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호수 아래에 미래가.
노파는 단혼각주.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보는 그녀는 단순히 미소만 머금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공자의 명성은 축소되었군.’
놀라움도 느끼고 있었다.
펼쳐진 진법은 칠광동경환묘진(七光銅鏡環妙陣).
파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실상은 경계를 나누고 모두를 분리시키는 진.
여러 묘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 결과가 모든 것의 파멸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공자, 이 아이는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방을 가로지르는 빛이 거울이 되면서 그녀는 반사된 모습을 통해 모두를 보았던 터.
그중 단연 돋보인 것이 대공자.
모두가 놀라고 주춤하고 당황했다.
단혼각의 인사들은 물론이고 풍제도 암향야, 검선과 검존 등은 기운을 일으켜 거울을 깨뜨리려 장력을 발출하기도 했다.
거울은 출렁일 뿐 부서지지 않아 당혹스러움은 더 커졌다.
태연한 건 오직 천화서고 대공자뿐.
그리고 일행이 진정한 건 대공자의 입술이 달싹인 다음이었다.
그가 전음으로 일행을 안심시켰으니 사전에 진법의 묘용을 간파하고 있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공자, 그대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기쁘군요.”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했답니다.
이어지는 말은 마음으로만 되뇌었다.
후공도 같은 마음.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같은 시간.
백암주를 바라보는 단혼각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진법의 묘용과 결합하여 그녀는 동일한 시간에 각각 의식을 분리하여 대응하고 있었다.
백암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단혼각주, 답해주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의 죽어가는 두 눈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 들려주마.”
진법 따위.
그저 신비할 뿐이다.
부순다.
백암주는 우수에 기운을 모았다. 검푸른빛이 이글거리듯 맺힌 순간 그대로 전면의 거울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산악을 부수는 기운에,
촤아아아아아앙!
‘성공!’
거울이 깨어져 산산히 부서졌기에 백암주는 내심 쾌재를 외쳤다. 깨져나간 수백, 수천 개의 거울 조각이 비산한다. 그 각각의 조각마다 단혼각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조각에는 온전히, 어떤 조각에는 두 눈이, 어떤 조각에는 옆얼굴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제히 조각난 거울의 모습이 변했다.
입이 보인다. 또 변해 눈이 보인다.
웃는 입, 웃는 눈.
‘응?’
거울 조각 속 단혼각주가 웃고 있었다.
의문을 표한 순간 수천 개의 거울 조각이 쏟아져 왔다.
즉각 강기를 발출해 떨쳐내려 했지만 관통해온다.
호신강기도 그대로 지나친 거울 조각들이 머리로 날아들어 틀어박혔다.
그 즉시 백암주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나, 나는…….”
생기를 잃은 채 눈앞의 거울을 바라봤다. 분명 그의 손에 깨어져나갔는데 거울은 그대로였다. 그 거울에 전혀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초류환…….”
먼 옛날 보았던 얼굴.
잊고 있었는데, 실은 잊지 않았나 보다.
초류환. 미간의 주름. 콧잔등의 점.
그가 처음 환혼할 때 빼앗은 몸이었다.
이내 거울 안 중년인이 사라졌다.
이번엔 청년.
“나는…… 석명.”
두 번째 환혼한 몸.
준수한 외모가 마음에 들었던 몸이었다.
모습은 계속 바뀌어갔다.
십 대 소년, 오십 대 중반의 남자, 노인이 되기도 했다.
“나는 강효, 나는 소연청, 나는…… 고봉.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나타나고 바뀌어가는 이들은 그가 지금까지 환혼으로 빼앗은 이들.
섭혼의 묘가 진법을 통해 발현되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있었다. 거울에 나타난 건 자신의 기억이 투영된 결과물. 머리에 박힌 수천의 거울 조각이 마음을 비춘 결과였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잊은 적이 없었지. 나는 좌교. 그것이 나의 이름. 칠백 년 전 십대 고수 중 하나. 그리고 회영부의 백암주.”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음침한 노인의 모습.
본래의 그였고, 칠백 년 전의 모습이기도 했다.
“좌교, 이제 잊어라. 영원히.”
“으으으…….”
백암주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면…… 온몸이.
심장도 혈맥도 터져나갈 듯 부풀었다.
눈도 튀어나올 것 같아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틀어박힌 거울조각이 온 몸을 휘돈다.
그러던 한순간.
거울 조각이 폭약처럼 터졌다.
파앙, 파아앙, 파아아아앙!
연기가 피어나듯 그의 몸이 터져나갔다.
또 같은 시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흑암주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
주마등처럼 지나온 세월, 자신이 거쳐온 모습들을 바라본 후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런 다음 함께 자리했다.
단혼각주와 섬악이 나란히 앉았고, 일행이 빙 둘러앉았다.
후공은 대강 상황을 알 것 같았다.
회영부의 잠입은 성공이었으나 회심의 일격은 실패.
진법을 통해 단혼각을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진법의 발현은 환혼한 몸의 기억과 달랐다. 전혀 엉뚱한 결과로 나타났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다.
