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파멸의 진.
대화는 조금 더 이어졌다.
의미 없었다.
겉돌았다.
이미 서로가 확인을 끝낸 터.
하고 싶은 말도, 더 묻고 싶은 말도 없었다.
진정한 대화는 수면 아래 흐르는 전음이었다.
- 드디어 오늘. 지독히도 긴 악연을 끝낼 수 있겠군.
- 후후, 후공이 없다면야.
- 후후후, 몰살.
백암주와 흑암주는 희열로 들떴다.
오늘 단혼각을 날려버린다.
자신들의 손으로.
반면 일행은 달랐다.
상대를 확인했다 하여 기뻐할 수 없었다.
‘오늘?’
‘어떻게?’
대공자가 상대의 전음을 들려주고 있다.
전해오는 전음을 듣고 있자니 근심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다. 검선이 그랬고, 검존이 그랬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음신녀와 현이신녀도 마찬가지.
어찌 대공자가 전음을 탈취할 수 있는가는 논외. 여태 본 바가 있고, 겪지 않았던가.
함께하는 중에도 대공자의 무위는 하루하루 나아졌다.
각자가 처음 마주했을 때와 지금의 대공자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니 의문에 집중했다.
의문은 하나.
‘고작 둘이?’
환혼되기 전 이들은 대체 누구였길래?
아니, 누구라 한들 두 사람만으로는 무리다.
- 이들은 무엇을 준비해둔 것인가?
- 분명 뭔가 있을 듯하오.
검선과 검존이 전음을 교환했다.
- 사저, 인질극을 벌일 셈일까요?
- 단혼각을 상대로? 사매, 그건 한계가 있다. 모두를 몰살시킬 수는 없어. 또한 단혼각은 희생을 감수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 사저의 말이 옳아요.
듣고 보니 옳다. 현음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단혼각의 명맥이 거의 천 년이다. 작은 희생에 뜻을 굽혔다면 이미 오래전에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럼 뭘까?’
누구는 기대감에 취하고, 또 누구는 의문이 커져만 갔다.
영문을 모르고 있는 건 삼 호법 섬악뿐.
혼자만 전음 없이 말하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면 어쩔 수 없는 일.
“허허, 그럼 쉬고 계십시오. 내일쯤엔 각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외다. 양 호법, 목 호법. 가십시다.”
그가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이 돌아가는 길.
그중 두 사람에겐 두 줄기 향기가 따라붙었다.
곧 향기는 둘을 휘감았다.
맡을 수 없는 향이었고, 느낄 수도 없는 향이었다.
하지만 길게 이어졌다.
그 향선(香線)이 천화서고 대공자와 이어졌지만 둘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문득 돌아본 건 향이 묻지 않은 섬악이었다.
돌아본 시선에 들어온 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대공자의 전음이었다.
‘은밀히?’
섬악이 돌아왔다.
다시 일행과 둘러앉은 가운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허허…… 암향야. 빙석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어련히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외다.”
너털거렸지만 그 아래 전음은 달랐다.
- 그대들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표정도 달랐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고 두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양 호법과 목 호법이 환혼되었다니?
“우습군. 우리가 훔치기라도 할까 두려운 것인가?”
“허허, 그런 뜻이 아니란 건 아시지 않소이까.”
- 난데없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 그대의 모습은 지금 누구의 모습이지?
- 회영일존. 하지만 양 호법과 목 호법은…….
- 둘이 나누는 전음을 들었다.
그 말에는 섬악의 눈이 커졌다.
- 암향야, 그대가 말이오?
- 아니. 대공자.
- 그, 그게 무슨?
전음의 방식은 다양하다.
화경에 이르면서부터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전음을 발할 수 있고, 현경에 도달한 이는 전음을 전달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하지만 타인의 전음을 듣는다는 건 무리.
그걸 천화서고 대공자가 해낼 수 있다니, 섬악은 이 말도 터무니없어 괜한 시비로 들렸다.
- 대공자.
- 말씀하십시오.
- 사실인가? 증명할 수 있나?
- 증명해 보이죠.
- 좋네.
섬악이 눈을 감았다.
말도 안 된다. 그럴 순 없다.
짐작할 수조차 없는 말을 하자.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는 말이어야 했다.
이내 눈을 뜬 그는 무당의 검존에게만 전음을 발했다.
즉시 검존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입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모습에 섬악이 대공자를 바라볼 때, 들려왔다.
- 섬 호법, 미쳤습니까?
