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20화 (420/460)

420화. 전음을 읽다. 멀리 보다.

악인곡은 빠르게 움직였다.

방향은 북쪽.

목적지는 단혼각이었다.

감숙성 북단을 돌파, 북쪽으로 나아가면서 대기의 기온은 시시각각 낮아졌다.

서늘해지는 공기에도 추위를 느끼는 이는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춥네.’

단혼각 삼 호법 섬악만은 추워졌다.

나아가는 방향이 어떻게 된 게 단혼각 쪽인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추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흡혈악.

섬악이 곁을 달리는 검선을 향해 전음을 발했다.

검선이라고 부르지 않은 건 그렇게 부르면 지랄을 했기 때문이었다. 지랄 이후에는 대꾸조차 없고 뭘 물어도 침묵이 따라오니 얌전히 악인곡의 호칭으로 불렀다.

검선이 피식 웃었다.

- 우리 악악이로구나.

- 어…… 악악이 아니라 태악이다만.

- 악악이야!

섬악은 핼쑥해졌다.

화산파의 검선이 원래 이런 자였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더 주장하진 않았다.

악악이면 어떻고 태악이면 어떤가. 괜한 걸로 다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 흡혈악, 말해 다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 얼음 호수.

- 뭐?

섬악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 얼음 호수라니?

- 물고기 잡으러 가는 거야.

- 헛소리!

헛소리다. 뭔 갑자기 물고기인가.

무엇보다 얼음 호수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단혼각의 본거지를 칭할 때 사용하는 말인 것이다.

-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 후후, 당연하지.

- ……!

태연한 대답에 섬악은 그제야 답을 찾았다.

- 너희는 내게…… 섭혼술을 펼친 것이로구나.

무공을 폐쇄한다고 하더니 일시적이었나 보다. 일시적으로 경지를 떨어뜨린 후 그 상태에서 마교 교주 풍제의 섭혼. 그 결과 고스란히 모든 걸 실토한 것이 틀림없었다.

- 보기보다 똑똑하네.

검선이 비로소 시인하니 섬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사이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까발려졌다 싶으니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이들의 치밀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 아니, 정확히는 악인곡주의 치밀함이라고 해야겠지.

천화서고 대공자!

괜히 화가 나 섬악은 꼽추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꼽추가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전음과 함께였다.

- 똑똑하네.

섬악이 미간을 좁혔다.

꼽추가 된 대공자의 웃음이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것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검선과 똑같이 말한 것이다.

마치 검선과 자신이 나눈 전음을 대공자가 내내 듣고 있었던 것 같지 않는가.

‘아니겠지. 그래…… 그럴 리 없다. 전음을 들을 수 있을 리가.’

- 신타, 갑자기 뭔 소리냐?

- 개소리다.

섬악이 땀을 삐질거렸다.

젠장, 이게 무슨 대화인가.

난 대체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맥락도 없이 똑똑하다고 했다가 개소리라고 했다가 중구난방.

‘그렇겠지. 내가 예민했던 것이겠지.’

똑똑하다는 전음은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였던 것이 틀림없다. 어쩌다 얻어걸린 말에 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우스워 섬악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예민한 것이 아니다.

섬악의 짐작이 맞았다.

후공은 검선과 섬악이 나눈 전음을 모두 듣고 있었다.

이제 타인의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오행 중 수극의 급격한 성취가 원인이었고, 거기에 금극이 호응하면서 흐르는 기에 간섭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전음은 기의 흐름으로 이동.

기운에 소리를 담아 전한다.

이제 후공은 그 기운의 흐름이 보였고, 그 흐름을 포착해 개입하면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풍제와 당명이 나누고 있는 전음.

현음과 현이신녀가 주고받는 대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 사저, 저는 단혼각주가 너무 궁금해요.

- 현음, 나도 같은 마음이다. 사부의 잘못된 길을 막기 위해 천 년을 따라오다니, 실로 놀라운 인물이야.

- 맞아요. 그리고 그녀가 불쌍하기도 해요.

- 그렇지. 나의 세월이 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이니. 우리가 단혼각주의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위로가 될 거예요.

고스란히 들렸다.

그럼에도 현음과 현이는 자신들의 대화를 누군가가 듣고 있을 것이라곤 짐작조차 못 했다.

‘후후, 도둑이 된 것 같군.’

그야말로 소리 도둑이었기에 후공은 내심 미소 지었다. 오행의 극은 각각 묘용을 지니고 있는데, 또 그 하나하나가 상호 작용하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끌어내니 기이한 한편으로 더 큰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성취는 또 있었다.

