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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413화 (413/460)

413화. 크아아아아아아앙!

순간 공간이 일그러졌다.

풍광이 소용돌이치며 하늘과 땅이 회전하고, 보이는 모든 것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엽불도, 주란도.

그리고 후공도.

몸이 한 바퀴 회전하는가 싶을 때, 후공은 연능화의 기억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풍광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엽불과 주란이 없다는 것.

방금 전 기억의 공간에서는 신형을 날려 떠났던 연능화가 눈앞에 있다는 것.

“다, 당신…….”

또 다른 점이라면,

연능화가 하얗게 질려 주춤 물러났다는 것.

후공은 차분히 답했다.

“보셨군요.”

듣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마음속이었으니.

그녀 안에서 엽불이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났다.

엽불은 볼 수 있었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연능화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후공, 그대는 어찌 이리 고약한 장난을 하는 건가요?”

고약한 장난.

그녀의 말대로다.

후공도 같은 생각이었다. 매우 고약하다.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잠깐 환상을 본 것이면 좋겠다.

후공도 그런 것이길 바랐다.

엽불의 인지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인 것이다.

“말해 보아요.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요? 그대의 의식을 다루는 수준이 이미 나를 넘어섰으니 무엇이든 가능할 테죠. 어떤 환상이든 보여줄 수 있겠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방금의 장난은 선을 넘었다며 연능화가 말을 맺었다.

후공은 바라보기만 했다.

과연 진심일까? 그녀는 답을 모를까?

아니,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 상황이 감당이 안 되니 달아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렇게 회피해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연능화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왜! 왜 말이 없죠? 당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사형은 이곳에 나타날 순 없어요. 사형은 이곳에 들어온 적이 없고, 설령 들어왔다 해도 다시 나의 기억 속에서 지각을 갖출 수는 없어요!”

그게 가능하려면 두 개의 결계를 뚫어야 한다.

우선 미녀도 안에 들어와야 한다.

백번 양보해 스며들었다 해도, 문제는 다음. 그녀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개체로 따로 움직이는 건 곤란하다.

가히 시공간을 초월한 상황.

후공은 말없이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그 침묵은 어떤 대답보다 강력했기에 연능화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작아졌다.

그제야 후공은 입을 열었다.

“선배, 두렵습니까?”

그 말이 확답.

연능화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아…….’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고.

눈앞의 선 이는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이름은 후공.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기억 안을 거닐었다. 그가 지내온 나날을 보았으며, 그가 지내온 모든 날 속에서 그의 마음가짐도 보았다.

그저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이라면 이보다 두려울 순 없는 것이다.

“선배, 저도 두렵습니다.”

담담히 흘러나온 말.

두렵다는 말인데 왜 마음이 평안해지는 걸까.

연능화는 차츰 평정을 찾아갔다.

두려움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사형인데 왜?

원래라면 반가워해야 했다.

사형이 자신에게 온 것이다.

사형을 다시 만난 것이다.

어릴 적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사형의 다정한 손길, 또 사형의 포근한 미소. 그 모습을 떠올리면 당연히 반가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사형은 달랐다. 낯설었다.

사형이지만 사형이 아니었다.

사형은 지독한 음산함을 두르고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음산함이었다.

그보다 더한 건 사형의 눈빛.

후공은 사형의 눈을 무심히 바라봤지만, 자신은 바라볼 수 없었다. 붉게 이글거리는 탁한 빛. 보는 것만으로 숨이 멎어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며 눈을 감아야 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사형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사형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귀기(鬼氣)…….”

연능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건 그것뿐이기도 했다.

“귀기.”

후공도 따라 중얼거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능화에게 물어보는 것도 의미 없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에 다녀온 것이다. 그녀는 ‘귀기’라고만 알고 있을 뿐.

“모두가…….”

연능화가 처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다음 말이 무엇인지 후공은 듣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변했다.’

모두라고 했지만 실은 두 사람.

사매와 사형.

주란, 엽불.

사매는 환혼대법을 통해 천 년을 지나왔고, 사형은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이제 깨어나려 한다.

“후공, 그대의 말이 맞았고, 나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사매가 비록 환혼대법을 완성했지만 사매라면 결코 환혼을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형이 천 년이라고 말할 때도 다시 나타난다면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모두가 변했군요.”

말을 맺을 즈음 연능화는 눈물을 흘렸다.

후공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고요히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는 것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슬픔을 쏟아내고 또 쏟아내던 연능화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후공, 그대가 있어 다행입니다.”

“저도 두렵습니다만.”

그 말에는 연능화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그대가 위로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위로라고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위로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연능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속을 거닐었다.

후공이 알고 있는 건 연능화도 알고 있었다.

“단혼각……. 단혼각주. 사매의 제자. 맞나요?”

“네, 단혼각주가 환혼의 사슬을 끊으려 지금까지 노력해오고 있었습니다. 선배의 사매는 좋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으니까요.”

그 말에 연능화가 다시 복받쳤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어갔다.

밤은 금방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밤을 거닐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었다.

어느샌가 이곳에서 사흘.