- 말해보게.
- 삐약삐약.
섬악이 전음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발한 건 병아리 울음소리. 정확히 들려왔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 검존이 알려준 게로군.
- 연 소저를 불러보십시오.
이윽고 연교교가 들어섰다.
교교에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섬악이 전음을 발했다.
- 교교, 전음으로 답하거라. 비가 내리니 운치가 좋구나.
- 네? 비가 와요? 어디에요?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들려왔다.
- 섬 호법, 이곳에 비는 내리고 있지 않지만, 운치가 좋은 건 맞습니다.
- 허…….
섬악이 망연자실했다.
이쯤이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환혼된 자는 무엇으로도 가려낼 수 없는 일.
환혼한 몸의 기억을 흡수한 뒤에는 더욱더 불가능한 일.
하지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마음처럼 울려 나오는 전음을 들었다면.
애써 자신을 설득하는 절차까지 밟았으니 이들은 최선을 다해 예의도 지킨 셈이기도 했다.
- 대, 대공자……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나?
이해하였기에 몸이 떨려왔다.
단혼각이 몰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차올랐다.
- 현재까진 둘. 호수 위에 회영부는 없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무리입니다. 또한 인질을 잡는 건 하책. 모두의 마음에 슬픔을 드리울 수 있겠지만 몰살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 맞는 말이네.
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에도 그 둘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 짐작 가는 부분이 있나?
독?
섬악은 독을 떠올렸다가 떨쳐냈다.
독의 대가인 암향야가 있고, 마교 교주인 풍제도 있다. 무엇보다 어쭙잖은 독은 현경의 고수에게 통하지 않는가.
심지어 대공자는 단혼각의 산공독조차 어찌할 수 없었다.
- 자넨 답을 알고 있겠지?
- 없습니다.
- 답은 삼 호법께서 찾아보십시오.
- ………….
- 우리도 찾겠습니다.
섬악의 동공이 흔들렸다.
선제 공격을 하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대공자와 풍제 등이 그걸 몰라서 이러겠는가.
이미 준비가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둘을 죽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둘을 죽인다는 건 잠시의 통쾌함만 선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이지? 무엇이 준비된 건가?’
떠올려야 해.
각주는 부재중.
그리고 오늘이다.
오늘!
아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섬악이 단혼각의 칠 명주에게 은밀히 접촉해 상황을 전하고 의논할 때,
후공은 밖을 천천히 거닐었다.
‘주인님, 개미 한 마리 볼 수가 없어요!’
‘여긴 개미가 못 살지.’
‘까르르르르르르! 아, 웃겨!’
색관조와는 계속 연결하고 있었기에 후공도 밖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위험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무엇을 준비해둔 건가?
문득 지면을 바라보다 친을 발출했다.
소맷자락에서 자줏빛 광채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후공은 곧 회수했다.
땅을 탐지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땅속에도 여러 진법의 틀이 촘촘히 펼쳐져 있어, 지면 아래에서 무언가를 도모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쑥 떠올랐다.
‘설마 진법…….’
과거 귀곡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후공, 맹을 날려버리는 진법도 설치해둘까요? 최후의 최후에 적과 동귀어진하는 진법이 있다면 나름 통쾌한 결말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전혀 통쾌하지 않아! 그냥 최후의 최후가 오기 전에 다 죽이면 그만이다.’
‘……네.’
귀곡자는 바로 시무룩해졌다.
천재들은 이런 게 문제다.
괴상한 데 꽂혀 쓸데없이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
그땐 귀곡자를 타박했고, 그땐 맞았다.
하지만 단혼각이라면?
회영부의 공세에 동귀어진할 진법을 마련해 두었다면?
단혼각주라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잠입한 두 놈의 자신감이 이해된다.
외부의 조력자가 없는 것도.
환혼한 몸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호수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릴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면, 그것을 발현한다면…….
확인해보자.
이내 후공은 의식을 퍼뜨렸다.
안력도 돋워 주변을 살폈다.
주변 풍광은 달라지고 또 달라졌다.
여기. 수많은 진법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풍광과 함께 수많은 선과 기이한 도형을 볼 수 있었다. 기운의 흐름을 읽어가면서 범항의 지식이 진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호진.’
화단의 길.
전각과 전각 사이.
그리고 진법의 환상인 하늘도,
본래 이 두뇌는 불세출의 천재.
다섯 살 때 이미 자신만의 진법을 만든 천재.
