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19화 (419/460)

419화. 악인곡의 신입.

화공신타의 모습으로 후공이 웃었다.

남은 건 한 번의 죽음.

‘남은 건 마지막 확인.’

찾아온 건 회영일존이 아니다.

구 할 가량은 후공도 그리 믿고 있었다. 분명 단혼각 삼 호법이 틀림없을 것이다. 더 이상의 의심은 어쩌면 쓸데없는 것일지도.

그래도 후공은 더 두드려보고 싶었다.

돌다리도 다 제각각이다.

낮은 높이의 돌다리라면 두드림은 한 번이면 족하다. 무너진다 해도 기회가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돌다리는 회영부.

천 년 전의 절세고수.

가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 무너진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러니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단혼각에 대해선 대강의 그림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단혼각주가 회영부주 주란의 제자라는 것.

회영부를 끝내려 한다는 것.

단혼각주의 의도는 과연 순수한가? 과연 선인가? 만약 선을 위장하고 있다면?

아직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단혼각이 회영부를 멸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한다면…….

그러니 최후의 최후까지 확인.

최종 확인은 풍제의 섭혼을 통해서.

현경의 고수에게 섭혼이 통하려면 조건은 단순하다. 상대는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야 하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면 더 좋다.

“대공자, 이쯤이면 된 것 같군.”

삼 호법 섬악의 말이 끝났을 때, 후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섬악이 ‘이쯤’이라는 기준을 멋대로 정해서는 아니었다.

한순간 마음에,

쏴아아아…….

바다가 흘렀기 때문.

어둠 속의 바다였고, 잔잔한 물결이었다.

마음이 급격히 가라앉고 차분해졌다.

마음에 밤이 찾아왔다.

아니, 내가 밤이 된 건가.

스스로 세상의 고요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현상이었지만, 후공이 이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운이 좋군.’

이는 오행의 정화 중 수극(水極)의 증폭이었다. 마음에 거대한 물결이 흐르며 순식간에 수극이 이주를 돌파했다. 방금 전의 자극이 원인. 자극은 언제나 옳다. 수(水)의 거대한 물결이 마음에 넘실거리면서 온 마음이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다.

바다의 깊이도 느낄 수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심해에 있는 것 같았고, 마음은 적막해졌다. 내면의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공자, 그대는 꼭 아홉 번을 채울 셈인가! 어, 어찌하여 그런 눈을 하고 보는 것인가!”

어느샌가 후공의 눈은 흰자위 없이 온통 검게 물들어 있던 터. 수극이 이주를 돌파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후공은 수극의 물결을 정돈했다.

눈동자는 다시금 본래대로 돌아왔고,

“클클클, 외워라.”

“난 악인곡주. 화공신타.”

“그, 그러니까…….”

“닥쳐라!”

섬악은 말을 맺지 못했다.

이미 신타의 모습으로 대공자가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세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기에,

‘염능(念能). 구계(九界)!’

섬악은 자신이 펼쳐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 염능은 모든 물체를 임의로 조정하는 절기.

쩌저적, 쩌적!

주변의 나무들이 뜯겨나가면서 수천 개로 파편화되어 쏘아졌다. 그 하나하나에 강기가 실려 있었고 촘촘했다.

‘넓군.’

하지만 후공에게 그 간격은 넓었다.

느려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사이를 뚫고 나아가며 유영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빛?’

그 모습이 섬악에겐 빛으로 보였다.

화공신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 줄기 빛덩어리가 휘어지고 틀어지면서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탓!

신형을 튕겨 뒤로 물러나면서 우수로 땅을 가리켰다.

쿠쿠쿵!

지면이 폭발하듯 일어서면서 작은 흙 알갱이들이 떠올랐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염능, 폭!’

닿으면 폭발한다.

닿는 순간 그 주변의 알갱이들도 연쇄적으로 달라붙어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곳으로 후공이 나아갔다.

닿았다. 닿은 순간 이미 후공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후공의 감상은,

‘후후, 괴이하군.’

수만 개의 흙 알갱이가 전신에 달라붙었고, 열기가 증폭되더니 한순간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땐,

‘화신(火身)!’

화극의 주인에게 불길과 폭발 따위가 의미 있을 리가.