“후공,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후공이 연능화를 바라보며 웃었다.

“꼭 살아남아야겠군요.”

“그래요. 난 그대가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사형에게서, 사매에게서.

사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후공의 놀라운 무위에 아직도 사매를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사매가 아닌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을 걱정하는 자신이 여기 있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는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시냇가.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이곳에 처음 도착한 날을 불러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흘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연능화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손끝으로 툭 건드린 순간, 몽글몽글 공간이 일렁였다.

“후공, 그대는 이제 못생겨지겠군요.”

돌아가면 모습은 꼽추.

화공신타.

연능화는 기억 속에서 보았다.

“한 떨기 꽃입니다만.”

연능화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크게 실언을 했군요.”

실언이다.

후공의 말이 맞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떤 모습인 건 상관없다.

이 사람은…….

후공은 주변에 향기를 퍼뜨리는 이.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꽃이다.

“그대의 동료들도 꽃.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강한 이들입니다. 시간도 얼마 흐르지 않았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이내 후공이 예를 취했다.

“그럼.”

몽글몽글 일렁이는 공간 안으로 후공이 신형을 날렸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연능화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꿈을 꾼 것일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허전함이 밀려들었기에 마치 꿈만 같았다.

그리고 소망하기도 했다.

내일이라도 다시 볼 수 있길.

그다음 날이라도.

기묘한 감정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왔다가 떠났을 뿐인데 왜 모든 것이 사라진 느낌이 드는 것인가.

‘다시 볼 수 있길…….’

무사하길.

그 시각, 반양장.

이곳의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고작 일각여.

콰앙, 투콰앙!

반양장에서 백여 장 너머에서 연신 거대한 폭음이 터져나왔고, 찬란한 광채와 함께 비검이 날았다.

서로는 어느 쪽도 압도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위에 선 것이 어느 쪽이냐는 명백히 드러났다.

‘속았구나!’

명정존은 내심 당혹을 금치 못했다.

내심 가늠하고 있던 경지를 훌쩍 뛰어난 것에 놀랐고, 악인곡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다.

염혼을 보게 되면 모를 수 없다.

날아드는 비검에 분홍빛 매화가 엿보이면 알게 된다.

비검과 함께 태극의 문양이 자신의 공력을 흘려내고 있으면 이 흉악한 자가 실상은 무당의 검존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공기도 차갑다.

몸이 순간순간 얼어붙는다.

북해빙궁!

‘속았어!’

풍제의 무리.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리.

꼽추 놈은 어디로 갔지? 화공신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놈이 설마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좋지 않다.

화공신타가 없음에도 우위를 점할 수 없으니 화공신타가 나타난다면 전세는 급격히 기울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도 위험한 인물은 둘.

풍제와 한 여인.

현경을 뛰어넘는 경지였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눈에 박힌 보석들 때문이었고, 절기인 분영환신 때문이었다.

분신이 서른둘.

염혼들이 각기 하나의 존재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분신도 같았다.

그렇기에 양상은 대규모 전투.

‘제금존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그 말을 들었음인가.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제금존이 발 밑에서 튀어나왔다.

- 놈들을 놓쳤다.

- 잊어라.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 악인곡이 놈들이었군.

쿠쾅!

스아아아아악!

빠르게 오가는 전음은 염혼의 공세와 비검에 잠시 끊겼다. 신형을 날려 벗어났다가 다시 전음을 이어갔다.

- 쉽군.

- 그래, 하나만 잡으면 된다.

- 누구?

- 소녀.

그 정도의 대화면 충분했다.

이들이 악인곡이 아니니, 하나를 잡으면 모두를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표적은 소녀.

현음신녀.

명정존의 눈동자 테두리에서 보석이 폭발하듯 빛을 발했다. 그의 분신들이 순간적으로 강렬한 기운을 일으켰다.

풍제를 향해,

암향야를 향해.

그리고 검선과 검존, 현이신녀를 향해 부딪혀갔다.

투콰아앙!

염혼에 넷이 부서져나가고,

비검에 둘이 찢겨나갔다.

다섯은 현이신녀의 빙공에 얼어붙었다.

그 틈이면 충분했다.

당명의 암기가 명정존의 네 분신을 먼지처럼 흩어버렸을 때, 땅이 솟구쳤다.

쿠쿠구구구궁.

원형의 테두리 형태로 현음신녀를 중심에 두고 흙벽이 치솟으며 그녀를 가뒀다. 천장까지 흙벽으로 채워졌기에 현음신녀는 혼자였다.

아니, 혼자라고 느꼈을 뿐이다.

흙벽의 공간에는 그녀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명정존과 제금존.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현음신녀는 볼 수 있었다.

그건 명정존과 제금존도 마찬가지.

“후후, 이젠 너 혼자로구나.”

쿠웅, 쿵!

토벽이 흔들렸지만 버틸 수 있다.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한 것이다.

현음신녀가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땐,

번쩍.

후공이 눈을 떴다.

화공신타의 모습으로 눈앞에 꽂혀 있는 검령을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아앙!

주인의 귀환에 번과 쾌와 친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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