후공의 의식이 보고, 두뇌가 분석했다.
‘경계…… 흑암…… 분리, 분리, 분리…….’
진법들은 연계되기도 하고, 따로 작용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파괴의 진법을 찾을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도 경계와 흑암, 분리였다.
세밀한 작용까진 알 수 없지만 모든 진법이 파멸이 아닌 희망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어느 한 곳이 무너져도 다른 곳은 도리어 보호된다.
도리어 경계선이 떠오르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럼 뭐지?’
그때 천향의 선이 반응을 보였다.
두 놈 중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후공은 먼 곳을 보는 듯 천향의 선으로 위치를 가늠했다.
갸웃해졌다.
작은 동혈. 이미 살핀 곳이었다.
갸웃해진 이유라면 진법의 조화로 볼 때 전혀 위협적인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무언가 시작된다 해도.
백암주는 비고로 들어섰다.
동혈을 나아가며 막다른 곳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진법을 해제했다.
그르르릉.
석문이 열리며 더 나아갔다.
멈춘 건 석벽 앞이었다.
그곳엔 정십육면체의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도형의 면마다 붉은 구슬이 박혀 있어 그 빛으로 인해 백암주의 얼굴도 붉게 번졌다.
‘후후, 오래전 일이지. 오래전 일이야.’
그가 도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붉은 구슬을 향해서였다. 위쪽에 있는 붉은 구슬 세 개를 뽑아 옮겼다. 면이 아닌 모서리로.
‘단혼각주, 파멸의 진을 만들어둔 너의 실수다.’
파멸의 진.
호수 전체가 날아간다. 호수 주변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산과도 연계되어 폭발한다.
그 기억이 이 몸에 남아 있었다.
단혼각의 일 호법에겐 전해졌다.
일 호법은 그런 막중함을 어깨에 지고 있었다.
그러니 운이 좋다.
일 호법과 환혼된 것이 일을 쉽게 만든 것이다.
진법의 발동은 일각 후.
그 전에 빠져나간다.
일각이 짧다 하나 호수를 벗어나기엔 충분한 시간.
그렇게 백암주가 몸을 돌릴 때였다.
쿠릉, 쿠르르르르르릉.
지축이 흔들렸다. 그 여파로 천장과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벌써?’
예상보다 빨랐다.
흐르는 건 돌가루만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에도 전조가 일어났다. 빛이 흐른다. 일곱 광채 무지개가 줄기줄기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는 순간 신형을 날렸다.
진법을 연거푸 해제하면서 나아갈 때 광채는 더 진해졌다. 이제 땅에도 일곱 광채가 흘렀고, 뒤섞이더니 허공에도 빛이 사방에서 쏘아져 왔다.
그저 빛일 뿐!
비고의 입구에 도착했을 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쿠르르르르릉, 쿠르르르르릉!
지면의 흔들림이 극심해졌고, 일곱 광채는 이제 백색 광채로 변했다.
입구를 막 벗어났다가 멈췄다.
빙글. 세상이 돌았다. 하늘이 아래로, 땅은 위로.
보이는 모든 것이 뒤집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한순간,
쩌어어어엉!
기음과 함께 눈부신 백색 광채에 백암주가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건…… 뭐지?”
사방에 자신이 있었다.
사방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바닥에도 천장에도.
나아갈 순 없었다.
선 곳은 거울의 방.
정십육면체의 거울이 사방에서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파멸의 진이라고?”
한쪽 면의 거울에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볼 때였다.
거울이 일그러져 갔다.
일그러짐이 사라졌을 때 거울에 비친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대는?”
거울이 물었다.
거울 속의 노파가 물었다.
다른 이들도 같았다.
모두가 정십육면체의 거울에 갇혀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자신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노파를 보았다.
“천마신교의 교주. 풍혼마제. 악인곡일 땐 혈종마군.”
풍제가 답했다.
“사천당가주. 암향야라고들 하지.”
당명이 그 물음에 답했다.
검선과 검존도 답했다.
현음과 현이신녀도 십육면체에 떠오른 노파에게 답했다.
삼 호법 섬악은 다른 물음을 듣고 있었다.
“섬악, 설명해 보아라.”
그리고 후공도 거울 속 노파를 마주했다.
다른 이를 대할 때와는 달리 노파는 웃고 있었다.
“반갑군요. 천화서고 대공자.”
“반갑습니다. 단혼각주.”
십육면체의 각 면에 떠오른 노파의 웃음이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