[주인님, 지금 뭘 훔치신 거여요?]

‘대단한 것을 훔쳤지.’’

[뭘 훔치셨는데요?]

‘마음.’

[까르르르르, 그런 게 어딨어요! 까르르르르르! 어엇?]

‘앞을 봐야지.’

색관조는 색관조이면서도 시안조가 되었다.

색관조가 보는 걸 후공은 볼 수 있었고, 색관조가 듣는 건 후공도 들을 수 있었다.

지난날 태언장에서 추혼자를 통해 얻어낸 공법을 생각보다 더 빠르게 이루어냈다. 더 발전시키기도 했다. 오행의 정화 중 넷을 품게 되면서 의식은 크게 확장되었고, 색관조와의 연대는 깊어진 터.

지금 색관조는 부근에 없었다.

멀리 서남쪽 하늘을 날고 있었다.

감숙성 너머 신강 부근이었다.

까불며 웃다가 앞쪽을 날던 새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한 모습을 후공은 색관조의 시야를 통해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그윽, 그윽!]

금섬도 신기해했다.

아득히 멀리 있는데도 색관조가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 있는 것이다.

[그윽, 그으으윽?]

[뭐? 시안조냐고? 난 색관조라고, 멍청아! 내 눈을 봐!]

시안조와의 연계와 다른 점.

그리고 더 발전된 점은 범위가 더 넓다는 것뿐 아니라 색관조의 눈동자 색이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본래의 공법에서 운용자와 시안조가 연결될 때 시안조의 노란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었는데, 색관조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영롱한 푸른 눈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그건 후공도 같았다.

운용하는 이의 눈동자가 하얗게 물드는 현상이 후공에겐 없었다.

[어? 주인님! 방금 들으셨을까요?]

색관조의 말에 후공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옅게 신음 소리가 들렸고, 웃음 소리도 들렸다.

‘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봐라.’

[넵! 금섬아, 검령아, 가자!]

금섬이 극극거렸고, 이어짐이 어디까지 유지되는지 파악하기 위해 땅속에서 동행하던 검령도 방향을 틀었다.

“어…… 어…… 어어어…….”

후공이 들었던 건 신음 소리가 아니었다.

여인이 말하는 소리였다.

삼십 대 후반의 여인이었고, 그녀는 선천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어…… 어어……. 어어어어!”

여인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손을 비벼대며 빌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어린 딸도 같았다. 이제 열두 살인 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지 못했기에,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조그마한 모옥 안.

두 모녀는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눈물은 하염없이 떨어졌다.

갑자기 찾아온 재앙은 너무 무서웠고, 왜 이런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건지 어머니와 어린 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흐흐, 말을 해야지. 으어어, 하면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으어어, 어어어어!”

모녀의 앞.

중년 사내가 비수를 들고 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어어어, 어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

어머니가 딸을 품에 감싸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딸은 살려주고, 죽일 거면 자신만 죽이라고 말했다.

중년 사내가 낄낄거렸다.

“널 죽이라고? 싫은데? 난 네 딸을 먼저 죽이고 싶은데?”

“으어어어어엉…….”

어머니가 비명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말은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었기에 그녀는 몸을 떨며 눈을 쥐어짜듯 감았다 떴다.

나만. 나만 죽여요! 제발!

어머니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그 뜻을 중년 사내가 오해했다.

“흐흐, 이유?”

사내의 웃음에 그의 뺨에 길게 이어진 칼자국이 휘어졌다.

“사람을 죽이는데 이유가 있나. 그냥 오늘 사람을 죽이고 싶었어. 그냥 누구 하나 죽이고 싶었던 거야. 그런 날 있잖아. 에잇, 오늘 사람 하나 죽일까? 뭐 그런 날 말이야. 근데 너희를 만난 거지. 근데 둘이나 있네? 그러니 너무 좋아. 너무 기분 좋은 날이야. 흐흐흐흐…….”

중년 사내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기에 어머니는 다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를 잘 내지 못한다.

소리를 낸다 해도 부근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적한 산골짜기에 작은 모옥.

말은 못하지만 그저 딸아이와 함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날을 맞이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 좀 울어.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네. 어쨌든 슬슬 시작해보자고.”

그러면서 비수를 들어 딸의 몸을 건드렸다.

“여기. 여기. 여기.”

팔목과 배, 그리고 목이었다.

“후후, 이렇게 찌르면 아마도 말문이 트일지도.”

