보다 안 되겠다 싶은 색관조가 낮게 날며 마치 땅을 헤쳐나가는 듯한 소리를 냈고, 색관조의 다리에 걸치듯 매달린 금섬은 한쪽 발을 내려 땅을 긁어나가고 있었다.
‘까르르르르르, 우릴 쫓아와!’
‘극극, 그으으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