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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412화 (412/460)

412화. 연능화, 주란, 엽불.

주변 풍광이 일변했다.

어느 산야였고, 높은 절벽 앞이었다.

절벽 아래로는 구름이 흘렀다.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의 변화, 이 풍경은 연능화의 공능.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후공, 그대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겠군요. 더 이상 나아갈 영역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인하여 나의 의식은 더 깊어졌습니다.”

처절했던 의식의 대결 때문이었다.

육체가 사선을 넘나들면서 큰 성장을 이루듯, 의식이 소멸될 위기를 지나고 나니 그녀는 자신이 진일보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공은 미소와 함께 공손히 겸양했다.

“선배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녀를 죽이려 했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녀를 소멸시킬 생각까지 했다. 그걸 모를 연능화가 아닌데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인 데다 또 감사의 말까지 하고 있으니, 좋은 여인이었다.

도리어 후공은 감사의 말이라면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깊어진 건 그녀만이 아닌 것이다.

의식의 확장은 곧 경지.

아마 이곳을 떠나게 되면 큰 성취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놀라운 영약을 복용한 것보다 더 큰 기연을 얻은 것이라 할 만했다.

그런 마음을 짐작했음인가.

연능화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 아래 씁쓸함이 보였지만 후공은 말을 아꼈다.

그녀의 사매는 회영부주.

환혼의 창시자.

사매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인해 씁쓸해하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살려주겠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선배, 준비되었습니다.”

“좋은 여행이길.”

순간 연능화의 눈동자에 파도가 쳤다.

넘실거리는 거대한 물살이 덮쳐오는 광경을 보았을 때, 후공은 저잣거리에 서 있었다.

왁자지껄 여러 소음이 쏟아져들어왔다.

지나는 사람도 많았다.

누굴 봐야 하는가?

그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언제 도착하는 거예요?”

“왜 다리가 아프냐?”

“뭐…… 조금?.”

노인과 어린 소녀였다.

인자한 얼굴의 노인은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걷고 있었다.

‘노인은 월하노인, 소녀는 연능화. 아홉 살.’

후공은 그저 알 수 있었다.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더 어릴적에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것도, 출중한 재능을 타고난 것도 알 수 있었다.

스승을 따라가는 길.

후공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바로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후공을 볼 수 없었다.

“그럼 날아갈까?”

“날 수 있어요?”

“물론이다. 자, 그럼 날아가자.”

“와아, 굉장해. 하하하, 왜 진작 안 날았을까요?”

이내 날아올랐기에 연능화가 연신 감탄했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기억.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순간.’

그녀가 아직까지 스승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후공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스승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

풍경이 돌변했다.

깊은 산속. 계곡 부근이었다.

근사한 장원이 보였고, 다섯 채의 전각이 멋들어지게 올라가 있었다.

그 안에서 후공은 그녀의 사매를 볼 수 있었다.

“사저, 너무 아파요.”

“하하하, 원래 아프면서 크는 거야.”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걸요?”

목검을 들고 선 연능화와 그녀의 어린 사매였다.

이때의 연능화는 열두 살.

그녀의 사매는 여덟 살.

이름은 주란.

유순하게 생긴 아이였다.

또 엄살이 심한 아이였다.

다리는 부러지지 않았다.

“어떻게 부러졌는지 볼까?”

“여기, 여기요.”

“헉, 어쩌면 좋아. 뼈가 드러났어!”

“에에?”

옷을 걷어 보이자, 끔찍한 광경이 드러났다. 자신의 뼈가 드러난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아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즉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에 후공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군.’

환술이었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연능화가 스승과 함께한 시간은 고작 삼 년. 그 짧은 기간에 연능화는 환술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광경도 그녀의 기억.

그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한 번씩 꺼내 보는 지난날 중 하나. 연능화의 기억 속 사매는 순진하고 귀여운 아이로 남아 있었다.

“사부님! 사형! 사저가 제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뼈가 보여요! 사람이 자기 뼈를 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연능화가 한 전각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쉿, 하며 조용히 시켰다.

후공은 그 전각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준수한 외모에 날카로운 검미를 지녔고, 입술은 가늘었다. 앉아 있음에도 큰 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월하노인의 첫 번째 제자였다.

이름은 엽불.

이내 엽불이 서서히 눈을 떴다.

신광이 번쩍였다가 갈무리되면서 잦아들었다.

신광만으로도 그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젊은 나이에 그는 현경의 예.

그런 그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떠올랐다.

바깥에서 연신 어린 사매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는 그저 사매들이 꼬마 아이로 보였던 모양.

후공은 엽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도 살아있나?”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이건 연능화의 기억.

그랬을 것이라는 연능화의 상상.

그저 엽불의 미소는 진해졌을 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두 명의 여자 아이는 빠르게 성장했다.

경지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미모도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워졌다.

강호로 나아갔고, 여러 일들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 시대의 천하제일인을 꺾기도 했다.