애초에 거짓된 내용.
단혼각주는 최측근 수하를 속였다.
그건 함께하고 있는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결과가 말하고 있지 않는가.
단혼각주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실로 철두철미하다.
언제든, 누구든 환혼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본 건 아닐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런 의문에,
“기억의 주머니.”
단혼각주가 답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암시를 통해 진실된 기억에 한 겹 거짓을 둘러놓았지요. 환혼을 당하기 전에는 스스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혼 후에는 다릅니다. 정기신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진실된 기억을 끄집어내려면 반년의 시간이 흘러야 해요.”
모든 기억이 이렇게 되는 건 아니었다.
분리와 경계의 진이라는 기억에만 파멸의 진이라는 거짓 정보를 한 겹 덮어둔 것.
만약 환혼된다면,
몸을 빼앗긴다면,
잘못된 기억이 먼저 떠오를 테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둔 것이었다.
“허허…….”
“각주, 속고 속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회영부와 단혼각의 전쟁은 무려 천 년.
천 년 강호의 음지에서 이 둘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해온 것인가.
단혼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왔군요. 끝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 말에 누구 할 것 없이 이채를 발했다.
“각주, 방법을 찾았습니까?”
단혼각주는 대답 대신 한 사람을 바라봤다.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대공자가 두 가지를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첫째는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고…….”
미래를 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만일 누군가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후공은 뚱하니 바라보았을 것이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건 자신 있다.
하지만 그 미래가 타인의 미래라면 장담할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런데 단혼각주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공자, 그는 미래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대는 그를 깨울 수 있을 것 같군요.”
자신이 아닌, 누군가는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단혼각의 수중 입구.
들어섰던 곳에 두 사람이 섰다.
말을 하면서도 단혼각주의 시선은 물에 닿아 있었다.
후공의 시선도 깊어졌다.
단혼각주가 말한 ‘그’는 예지의 공능을 지닌 자.
칠백 년 전의 인물.
이름은 서우.
호수 깊은 곳 빙석(氷石)에 갇혀 있다.
그런 설명을 단혼각주에게 들었기에 후공도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이미 오행을 이룬 각주께서 하지 못한 일을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기의 흐름을 읽었고, 오행의 감응을 통해 후공은 이미 단혼각주가 오행을 이루었다는 것을 파악한 터.
그녀의 오행은 조화롭고도 균형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공자, 그대와 내가 오행을 이룬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행지(五行芝)라는 영초를 통해 이루었기에 깊이에 있어 부족합니다. 그저 오행의 조화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대는 비록 오행의 전부를 이루진 못하였어도 그 하나하나의 기운이 왕성하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녀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었다.
빙석을 녹이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예지자를 깨운다.
그녀는 결전에 나서기 전 그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떤 결과를 보게 될 것인지.
“서우라는 분을 빙석에 가둔 건 누구입니까?”
“그 시대 북해빙궁의 장로. 나의 친구. 그녀는 서우를 남겨두고 싶어 했어요.”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서우가 자신은 수백 년 뒤에 깨어날 운명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지요. 그 시기가 놀랍게도…….”
“지금이군요.”
후공의 말에 단혼각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깨우는 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공자였나 봅니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 예지는 틀리게 된다.
단혼각주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간절한 눈빛을 하고 그대에게 두 손을 빌어보겠습니다.”
천 년 선배가 이렇듯 소탈할 수 있는 것인가.
후공으로서도 더는 거부하기 힘들었다. 또 단혼각주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녀의 겸손함이, 그녀의 언행 하나하나가.
거기까지 생각할 때, 후공은 번뜩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각주,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려 한 적은 있군요.”
“언제입니까?”
“괴물 같은 천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천재가 강호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때.”
“찾아올 겨를이 없었나 보군요.”
“맞아요. 한데 왜 그런 질문을?”
“원래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면 이런 식으로 어디서 만난 적이 없냐고 묻는답니다.”
단혼각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노파다.
아름다운 미녀가 아니다.
대공자가 추파를 던질 이유도 없고, 그럴 만한 공간도 아니다.
‘천재여서겠지. 분위기를 편하게 하려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후공은 아니었다.
착각인가?
왜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은지 모를 일.
“대공자, 따라오세요.”
단혼각주가 물에 몸을 던졌고, 후공이 뒤따랐다.
호수 밑으로 빠르게 하강하면서 급격히 주위가 어두워졌다.
- 각주, 괴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무섭습니다.
- 후후, 괴물은 우리겠지요.
- 하하하!
대화가 거듭되면서 단혼각주의 유쾌함이 드러났다.
천 년의 시간.
사부를 대적할 수밖에 없던 제자.
유쾌함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 세월을 버틸 수 없었으리라.
- 대공자, 곧 당도해요.
- 보입니다.
‘부디 그를 꺼낼 수 있길.’
단혼각주가 마음 가득 염원했고,
후공은 보고 있었다.
까마득히 깊은 호수 밑.
그 바닥에 거대한 얼음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 노인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얼어붙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