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나의 이름은…….
반양장.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실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은 일에 미녀도 안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 후공은 미녀도에서의 사흘을 들려주었다.
“하하, 새가 되었다고?”
“미녀는 아주 제멋대로군. 약속을 어긴 게 누군데. 얼굴만 이쁘면 다야? 그래, 안 그래?”
모두가 악인곡의 모습.
검선은 웃었고, 당명은 신경질을 부렸다.
진실이냐고 되묻는 이는 없었다.
대공자는 미녀도 안에서 생소한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주란!
제금존이 실토한 회영부주의 이름을 대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간 건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녀도 안의 여인이 회영부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
“엽불…….”
“이건 좀…… 무섭네.”
엽불의 이야기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스산함을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미녀도 안에 침투한 것도 아니고, 연능화의 기억 속에서 스스로 존재를 발현하다니.
“갑자기 왜 춥지? 벌써 겨울이 되었나?”
추위를 즐기는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이 손을 매만졌다. 검선과 검존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엽불이 이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보고 있을 것 같고, 듣고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엽불아, 여기 있냐?”
“너 이 새끼, 우리 이야기 듣고 있는 거지?”
우스꽝스러운 말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남의 기억에서 실체를 드러낸 놈이다. 뭔들 못 할까.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마음 안에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후공의 생각은 달랐다.
“다들 개소리는 집어쳐. 놈은 여기 없다.”
“어째서?”
“아둔한 새끼.”
“그니까 왜?”
“넌 왜 그 모양이냐? 미련한 새끼, 검선이란 칭호가 아깝네.”
“나 흡혈악인데?”
“어, 그랬지.”
“내가 뭘 놓쳤단 거냐? 나만 모르는 거야? 눈치챈 사람?”
검선이 둘러봤다. 하지만 모두의 눈동자에는 의문만 차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바라보니 후공이 끌끌 혀를 찼다.
“하나같이 머저리 새끼들이네.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 밑에 있는 거다.”
실상은 대공자.
악인곡은 꾸며진 것.
나이도 어린 젊은 친구가 꾸지람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검선과 검존, 현음과 현이는 시무룩하기만 했다.
여태 겪어온 일이 있지 않나.
대공자는 보여준 것이 많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대공자가 머저리 새끼라고 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두 사람만은 실실 웃었다.
풍제와 당명이었다.
둘에겐 대공자가 아닌 대형.
더 심한 말이 나온다 해도 그저 듣기 좋을 뿐이었다.
“아까 내가 뭐라고 했냐! 왜 사람 말을 신경 써서 안 듣냐!”
“어…….”
“놈은 날 모른다. 내게 물었다. 누구냐고.”
“아!”
그제야 모두가 이해했다.
놈은 연능화의 기억 안에서 존재를 드러냈을 뿐이다. 보고 들을 수 있었지만 대공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후후, 그걸 놓쳤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막연한 공포에 질려 그 부분을 놓쳤다. 듣자마자 너무 놀라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놈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되는군.”
“우리 엽불이 대단할 것 없잖아.”
검존과 현음이 웃음을 흘렸다.
다들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전부는 아니었다.
웃음 아래 두려움은 짙어졌다.
아직일 뿐인 것이다.
엽불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깨어나지 않은 채로 이 정도. 하지만 천 년의 기한을 채우고 나온 엽불이라면…… 무섭다.
“방법은 하나로군.”
풍제의 말을 당명이 받았다.
“그래,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깨어나기 전 끝내버리면 그만이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엽불이 깨어나게 되면 곤란해진다. 뒷감당이 안 된다. 깨어나기 전에도 충분히 공포스러운 존재인 엽불이 아닌가.
그가 나아갔다는 길.
귀기(鬼氣).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일 공능이 경악스러울 것임은 분명했다.
“모두의 의식을 장악할 수도 있고…….”
“모두의 꿈에 나타날 수도 있을 테지.”
모두를 볼 수도 있을지도.
그때가 되면 엽불은 그 누굴 보더라도 더 이상 누구냐고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회영부주를 끝낸다.
각자가 그런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찾아갈 수는 없다.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
‘이제 회영일존이 올 차례인가?’
자리가 파한 후, 각자는 생각이 많아졌다.
풍제는 회영십존 중 마지막 남은 일존을 떠올리며 더디다고 느꼈다.
‘귀기…… 그건 무엇일까?’
검선과 검존등은 엽불의 공능을 떠올렸다.
천 년 전에도 경이로운 무위.
엽불의 사매인 연능화가 그 당시 천하제일인을 쉽게 제압했다고 했다.
엽불이 연능화보다 뛰어난 건 자명한 일.
그로부터 천 년이다.
천 년의 세월을 축적한 엽불이 깨어난다면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쓸려나갈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라도.
한편 당명은 미녀도를 떠올렸다.
‘미녀도의 남은 날은 구십 일.’
미녀도의 날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들었다.
‘대형이 다시 미녀도에 들어갈 수 있길…….’
당명의 소망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대형이 미녀도에 들어갈 수 있길 바랐다.
그 전에 엽불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대형이 미녀도에 다시 들어간다는 건 대형이 엽불을 끝내버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후공도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회영부주 주란.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물 속.
바다인지 깊은 강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이름은…….’
물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안에 한 소녀가 있었다.
알몸이었고, 나이는 열 살 남짓으로 보였다.