화극삼주의 정점에 도달한 화신이 운용된 순간,

콰콰쾅! 콰쾅!

수차례 폭발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아! 어?”

섬악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탄식을 토해냈다가 이내 의문을 발했다.

불기둥 때문이었다.

불기둥이 저렇게 치솟을 순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고, 불길은 작아야 했다.

타올라 순식간에 재가 되어야 마땅하거늘…….

그에 답하듯 하늘로 치솟았던 불기둥이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한 사람의 크기 정도로 작아져 다가왔다.

그 불길 안에 보이는 건 꼽추.

등을 구부리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는 화공신타.

그 모습에 섬악이 질려버려 주춤 물러날 때, 어느샌가 성큼 손이 뻗어왔다.

반쯤 넋이 나갔어도 호신강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은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마치 물에 손가락을 담근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닿았다.

닿은 곳은 가슴 부위의 마혈.

섬악은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고, 마음도 굳어갔다.

궁금하게 여겼던 의문 중 하나가 풀린 순간이기도 했다.

왜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가?

그렇게 물었었는데, 답을 들은 것과 같았다.

그 앞에서 후공이 입술을 달싹였다.

“후후, 아홉 번째 죽음. 이번엔 진짜일지도?”

“대, 대공…… 아니, 화공신타…….”

겁에 질린 눈동자.

그리고 대공자라 부르려다 화공신타로 고쳐부른 모습에 후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착하네.”

“서, 선한 초대였네. 이럴 것 없네.”

“이제 알아봐야지.”

“어, 어떻게 말인가?”

그 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신타, 이제 구겨버리자고!”

“그래, 그게 좋겠어. 제대로 쓴맛을 보여주자!”

“곡주, 먼저 파묻는 건 어떠냐!”

어느샌가 무위를 회복한 일행들이 주위에 다가와 있었다. 검선과 현음은 구겨버리자고 말했고, 당명은 꽤 화가 났는지 파묻자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진심이겠는가. 모두들 강호의 명숙이고, 어리석은 이들이 아니다.

후공은 그저 웃음만 흘렸다.

교릉? 생매장?

눈앞에 있는 이는 단혼각주의 초대장.

좋은 초대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초대장을 구겨버릴 수는 없다. 고통이 심하기도 하고.

“서, 설마…… 무공을 폐하는 건 아니겠지?”

섬악이 더듬거렸다.

솔직히 자신의 대처가 과한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구겨버린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의미가 무공을 폐한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답은,

“후후, 미안하다만 정답.”

“나의 무공을 폐한다고? 그럴 순 없다!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이냐!”

일갈한 후공이 우수를 들어올렸다.

어느샌가 손가락 끝에 떠오른 건 능오침.

백색 광채를 발하는 능오침에 천람을 입힌 후, 섬악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흐읍!”

능오침이 몸 속으로 파고드니 다섯 줄기 기괴한 흐름에 섬악이 몸을 덜덜 떨었다.

혈관을 따라 퍼져간다. 이내 하강.

멈춘 건 단전 주위.

“제발…… 제발…….”

단전이 벌집이 될 것 같아 섬악이 빌었다.

무공을 익힌 자에게 있어 단전이 깨지는 건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아홉 번째 죽음이란 것이…….

하지만 다섯 줄기 기운은 단전 주위에 멈춰 있을 뿐. 능오침의 틈새를 천람이 메꿔갔다.

그렇게 단전을 봉쇄했다.

물은 흘러야 하고 기운도 마찬가지.

기경팔맥을 흐르는 기운은 단전을 거쳐야 비로소 그 흐름이 온전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전이 물샐 틈 없이 봉쇄되면서 전신 경맥의 기운도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스러짐이 섬악에게는 무공이 전폐되는 과정으로 느껴져, 입술을 부들부들 떨다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우냐?”

“꼴좋다. 거지 새끼!”

거지도 아닌데 왜 거지 새끼라고 부르는가.

이자들이 과연 정파의 기둥들이 맞긴 한 것인가.

그런 항변도 섬악은 할 수 없었다.

슬픔이 더 큰 탓이었다.

기운은 점점 더 옅어져갔다.

섬악이 느꼈고, 여전히 섬악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후공도 느낄 수 있었다.

