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그대는 누구인가?
“여자! 왜 웃기만 하는 거냐!”
여인이 한참이나 웃으니 천공단이 발작을 일으켰다.
“아, 진짜! 싸울 거야, 말 거야?”
“싸울 거면 얼른 싸우고, 안 싸울 거면 같이 소고기 구워 먹자고!”
“어떡해.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출출해졌어.”
“그럼 일단 먹고 싸울까?”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또 웃었다.
하하, 같이 소를 잡아먹자니.
갑자기 출출해졌다니!
생각지도 못했고, 이런 식의 대화의 흐름은 들어본 적도 없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평소 모습이 이렇다는 것이겠지?
천공단주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닌다는 거지?
지금 보이는 광경은 천공단주가 의식으로 구현해낸 산물. 그의 기억. 그가 보내온 나날.
그의 수하들이 엉뚱하다.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면 그 사람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어울리는 이들은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그런 점에서 여인은 천공단주를 좀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작은 새가 되어 드러내 보였던 때보다 훨씬 더 유쾌한 인물이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 어떻게 할 거냐고오오오오!”
“배고프다고오오오오오오!”
“대체 뭐 땜에 웃는 거야! 웃지 않으면 죽는 병에라도 걸린 거야! 앙? 그런 거야?”
그런 병은 없었다.
병이라면 방금 생겼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천 년 만에 찾아온 손님이 반가워서 웃지 않을 수 없구나.”
“천 년?”
“뭔 개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천 년을 살아? 이거 순 사기꾼이네!”
여인은 진심이었다.
이곳은 자신의 세계. 언제나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겪고 보아온 세상만을 보며 지냈는데 천공단주가 찾아오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이토록 멋질 수가!
이리도 유쾌할 수가!
그래서 여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세계를 더 보고 싶어졌다.
“반가우니까 일단은 싸워야겠지?”
찾아온 또 다른 세상의 왁자지껄한 모습을 더 보고 싶어졌다.
“누나, 반가운데 왜 싸우는 거야?”
“어쩜 좋아. 미쳤나 봐?”
“여자! 잘 생각해. 우리 천공단은 자비가 없다. 너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세미녀라도 봐주는 사람들이 아니야. 단주를 건드리면 다 죽어! 새겨 들어. 방금 칭찬 아니야!”
[까르르르르르르, 우린 도망가자!]
[그으으으으윽!]
색관조와 금섬은 늘 그랬던 것처럼 도주.
[너 이제 말할 줄 알잖아?]
[어, 깜박했네.]
[야이, 멍청한 두꺼비야! 까르르르르르!]
여인이 날아오르는 색관조와 금섬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시선은 후공에게로 향했다.
“너의 수하들은 많고 다양하구나.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나도 내 수하들을 불러내야겠다.”
“기대되는군요.”
후공이 지그시 바라볼 때였다.
쿠르르르르쿠쿠쿠궁.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으잉, 지진?”
“하하하, 수하가 지진이야?”
“염병, 웃겨 죽겠네. 지진따위 뭐라고!”
“어이 어이, 재주가 놀랍지만 우리에게 통할 리 없잖아!”
흔들리는 땅에서 천공단이 균형을 잡으며 한껏 비웃었다. 그때 저 멀리 산이 허물어졌다. 산 봉우리가 부서져나갔고 흙과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방금까지 보였던 높은 산이 평평해졌을 때 뭔가가 다시 솟아났다. 그건 사람의 형태. 거대한 머리가 보였고 목과 어깨가 있었으며, 이내 몸을 일으킨다 싶을 때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인의 모습이 되었다.
“우와아아!”
“와아, 미쳤네! 미쳤어!”
천공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산이 거인이 된 것이다.
그런 거인이 다섯.
다른 산들도 거인이 되어 걸어왔다.
쿵! 쿵! 쿵!
거인들이 다가오며 우수를 내렸다. 땅에 손이 닿으면서 뭔가를 뽑아냈다. 쿠구구구구궁. 땅이 다시 흔들리고 흙이 튀면서 거대한 검을 뽑아낸 거인들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편 순간 튕겨 올랐다.
쿠우우우웅!
이내 여인의 뒤쪽에 내려서니 지축이 흔들렸다.
후공이 바로 대응했다.
“천공단.”
“천공단!”
천공단 모두가 따라 외쳤다.
“준비는?”
“완료!”
“그럼 퇴각!”
“도망 가아아아아아!”
즉시 모두가 정신없이 도망쳤다.
너무 급하게 뛰다 소천개가 나자빠지자 금적자가 뒷덜미를 잡고 튀었다.
그 광경에 여인은 멍해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멈추려야 멈출 수 없었고, 급기야 나중에는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이런 식이었다고?
원래 이렇게 살아가는 놈들이었다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시대의 강호는 특별한 걸까?
아니, 그럴 리 없겠지. 저들이 특이한 것이리라.
여인은 새로운 세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뒤쫓았다.
쿵, 쿵, 쿵!
산악 같은 다섯 거인이 그녀와 함께했다.
후공과 천공단은 산을 뛰어넘었고, 들판을 가로질렀다.
“우와아아아, 온다! 와!”
“엄청 빨라. 이러다 잡히겠어!”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꿈 아니냐고오오오!”
거의 따라잡혔기에 모두가 난리도 아니었다.
“두목, 이러다 죽겠습니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백부님!
제갈혜까지 전음을 보냈다.
“그럼 바다로 뛰어드는 수밖에.”
“바다요?”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 산입니다!”
“두목, 바다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
“여기!”