“으어어엉, 으허허허헝.”

딸이 겁에 질렸고, 어머니는 딸을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어느 곳도 찔리지 않게. 자신만 찔릴게.

“같잖아 죽겠군. 그런다고 못 찌를까 봐?”

중년 사내가 손을 뻗어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으려 할 때였다.

[거 더럽게 시끄럽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중년 사내의 손이 멈췄다.

바깥이었고, 목소리가 특이했다.

쇠와 쇠를 부딪치는 것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내 꿈속인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냐?]

중년 사내는 피식했다.

꿈속이라니…….

“별 미친놈이.”

사내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여기다. 여기!]

다시 들려온 소리에 사내가 방향을 잡고 달려갔다.

숲으로 들어갔다. 바로 마주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냐! 숨어 있지 말고…….”

사내의 말은 거기까지.

순간 발밑에서 자줏빛 광채가 튀어나온 걸 본 순간, 두 팔이 떨어져 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양팔에서 미친 듯이 피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검령이 머뭇거리지 않고 다리를 쓸어갔다. 두 다리를 잃은 사내가 나뒹굴었다.

피가 뿜어지고 비명은 더 커졌다.

그렇게 피와 비명이 누가 더 크냐를 다퉜다.

그리고 후공은,

‘꿈이 너무 시끄럽군.’

이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그저 악몽이길 원했다.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꿈이다.

후공이 그렇게 말했고, 색관조가 그 말을 따라 했다.

[꿈이 너무 시끄럽군.]

‘악몽인 게지.’

[악몽인 게지.]

‘밤이 길 것 같아.’

[밤이 길 것 같은걸.]

그 말에 검령이 호응했다.

다시금 날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대는 사내의 목을 스치듯 지나쳤다.

목이 갈라졌지만 옅었다.

딩장 죽지 않을 정도였다.

사내에겐 꿈이 아니어야 한다. 사내는 끄억, 끄억, 옅은 신음만 내뱉었다.

검령이 선회하면서 피를 털어냈다.

쩌어어엉!

이내 자줏빛 광채와 함께 모옥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까지도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떨고 있던 모녀는, 번뜩이는 자줏빛 광채가 눈앞에 나타났다가 검의 형태로 둥실 떠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어…… 어어?”

검이 혼자 허공에 떠 있는 건 본 적이 없었고, 또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꿈이라서 그렇다.’

[꿈이라서 그렇다.]

후공이 말했고, 그걸 색관조가 전달했다.

하지만 모녀에겐 검이 목소리의 박자에 맞춰 한 번씩 빛을 번쩍이니 마치 검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의 꿈일까, 그대들의 꿈일까.’

[나의 꿈일까, 그대들의 꿈일까.]

‘뭐 상관없겠지. 꿈은 꿈일 뿐. 이대로 푹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

[뭐 상관없겠지. 꿈은 꿈일 뿐. 이대로 푹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

모녀는 연신 눈을 깜박였다.

정말 꿈인 걸까?

방금까지 겁박하던 사내는 보이지 않고, 검이 말을 하고 있으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 그럼 깊이 잠들어볼까?]

모녀가 갸웃할 때, 검이 자줏빛 광채가 되어 날아왔다.

모녀가 동시에 고개를 떨구며 잠들었다.

검령이 스치듯 어머니와 딸의 수혈을 점했기 때문이었다.

‘꿈이야. 그저 꿈. 나쁜 꿈.’

[꿈이야. 그저 꿈. 나쁜 꿈.]

주인의 말을 따라 하며 색관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색관조의 등에서 금섬이 내렸고, 둘은 바빠졌다.

[서둘러. 꿈이어야 해.]

[그으으으으으으윽!]

할 일이 많았다.

금섬은 천 조각을 들고 방 안에 남은 사내의 발자국을 지웠고, 바깥의 흔적도 지워나갔다.

색관조는 모녀를 똑바로 눕혔다.

이불까지 찾아 모녀에게 덮어 주었다.

[까르르르르, 완벽해!]

[죽었겠지? 이제 묻으러 가자.]

이날의 일은 꿈이다.

꿈이어야 했기에, 중년 사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도록 색관조가 다시 모옥을 벗어났다.

검령도 작별 인사를 고하듯 소리 내며 빠져나갔다.

‘이상한 꿈도 다 있네. 검이 말을 했어.’

‘엄마……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잠든 모녀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모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악몽이지만 괜찮아.

엄마의 냄새가 나.

딸이 내 품에 있어.

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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