그녀는 가라앉지도 그렇다고 떠오르지도 않았다.
소녀의 긴 머리카락이 조금씩 흐느적대며 움직였을 뿐, 소녀는 미동도 없었다.
죽은 건가?
그건 아니었다.
긴 간격을 두고 한 번씩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소녀의 코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기에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물이 초록빛이 된 건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초록빛은 더 짙었다.
잊지 마.
잊어선 안 돼.
소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가끔 잊게 되는 것이다.
방심하면 이름을 잊을 때가 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천 년이다. 수많은 환혼을 거쳐왔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노파가 되기도 했고, 또 여러 번 소녀가 되기도 했다. 성장하여 숙녀가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남자의 몸이 된 적은 없었다. 기회는 있었다. 뛰어난 근골을 보았을 때. 소녀가 아닌 소년이 되어볼까 잠깐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잊어선 안 된다.
가끔 내가 누구인지 잊을 때가 있다.
이름을 잊을 때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결코 남자가 될 순 없다.
온전히, 언제나 여자여만 한다.
사형 때문이었다.
천 년의 약속이 아직 많이 남았을 때도 그녀는 과거처럼 사형의 사매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남자가 되면 결국 사형이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사형의 미움을 사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언제나 여인이었다.
이 몸도 괜찮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성장하면 된다.
그럼 힘을 갖추게 된다.
원래의 모습이 되기도 좋다.
순간 번쩍.
소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온통 초록빛.
강렬한 초록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나의 이름은 주란.’
두득, 두드득.
그녀에게서 옅게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주 미세했다.
곁에 누가 있었다 해도 듣지 못했을 정도.
그저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그와 함께 그녀의 체구는 조금 커졌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것처럼 얼굴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소녀는 웃었다.
흡족한 미소와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은 계속 되었다.
‘나의 이름은…… 나의 이름은…….’
이름을 떠올렸고, 회영십존을 떠올리기도 했다.
‘괜찮아. 모두 죽었지만…… 괜찮다. 나의 이름은 주란. 천 년의 약속이 다가오고 있으니…….’
스스스!
두 개의 백색 광채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저기 봐!”
“와아아, 유성이야!”
“유성이라고? 유성이 왜 수평으로 날아?”
“어라, 그러게?”
“사라졌다!”
“어디 간 거야?”
밤이 늦도록 놀던 아이들이 광채를 보며 기이하게 여겼다. 제대로 보지 못해서였다. 백색 광채가 실은 한 사람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라는 걸 알아볼 순 없었다.
너무 빠르기도 해서 그 사람이 매부리코라는 것도 알 수 없었고, 비쩍 마른 노인이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이 한 거대한 장원에 내려섰을 때, 그곳에 있는 이들은 한눈에 알아봤다.
“회영일존을 뵙습니다!”
모두가 부복하고, 그 목소리를 뛰쳐나온 이들도 급히 예를 갖췄다.
노인은 모두를 둘러본 다음 전각들도 살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추금자, 들어보자.”
중년 사내가 나섰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 하늘에서 시안조가 날아들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대로 둔 채 추금자가 입을 열었다.
“명정존과 제금존은 한참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던 차 지난밤 반양장으로 떠나셨습니다.”
“지난밤?”
“네.”
“쇄후존은?”
“동행하셨습니다.”
“하루가 지났군.”
“……네.”
추금자는 겨우 답했다.
하루가 지났다.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여전히 소식이 없다는 건 좋지 않다. 상대는 악인곡이다. 추풍낙엽처럼 십존부터 사존까지 쓸어버린 이들.
한데 쇄후존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하루인 것이다.
“잔당을 추적 중이신 건 아닐지…….”
“아니면 모두 죽었거나.”
회영일존의 눈이 차갑게 빛났기에 추금자를 비롯 모두는 몸을 움츠렸다.
일존은 특별한 존재.
같은 회영십존이라도 서열은 명백하다.
무위의 격차는 확연히 구분되고 십존, 구존과 일존을 비교한다면…… 그건 일존에게 실례일 정도.
또한 성품이 포악하기도 하니,
“크흑!”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 추금자는 머리가 잡혔다. 고통에 시달렸다. 머리에 구멍이 난 것처럼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맞았다.
회영일존의 다섯 손가락은 이미 추금자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너무 빨라 추금자의 인지가 늦었을 뿐이었다.
시안조가 구슬프게 울었다.
“조용히.”
일존의 말에 시안조는 즉시 울음을 그쳤다.
시안조의 몸통과 머리가 터져나가면서 깃털만 흩날리면 울음소리가 그치는 건 당연했다.
그 깃털들이 수백 개.
그 모든 깃털이 추금자를 향했다. 몸을 관통한 뒤 피를 머금어 붉게 변한 깃털들이 장원 내 모두를 향해 쏘아져 갔다.
“크아악!”
“크헉!”
“커허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몇은 겁에 질려 도주했다. 하지만 깃털이 더 빨랐다. 담을 넘다가 깃털에 뚫려 고꾸라졌고, 지붕으로 솟구쳤다가 목이 관통당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두가 전멸.
아니, 몇은 살았다.
시녀들과 하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행운은 가끔 찾아오나 보다.
그들이 두려움에 차 바라볼 때 회영일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반양장을 향해 나아가는 길.
회영일존이 웃었다.
‘재밌군.’
다시 두 줄기 유성이 되었다.
“저기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