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호수 아래, 더 아래.
호수 중앙.
섬악이 멈췄다. 손을 아래로 향했다.
검결지를 맺어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스스슥.
갈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손가락을 위로 향하자, 잘려나간 원통형의 얼음이 뽑혀 나왔다.
얼음은 두꺼웠다. 거의 어른의 키 높이 정도.
섬악이 소매를 떨쳐내 두꺼운 얼음층을 산산조각냈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지켜보는 모두에겐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 상태로 섬악은 잠시 기다렸다.
시선은 얼음 구멍으로 향했다.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섬악의 귓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 허허, 삼 호법! 악인곡이 실은 풍제의 무리였던 겁니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음은 얼음 호수 아래에서 뻗어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호수 아래에선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다. 호수와 호수 주변에 진법이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악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삼 호법, 놀랍구려. 반갑기도 하고. 길을 열도록 하지.
그 전음을 들은 후, 섬악이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주의 사항을 알려드리리다. 이제 곧 이 수면으로 푸른빛이 나타날 것이오. 빛은 호수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고 곧은 것만은 아니라오. 그러니 길을 유도하는 푸른빛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오. 만약 빛을 벗어나게 되면…….”
섬악이 말을 멈췄다.
풍제와 대공자를 비롯한 모두의 태도가 문제였다. 이젠 악인곡의 모습이 아니니 껄렁한 태도나 빈정거리는 웃음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누구 할 것 없이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모습.
암향야의 경우는 아예 귀를 후비고 있었기에,
‘시ㅂ…….’
섬악은 내심 욕을 내뱉었다.
풍제의 섭혼.
섭혼에 당했을 때, 자신은 단혼각에 진입하는 과정과 방식까지 모두 술술 토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일 리가.
대체 어디까지 말한 건가.
이내 도려낸 구멍에 푸른 광휘가 맺혔다.
“갑시다.”
섬악이 먼저 호수로 뛰어들었고, 한 사람씩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은 후공이었다. 눈 높이에 떠 있는 색관조와 금섬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한 차례씩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눈싸움하고 있어라.”
[까르르르르르르르, 내가 이겨요!]
[그으윽, 그으으으으윽!]
서로 이긴다고 난리.
피식 웃은 후공은 주변을 한차례 둘러봤다.
호수의 삼면이 설산(雪山).
하지만 후공의 눈에는 단지 눈 덮인 산으로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선이 어지럽게 정렬해 있는 모습으로도 보였다. 진법이 펼쳐져 있음이고, 호수와도 호응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 저기는 내려앉지 마라.”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주인님, 왜요?]
“너무 멋져.”
[까르르르르르르, 그럼 절대 안 가야지! 멋진 곳은 주인님과 함께 가야 하니까!]
색관조가 날아올랐다.
주인의 말하는 방식을 모를까.
색관조도 알고 금섬도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위험한 곳이야.’
‘그으윽.’
그리고 눈싸움도 해야겠지만 주변을 경계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후공은 이내 호수로 뛰어들었다.
옷이 젖는 일은 없었다. 저절로 일어난 호신강기가 물을 밀어낸 탓이었다.
푸른 빛은 아래로 이어졌다가 이내 곡선으로 휘어졌다. 빛의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후공은 빛 너머에 있는 여러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붉고 하얀 줄무늬, 하얗고 검은 줄무늬.
작고 귀엽게 생긴 물고기들이었다. 물고기들도 신기한지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어종이었다.
열대 지역에서나 볼 법한 물고기들.
그러니 이는 실체가 아니다.
눈을 속이는 진법의 묘용.
섬악을 통해 들었던 건 빛의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확인해 보자.
빛의 통로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낚아채려 한 순간, 물고기가 하얀빛으로 변해 손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변화는 한 마리의 물고기만은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물고기들이 빛이 되어 손을 관통하려는 듯 짓쳐들었다.
어느 것은 튕기고 어느 것은 스치며 굴절되었다. 손에 둔탁한 타격감이 전해져 왔다. 환명과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손은 이미 갈가리 찢겨 사라지고 없어졌을 터.
후공은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빛은 다시금 온순한 열대어가 되었다.
언제 그랬냐 싶게 귀엽게 눈을 깜박이기까지 하니, 후공으로선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후후, 재밌군.’
단혼각주는 열대어를 좋아하나 보다.
언젠가 열대어를 보았나 보다.
그렇게 수중을 한참이나 이동했다. 푸른빛은 휘어지고 굽이치면서 길게 이어졌기에 시간이 걸렸다. 긴 여정처럼 느껴졌지만 깊은 수심까지 내려간 건 아니었다.
수심은 삼십여 장(약 70미터) 정도.
그렇게 이어져가던 푸른빛은 수중의 동굴로 이어졌다.
동굴로 들어가기 전,
후공의 시선이 잠시 아래쪽으로 향했다.
이내 갸웃.
‘누구?’
사람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아득한 어둠만 보일 뿐이었다.
자령안을 일으켜 바라봤지만 어둠을 헤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깊은 어둠에서 기운이 한 번씩 뻗어 온다.
후공은 느낄 수 있었다.
진법의 묘용? 아니다. 단발적이고 규칙이 없었기에 진법의 묘용이라 보기 어려웠다.
사람이다.