“내가…… 졌소. 그대의 존성대명을 알려줄 수 있겠소? 내가 누구에게 패배한 것인지는 알아야하지 않겠소.”

“사문은…… 사문은 어디인 게요?”

그녀는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나이 서른둘.

그녀의 사매 주란은 스물여덟.

그 후 연능화와 주란은 강호에 흥미를 잃었다.

그로부터 다시 오 년이 빠르게 흘렀다.

조용한 나날 속에 스승이 먼 길을 떠났다.

그때부터였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스승에게 향을 피운 연능화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능화에게 스승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

또 천지를 뒤엎을 만한 공능을 소유한 존재. 그런 스승이 떠난 것이 그녀에겐 큰 허무함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결국 죽는 것인가. 경이로운 힘을 지녔다 해도, 큰 부를 소유했다고 해도, 어떤 명예를 지닌 자라도…….’

그건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엽불도 같았다.

“모든 세상, 모든 시간 위에 군림하고 싶다.”

지금 어떤 힘을 지녔든,

지금 무슨 영광을 누리든,

결국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밤이면 홀로 걸으며 그런 말을 되뇌이곤 했다.

그런 소망은 주란도 품었다.

소망하는 이유는 달랐다.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흩어지고 마는 것이겠지.’

모든 걸 잃는다 해도 주란은 대사형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싫어. 나는 대사형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어. 대사형 곁에…… 머물고 싶어.’

엽불과 주란.

두 사람은 이미 연인.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손에 거머쥘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누구는 허무함에 깊이 빠졌고,

누구는 영원한 군림을 원했으며,

또 누군가는 영원한 사랑을 원했다.

‘그렇게 된 건가.’

이쯤 되니 후공은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이유는 다르지만 각자가 영원한 삶에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 결과, 모두는 수행에 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결국 각자가 길을 찾았다.

연능화는 미녀도를,

주란은 환혼 진법을.

“사저, 이걸 보시겠어요?”

주란이 환혼 진법을 연능화에게 보였다.

연능화는 크게 놀라워했다.

“란아, 너의 이 기예는 경이롭구나. 하지만…….”

“사저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사매, 너는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연능화는 사매에게 미녀도에 함께 머무는 것을 권했지만 주란은 듣지 않았다.

“사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

“사저…… 미안해요. 난 그럴 수 없어요.”

미녀도는 모든 게 환상.

기억의 재현.

주란은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대사형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현실인 공간에서,

만지고, 느끼면서 그렇게 함께하고 싶어했다.

연능화가 더 만류할 수 없었던 데에는, 대사형인 엽불의 의지가 컸다.

“능화,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우리는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

어느 이름 모를 산야에서 엽불이 말했다.

후공은 곁에서 지켜봤고, 산이 낯익었다.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 전 연능화와 함께 서 있었던 그 절벽이었다. 지금 그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제 이곳에 선 건 네 사람.

후공과 연능화, 그리고 주란과 엽불이었다.

엽불이 주란에게 다가갔다.

엽불이 손을 내밀어 주란의 뺨을 매만졌다.

“주란, 환혼하여라. 훗날 너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 기억해라. 천 년이다. 나는 이제 기나긴 잠에 들 것이다. 내가 깨어날 때, 너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연능화는 미녀도.

주란은 환혼진.

그리고 엽불은 귀기(鬼氣).

엽불은 천 년 후를 기약했고,

그런 엽불을 보며 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다시 봐요. 어떤 모습이어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연능화가 몰래 한숨을 토했다.

‘막을 수 없어.’

그녀의 생각이 후공의 귓가에 들려왔다.

후공도 이해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능화가 천하제일인을 꺾었다 한들 그녀의 대사형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들려온 말은,

‘……될 리도 없어.’

연능화의 시선은 그녀의 사매에게 향했다.

연능화는 사매가 환혼을 거듭해 천 년의 세월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이젠 후공도 연능화에게 공감했다.

주란의 삶도 내내 봤기에 어떤 성품인지 이젠 아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나름이지.’

사람은 하루아침에 돌변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계기, 어떤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건 흔한 일.

‘한데…… 엽불의 귀기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영원을 꿈꾸는 방식에서 미녀도와 환혼은 이제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엽불의 귀기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연능화도 전혀 듣지 못했음인가?

아니면 이제 곧 말하게 되는 걸까?

그런 기대감은 무너졌다.

연능화가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흐음, 이렇게 끝이로군.’

그녀의 기억은 여기까지.

후공이 아쉬움 속에 연능화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볼 때였다.

“너는 누구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엽불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

후공은 무심히 바라봤다.

“엽불, 내가 보이나 보구나.”

“흐릿하게.”

“넌 살아있군.”

“죽어있다.”

“어디에?”

“후후후………….”

그 답에는 긴 웃음이 답을 대신했다.

눈을 떼지 않은 채 엽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만나게…… 된다.”

타인의 기억 속임에도,

환상임에도,

음산한 귀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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