‘현경의 예…… 화경의 극…….’

조금 더, 조금 더.

“그래도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하하하, 아무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어디냐!”

역용도 풀려 악인곡의 모습도 아니면서 검선과 검존이 악인처럼 떠들어댔다.

뚝, 뚝.

섬악의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경지도 빠르게 낮아졌다.

‘화경의 중…… 화경의 예…….’

그리고 이내,

‘진경의 극………… 진경의 예.’

다시 그 아래로 향하며 거의 소실.

섬악의 눈빛은 완연히 안광을 잃었고, 짧은 시간임에도 피부는 푸석해졌다.

이쯤이며 되었기에,

- 풍제, 네 차례다.

대형의 전음에 풍제가 나섰다.

“나를 봐라.”

섬악이 눈을 들어 마주했을 땐,

쩌어엉!

섬악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나는 너의 주인. 너는 누구냐?”

“단혼각의 삼 호법 섬악. 섬악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들어보자. 나를 찾아온 이유는?”

“모셔오라는 단혼각주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악인곡인데도?”

“악인이면 죽여라. 그런 단서가 붙었습니다.”

“단혼각주에 대해 들어보자.”

“그는…… 아니, 그녀는…… 단예령. 그렇게…… 들었습니다.”

“회영부주와의 관계는?”

“그녀는 회영부주의…… 제자. 첫 번째 제자…… 그렇게…… 들었습니다.”

“단예령이 스승을 대적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옳지 않은 길. 나아가서는 안 되는 길. 멈춰야 하는 길…….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말은 잘못되었다!”

풍제의 마령안이 강렬해졌다.

그럼에도 섬악의 몽롱함은 짙어져 그저 느리게 눈을 한차례 깜박일 뿐이었다.

“환혼이 잘못된 길이란 의지와 첫 번째 제자라는 사실은 양립할 수 없다.”

첫 번째 제자이니 단예령도 거의 천 년.

환혼이 없이 그 세월을 지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가능합니다. 가능합니다.”

섬악은 옅게 미소까지 피어냈다.

“대부분의 환혼은…… 회영부의 인물……. 그 외의 환혼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 말에는 풍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후공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풍제의 시선이 후공 쪽으로 향했다.

즉시 후공이 전음을 발했다.

- 조금 더. 자세히.

이후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단혼각의 규모와 장소. 그리고 단혼각주의 현재 외모와 공능까지 질문은 세밀했고,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섬악이 눈을 떴을 땐, 손을 들어 햇살을 가려야 했다.

‘아침인가? 한데 여기는?’

커다란 바위 위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주변을 둘러보다 화들짝 놀랐다.

“너, 너희는?”

어느샌가 모두 악인곡의 모습.

누군가는 두 다리를 뻗은 채 앉아있었고, 누군가는 옆으로 드러누워 바라보고 있었다.

“깼냐?”

“어휴, 오래도 잔다.”

놀란 섬악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내력이…… 나의 무공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모든 내공이 소실되었거늘, 그대로였다.

“회복된 건가? 너희가 다시 날 회복해준 것인가?”

“당연한 소리를 하네.”

“시, 시간은?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냐?”

“반 년.”

절망한 것도 잠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는 농담이란 걸 깨달았다.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대체 어떤 수단을 쓴 것인가.

얼떨떨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악인곡이 몸을 일으켰다.

“영차, 이제 가자.”

“너도 악인곡이야.”

“내가?”

영문 모를 소리에 갸웃하던 섬악이 다가온 화공신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샌가 자신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흉측하게. 못생기게.

의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노출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

자신은 초대하러 온 입장이니 일단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그럼 앞으로 내 별호는 태악(太惡)이라 하겠다.”

그 말에 악인곡이 저마다 혀를 끌끌 찼다.

“에휴, 멍청한 새끼. 별호가 무슨…….”

“거지같은 별호네.”

“아주 그냥 악악(惡惡)이라고 하지?”

그 말에 악인곡 신입은 시무룩해졌다.

“가자!”

화공신타가 신형을 날리니 모두가 뒤따랐다.

신입은 갸웃.

‘이놈들 또 어디로 가는 거지?’

단혼각이었지만, 위치를 말한 적이 없는 신입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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