누군가 호수 아래에서 내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후공은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자신이 느끼는 걸 단혼각주가 모를까.
그런 마음으로 수중 동굴로 진입했다.
동굴을 따라 다시 한참이나 나아가며 일행을 따라잡았다. 동굴을 지나쳐 나왔다. 수심은 다시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수심이 낮아지면서 인도하는 푸른빛은 위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시오, 삼 호법!”
“하하하, 모두 반갑소이다. 악인곡의 진면목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단혼각의 환대였다.
기다린 이들은 열둘.
그 너머로 여러 전각들이 보였고, 잘 가꿔진 화단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도.
거짓말처럼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고, 새가 날았다.
저 하늘만큼은 진법의 환상.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지만 호수 밑바닥에서 맑은 하늘을 보게 되는 건 신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감탄도 잠시,
당명이 내심 혀를 찼다.
- 쯧쯧, 무림맹주와 마교 교주가 왔거늘…….
- 후후.
- 후후후…….
후공과 풍제가 웃음을 흘렸다.
맞이한 이들 중에 단혼각주는 없는 것이다.
다시 둘러봐도 단혼각주는 없었다.
단혼각주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
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가득하다고 했는데, 마중 나온 이들 중에 노파는 없었다.
대신 후공은 두 사람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한 사람은 노인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넉넉한 체형의 중년인으로 대머리였다.
그들의 외모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라면 찰나간 드러났던 두 사람의 기운이었다.
‘환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가 이내 정상으로 돌아온 상황.
정기신의 합일이 미세하게 틀어지고 다시 합일되는 것으로 보이니, 최근에 환혼되었다고 봐야 했다.
아마 열흘 전이라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뭐……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겠지.’
이곳은 단혼각.
환혼을 다루는 건 회영부만이 아니다.
이내 쉴 거처로 안내되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 안내했다.
통통한 체형에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괜히 포근함이 느껴지는 모습에 후공은 웃음이 났다.
‘후후, 우리 빙빙을 닮았네.’
“각주께선?”
풍제 일행에게 쉴 거처를 안내하게 한 후, 삼 호법 섬악은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가장 궁금한 건 각주의 행방이었다.
각주의 평소 성품을 볼 때 반드시 맞이하러 나와 계시리라 예상했는데 뵐 수 없었기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빙석으로 가셨소이다. 이틀 전이라오.”
탄성과 함께 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석(氷石)이라면 안심이었다.
호수의 가장 깊은 곳.
각주가 열망하는 것 중 하나.
빙석을 취하러 가신 것이라면 이틀이 아니라 사흘, 나흘이어도 걱정할 건 없었다.
수심을 떨쳐낸 섬악이 다시 물었다.
“양 호법과 목 호법께선 언제 돌아오셨소이까?”
“우린 어제 돌아왔소.”
“느낌이 좋지 않아 회영부 주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오.”
양 호법은 노인.
목 호법은 넉넉한 체형의 중년인으로 대머리.
두 사람의 음성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섬악은 이해했다.
두 사람이 살피러 간 곳이 회영부다.
각각 단혼각의 일 호법과 이 호법으로 무위가 뛰어나다지만, 회영부 주변을 오래 탐지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보다 섬 호법, 이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어찌 된 일이오? 악인곡이 악인곡이 아니었다니……. 크게 놀랐소이다. 그들을 어찌 설득하였소?”
“그게…… 설득당했다오.”
멋쩍게 웃은 섬악이 그동안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고, 두 호법은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잠깐. 화공신타, 아니 천화서고 대공자가 내공을 잃지 않았단 말이오?”
“허허, 어찌 그런 일이…….”
“흐음,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오.”
섬악은 은근히 거드름까지 피우며 말을 이어갔다.
호되게 당한 일임에도 왜 신이 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런 탓에 놓치기도 했다.
양 호법과 목 호법의 감탄하는 눈매 너머 깊숙한 곳에서 한 번씩 번뜩이는 악의를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겪은 놀라운 경험을 말하기 바빴다.
“한데 기이한 건 천화서고 대공자라오.”
“또 기이한 것이 있소이까?”
양 호법이 물었고, 목 호법도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의 무공이 경이롭고 악인곡의 수장 역할을 한 거도 놀라운데, 무엇이 또 놀랍고 기이하다는 말이오?”
섬악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볼 땐…… 대공자는 역할만 맡은 것 같지 않아 보였소.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모두가 대공자를 따르더이다.”
“허허,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려.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엄연히 강호의 배분이 있거늘, 어찌 그 젊은 친구가 모두를 아우른다는 말이오.”
“아니라오. 대공자는 진정으로 그 무리의 지도자였고, 모두가 대공자를 따른다오.”
양 호법과 목 호법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허허……. 농담은 아닌 듯하오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로 대면해 보고 싶어지는구려.”
그런 대화의 이면에 두 사람의 전음이 오갔다.
- 대공자가 요주의 인물이었다니, 의외로군.
- 어차피 상관 있나?
- 후후, 하긴.
두 사람의 악의가 전음으로 흘렀다.
어차피 모두 죽는다.
모두 죽인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 될 터였다.
회영부의 두 암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뀐 건 회영일존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 후공은 여인에게 묻고 있었다.
“소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최근 한 달 사이에 단혼각 내에서 환혼된 인물이 섬 호법 외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