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17화 (417/460)

417화. 회영일존

얼음.

사람은 가끔 얼음이 될 때가 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

혹은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을 때.

회영일존이 떠난 장원 안.

시녀들과 하인들은 어느 것에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굳이 답을 해보라면 세 번째였다.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니, 정확히는 예상이 빗나갔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한데 살아남았기에,

‘왜?’

‘왜……?’

모두를 쓸어버린 회영일존이 왜 자신들을 살려둔 것인가.

그럴 리 없었다.

이런 행운은 존재할 수 없었다.

꿈도 이런 꿈은 꾸지 않을 것이다.

잡힌 뒤로 모든 밤은 악몽이었다.

미래는 언제나 선명했다.

죽음. 결국 죽음. 벗어날 수 없었다.

‘한데 왜?’

아니겠지.

이제 곧 돌아오겠지.

깜박 잊었다면서.

겪은 바 회영일존이 가장 포악했다.

사람을 쉽게 죽였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웃으면서 죽였고, 무심히 죽였다.

그런 회영일존이니 곧 돌아올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은 비참함을 더해주기 위함이겠지.

단혼각을 상대하기 위해 떠났다고 했던가. 그래, 이제 돌아온 터라 잠시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들 얼어붙어 있었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기다려도 죽고, 도망쳐도 죽어. 하지만 그래도 난 시도는 해보고 죽겠어!”

중년 하인이 달려나갔다.

순간 뭔가가 날아들어 그의 목을 날려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날아들지 않았다. 그가 달려가는 소리만 멀어져갔다.

시녀들과 하인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들도 달려나갔다.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마!’

‘살고 싶어!’

‘제발, 제발! 오지 마!’

누구는 산으로 숨고, 누구는 민가로 스며들었다.

선량한 노파를 만난 시녀도 있었다.

하룻밤 묵어가라는 말에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이 선한 노파까지 죽게 될까 무서웠다.

잠들 수 없었다.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이불을 끌어안고 문만 바라봤다. 뭔가가 갑자기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부스럭.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이이…….

그곳엔…….

“밤에 목이 마를까 봐 물 한 그릇 떠왔구만. 어여 받아.”

노파였다.

시녀는 노파의 뒤를 바라봤다.

노파의 뒤에 검은 그림자.

“뒤, 뒤에…….”

노파가 뒤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 물 그릇을 놓칠 뻔했다.

노파가 웃었다.

“에구, 우리 황구. 언제 온 거냐? 깜짝 놀랐구나.”

왈왈!

누런 털의 개가 노파를 향해 다정하게 짖었다.

‘그래도…… 그래도…….’

찾아올 거야.

회영일존이…….

무령존이…….

다시 혼자가 되고도 시녀는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걱정할 건 없었다.

회영일존은 가고 있을 뿐.

이미 아득히 멀어졌고, 반양장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군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기도 했다.

- 악인곡을 확인하여라.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인지, 죽여야 할 자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죽이고 돌아오겠습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답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죽이고 돌아간다.’

어느샌가 반양장은 지척.

이 산에서 다시 세 개의 산을 넘으면 그 너머가 반양장.

다가온 첫 번째 산.

회영일존은 숲 위를 지나다 멈췄다.

‘감지.’

기운을 감지.

신형을 내려 기감을 확장했다.

‘하나…… 둘, 셋…….’

땅 아래에 하나.

멀리 좌측과 우측으로 또 다른 기운을 포착했다.

기운은 계속 감지되었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모두 여덟.

그러다 한순간 그 모든 기운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사람이 아니군.’

사람이라면 이렇게 감쪽같이 기운을 은폐할 수 있을 리 없다. 사람이라면 기운을 가라앉혔다 해도 숨결은 숨길 수 없다. 호흡을 참는다고 전부가 아니다. 몸속의 피는 흐르게 되어 있고, 그 소리는 크다.

‘무엇이지?’

그건 검령과 번쾌친.

그리고 풍제의 염혼들이었다.