후공이 손을 들어 전면을 가리킨 순간,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망망대해 파란 바다에는 배도 있었다. 그것도 쾌속선 두 척. 모두가 뛰어들어 배에 올라탔다.
배가 빠르게 나아가면서 육지 위에 서 있는 여인과 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
“하하하, 꼴 좋다.”
“닭 쫓던 개가 따로 없구만.”
“웃는데?”
여인은 웃고 있었다.
천공단주가 끝도 없이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새가 되었을 때도,
늑대가 되었을 때도,
본래의 모습이 된 지금도, 그는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 응답해주고 있었다.
그녀도 순식간에 바다를 만들 수 있었다.
비를 내리게 할 수도, 눈이 오게 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웠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그런 공능을 눈앞에 펼쳐 선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새로웠으며 신기한 광경이었다.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살짝 쓰다듬듯 손을 쓸었을 때, 이미 그녀는 학을 타고 있었다. 학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학이 바다를 향해 날아올랐다.
천공단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뭐, 뭔데?”
“학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원래 없었잖아!”
“바다는 원래 있었고?”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누가 설명 좀 해 봐.”
낭인왕의 고함에 소천개가 답했다.
“이건 그거야. 꿈이야. 우린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어.”
짜악!
곁에 있던 은앙개가 소천개의 뺨을 후려갈겼다.
“아, 왜 때려! 망할 사형 놈아!”
“꿈이냐?”
“어? 왜 안 깨어나지? 내 꿈이 아닌가?”
소천개가 은앙개의 뺨을 갈겼다.
은앙개가 뺨을 부여잡고 갸웃했다.
“내 꿈도 아니네?”
그걸 시작으로 천공단이 서로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야!”
“시발, 아파!”
“으엇! 모용진 너 이 새끼,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니냐!”
“저는 목이 돌아갔는데요?”
“어, 그렇네. 미안.”
그 모습을 여인이 바람을 가르며 보았다.
학 위에서 여인은 다시금 웃음 지었다.
바보들이 한 무더기.
이렇게 지내왔단 말이지?
이런 식으로 지내고 있단 말이지?
“이건 지독한 악몽이야. 분명 죽어야 깨어나는 걸 거야!”
“죽으려고?”
“기다려봐. 내가 꿈에서 나오게 해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소천개가 배에서 뛰어내렸다.
이내 바다에 잠겨 보이지 않다가 머리가 튀어올라왔다.
“어푸, 어푸! 사람 살려어어어어! 나 헤엄 못쳐어어어!”
소천개가 팔을 마구 휘저으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어휴, 저 머저리 새끼.”
“내가 다 창피하네.”
“하여튼 귀찮게 한다니까. 야, 네가 가서 건져와라.”
무산쌍웅이 은앙개를 밀었다.
그 결과,
“사람 살려~~~. 나도 헤엄 못 친다고오오오! 이거 꿈 아니야. 진짜야!”
학은 이제 머리 위.
남궁연과 모용진이 바다에 뛰어들려 할 때였다.
촤아아아아아악!
큰 물결이 치면서 바다에서 거대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천공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무슨…….”
“요, 용이야!”
“용이 나타났어?”
용이었다.
붉은 용이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상체를 드러냈는데, 용의 목 부분에 소천개와 은앙개가 타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나 좀 봐. 나 용을 타고 있어!”
“다들 뭐해. 얼른 타!”
배에서 천공단이 신형을 날려 용의 등에 올라탔다.
용이 머리를 돌려 모두 무사히 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날아올랐다.
쏴아아아아아!
용의 꼬리까지 빠져나오면서 바다에 거대한 파도가 쳤다.
여인도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이곳의 주인인 그녀였지만 용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용을 보는구나.’
이쯤 되니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모를 정도.
그리고 기이하기도 했다.
너무도 사실 같은 모습인 것이다.
‘천공단주는 용을 본 적이 있나?’
용은 후공의 신검에 각인된 용이었다.
늘 바라보았고, 매만졌던 용의 각인이 이곳에서 현실인 양 나타난 터.
“하하하, 학은 저리 꺼지시고요!”
“으하하하하, 학 초라한 것 좀 봐라.”
삐리리, 삐리삐삐, 삐삐.
금적자의 피리 소리도 흥겨운 음률로 조롱에 가담했다.
하늘을 날던 용이 선회하여 학을 마주했다.
용의 머리 위쪽에서 후공이 입을 열었다.
“선배, 용이 불을 뿜는 걸 보신 적 있습니까?”
“이제 보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말과 함께 용이 불을 뿜어냈다.
화르르르르르르르!
붉고 푸른 불길이 학을 뒤덮고, 여인도 불길에 가려졌다. 그 불길은 모든 걸 태워버렸다.
하늘과 땅도.
더 이상 바다는 아니었다.
하늘도 아니었다.
후공과 여인은 어느 들판에 서 있었다.
노랗고 하얀 꽃들이 사방에 가득 피어난 중심이었다.
여인은 후공을 바라봤다.
기이한 자다.
여인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곳은 자신의 세계이고, 자신만의 공간인데 이젠 더 이상 눈앞에 있는 청년을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도리어 여기에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청년이 자신을 새나 여우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 들판도, 이 꽃들도 그가 준비한 것.
그렇기에,
“궁금하구나. 너는 누구지?”
여인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새가 되자마자 모든 것을 알아차린 이.
자신의 외로움을 단번에 이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관통하듯 마음을 울렸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포권의 예를 취하면서였다.
“후공.”
그녀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말을 이었다.
“현 강호의 무림맹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