신검들은 기운을 죽였고, 염혼들은 흩어졌다.

피는 애초에 있지도 않아 흐르지 않으니 회영일존의 짐작은 맞았다. 사람이 아니다.

회영일존은 더 나아가지 않았다.

숲을 딛고 섰다. 뻗어올라온 가느다란 나무 잎사귀를 딛고 고요히 서 있었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감지한 것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기운을 순식간에 감추었으니,

자신도 감지당했다.

기다리면 놈들이 온다.

아니나 다를까.

“클클클!”

“크하하하하하!”

“호오오~~ 호호호호호호!”

기괴한 웃음 소리가 먼저였다.

웃음 소리가 끝나기도 전,

흐릿한 형체가 일곱.

흐릿함이 가셨을 땐 전면에서 숲을 딛고 서 있었다.

기괴한 모습. 끔찍한 얼굴.

그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이는 꼽추.

회영일존이 꼽추를 바라볼 때, 들려왔다.

“혼자 왔냐?”

“명정존과 제금존은?”

대답은 않고 물어왔기에 화공신타가 폭발했다.

“혼자 왔냐고!”

“다 죽었나? 쇄금존까지?”

다시금 회영일존은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대답 안 하면 너도 죽어.”

“후후, 좋은 답이군.”

“대답 좀 하라고! 제발 좀!”

“혼자다.”

“이상한 새끼네. 그게 어렵냐! 그나저나 생각은 해봤냐?”

“너희와 회영부의 동맹?”

“불가.”

“왜? 우리가 새로운 회영십존이 되면 좋지 않나?”

회영일존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회영부와의 동맹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단혼각이라면 몰라도.

그것도 사실 희망은 없다.

주군께선 한줄기 기대를 품고 계신 듯하나, 대면하니 알게 된다.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놈들처럼 보인다.

외모가, 말투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럼 죽어야겠네?”

“후후, 죽여주마.”

서로가 비웃었다.

이내 모두가 일제히 기운을 일으키니 숲의 잎사귀들이 폭풍에 휘말리듯 나부꼈다.

그 사이로 화공신타의 입술이 열렸다.

“악인곡.”

우우우우우웅.

기운은 더욱 폭주.

“공격.”

그 명에 여섯 악인이 쇄도했다.

회영일존의 비웃음은 짙어졌다.

‘염능!’

그 의지에 휘날리던 수천수만 개의 잎사귀들이 강기를 머금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모습에서 질서를 갖추었고,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나는 새 떼와 같아졌다.

이내 폭사.

수천 개는 화공신타를 향해, 또 다른 수천 개는 빙심마희를 향해! 그렇게 각각의 수천 개의 잎사귀들이 악인곡을 향해 날아들었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빠르게 끝내주마!

그런 회영일존의 생각이 경악으로 바뀐 건 가히 찰나였다.

파바바바바박!

둔탁한 소리와 함께 꼽추의 눈 앞에서 수천 개의 잎사귀들이 멈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아지랑이에 갇혀 버둥거리고 있었기에 놀랐고,

카카카카캉!

사납게 생긴 여인 앞에는 거대한 얼음 벽이 떠올라 가로막혔다. 고작 빙벽일 뿐인데 뚫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 나가고 있었다.

다른 쪽도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사람이 부서져 내린다. 흩어진다. 조각조각 종이를 잘게 잘라 흩뿌린 듯 흩어져 잎사귀 사이를 뚫고 다가오고 기괴한 신법.

그 틈새로 수만 개의 금빛 암기가 폭사했기에 알 수 있었다.

‘만천화우?’

틀림없었다.

이는 사천당가의 만천화우다.

그러니,

‘악인곡이 아니다!’

뒤덮듯 다가오는 암기를 피해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치며 또 다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슈웅, 슈웅, 슝!

작은 소녀가 악마의 미소를 지은 채 얼음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우수를 뒤로 젖힌 모습으로 투명한 빙전(氷箭)이 쏘아져오니 또 알 수 있었다.

‘북해빙궁!’

방금 보았던 빙벽이 말해주고 있고, 이 얼음 화살이 말해주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들은…….’

두 개의 비검도 날아들었다. 둘 다 백색 광채를 발하고 있었지만 달랐다. 하나는 검에 태극이, 또 하나는 검에 매화가 피어 있었다. 목과 가슴을 꿰뚫을 듯 다가오는 검을 장력으로 떨쳐내는 와중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화산, 무당!’

그 순간 머리 위에 그림자.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새까만 주먹이 날아들었다.

호신강기가 흔들리면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지만,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두 눈.

넘실거리는 묵빛 연기로 인영.

사람이 아니다.

‘이, 이건…… 염혼!’

대대로 마교 교주만의 독문 절학.

‘풍제구나!’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이들은 악인곡이 아닌 실상 풍제의 무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명확해졌다.

죽었다던 검선과 검존.

두 명의 북해빙궁의 절세고수들.

풍제와 암향야.

그럼 꼽추는?

‘천화서고 대공자!’

자신은 어리석었고, 주군의 생각은 맞았다.

그런 자각에 이르렀기에 회영일존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연신 매서운 공격에 몇 번이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찾아오고 극통이 휘몰아쳤지만,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래, 기쁘다.

이들이 악인곡이 아니어서.

풍제와 천화서고 대공자가 죽은 것이 아니어서.

그리고 자신도 회영일존이 아니다.

회영부가 아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기운을 폭발시켜 모든 공세를 벗어나 멀리 물러났다.

“너 이 새끼, 웃어?”

화공신타가 미간을 찡그렸고, 악인곡도 각자 의아함을 드러냈다.

“너…… 봐달라는 거 아니지? 그런 말 하면 죽어.”

“저놈 좀 이상하지 않냐?”

“그렇긴 해. 회영일존 수준이 아닌데?”

“척 보면 몰라! 힘을 숨기고 있는 거잖아!”

“아, 그런가?”

그 말에 회영일존은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이, 그만 처 웃지?”

“너희가 악인곡이 아니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렇지 않나, 풍제?”

풍제를 바라봤지만 풍제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래서?”

격전이 시작되면 악인곡이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다.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 반응에도 회영일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는 검선, 또 그대는 검존이겠지. 그리고 너는 사천당가주 암향야일 테고.”

“난 왜 그대가 아니라 너냐!”

당명이 발끈했다.

그 말에 회영일존이 다시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속에 빙궁의 두 절세고수를 눈에 담았고, 이어 화공신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놀랍군. 그대가 천화서고 대공자라니.”

회영일존은 진심이었다.

놀랍게도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들의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건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소개가 늦었다. 여기 모두에게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마.”

“다시?”

모두의 시선이 회영일존에게 향했다.

회영일존의 입이 열렸다.

“나는 단혼각의 삼 호법 섬악. 최근 회영일존인 무령존과 환혼했다.”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에 섬악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들이라면 괜찮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주군의 혜안은 가히 따를 수 없다.

말한 건 화공신타.

섬악이 갸웃했다.

“그래서라니?”

“너의 말을 어떻게 믿지?”

“믿게 해주지. 원하는 걸 말해봐라.”

“무공 폐쇄.”

“클클, 이야기는 너의 단전을 부순 뒤에 하자.”

“그, 그게 무슨…….”

“싫어? 싫으면 죽든가.”

화공신타가 클클거렸다.

눈까지 희번덕거리니 단혼각 삼 호법 섬악은 주춤 물러났다.

‘진짜 미친놈인가?’

그건 착각.

후공은 늘 확인할 뿐.

쉽게 믿지 않을 뿐.

“클클클…….”

후공이 웃으니 악인곡이 호응했다.

“하하하, 단전 부숴!”

“기경팔맥을 모조리 잘라주마!”

“크하하하하, 단혼각이 뭐라고! 부숴! 부숴!”

“호오오오오~~ 호호호호호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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