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26화 (426/460)

426화. 자줏빛 광채를 지닌 이……. 그는.

후공은 빙석(氷石) 앞에 이르렀다.

손을 가져가 만져 보았다.

차가운 한기를 그대로 느꼈다.

칠백 년의 세월.

얼음은 조금도 녹지 않은 듯하다.

‘살아 있을까?’

현이신녀는 빙벽 안에서 칠십 년을 보냈는데, 이자는 칠백 년.

어느 쪽이 더 대단한가.

아무래도 칠십 년이 칠백 년을 이기는 건 무리로 보인다.

하지만 인내의 측면에선 현이신녀 쪽이다.

그녀는 내내 깨어 있었으니.

- 시작하겠습니다.

- 부탁해요.

후공이 화극삼주를 일으켰다.

순간 붉은빛이 주변 일대를 물들였다.

화극의 극의인 만화(滿火)의 발현에 단혼각주도 붉게 물들었다.

‘?’

어떤 작용이지? 단혼각주는 마음이 들끓었다.

감정이 격앙되고 식욕도 일었다.

이건 뭐지?

왜 나의 감정이?

불길이 마음에도 치솟는다고?

그녀가 이룬 오행은 오행초를 통해서.

하지만 후공의 화극은 용암을 통해 축적된 것.

극의가 다르다.

그리고 화극의 극의는 마음까지 불태운다.

불같은 마음이 되고 분노가 들끓는다.

그건 어떤 종류의 열정이요, 열망이었다.

단혼각주로선 잊고 있던 감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공자가 피워낸 광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광채들이 피어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대공자의 손에서 푸른 불길이 일었다.

대공자의 눈에서는 자줏빛 광채가 폭주했다.

수온은 급격히 상승했다.

대공자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는 대체 얼마나 강렬한가. 수온은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펄펄 끓고 있었다. 열탕에 들어와 있는 느낌. 아니, 그 이상이다.

‘아…….’

단혼각주는 내심 탄성을 터뜨렸다.

뜨거움을 견디기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빙석이 미세하게 녹아내리고 있음을 확인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공자의 불타는 듯한 자줏빛 안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바라보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과거가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자줏빛 광채…….’

칠백 년 전.

자신의 친구.

북해빙궁의 한요선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우가 말하더군. 회영부와의 전쟁은 지금 끝나지 않을 거라고. 먼 훗날, 천 년이 채워질 즈음 끝날 것이라고 하더군.’

그땐 믿지 않았다.

자신도 부상을 당했지만 회영부주도 부상을 당한 상태.

그래도 끝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끝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지. 나도 끝내고 싶고. 하지만 단혼각주, 나는 서우를 믿고 있어. 그렇기에 그를 얼음 호수 아래 봉인했다네.’

안 돼!

그 말에 크게 소리쳤다.

칠백 년을 보내야 하다니!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태 서우의 예지는 정확히 맞기도 했지만 두루뭉술한 부분도 많았다. 또 먼 미래는 흐릿하기도 했다.

그 두루뭉술함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요선자는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변수가 생긴다면 좋겠군. 삶에 변수야 있기 마련이니.’

서우가 무슨 말을 남겼지?

그는 자신이 언제 깨어난다고 했지?

한요선자가 답했다.

‘칠백 년 후.’

‘만약 그전에 내가 깨운다면?’

‘그럼 그의 예지는 틀린 것이 되겠지. 서우는 자신을 깨우는 자가 두 줄기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지만…… 어떻게 될지……. 서우가 말하길 그자는…….’

현실로 돌아온 단혼각주는 대공자를 바라봤다.

대공자의 두 눈에서 자줏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단혼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서우의 말대로다.

서우가 본 건 천화서고 대공자.

단혼각주는 마음이 흔들려 멈춘 호흡을 토해냈다. 그녀의 입과 코에서 보글보글 공기 방울이 뿜어져 나왔다.

그때 대공자가 시선을 돌렸다.

폭사하는 자줏빛 광채 아래 입 모양이 미소 짓고 있었다.

- 각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곧 끝납니다.

단혼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끝난다는 말은 틀림없었다.

어느샌가 서우를 감싼 얼음층은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줄어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얇아졌다.

하지만 일부의 얼음층은 남겨둔 채로 후공은 손의 염화를 거둬들였다.

얇은 얼음에 둘러싸인 서우를 들어올렸다.

- 대공자, 그대가…… 해냈군요.

- 응원 덕분입니다. 올라가시죠.

후공은 서우를 안고 빠르게 위쪽으로 올라갔다.

단혼각주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 녹이지 않고 얼음층을 남겨둔 이유라면 이해된다.

다 녹이면 서우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

완전한 해동은 물을 벗어난 뒤에 이루는 것이 옳다.

대공자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빙석이 이렇듯 간단히 녹는 것이었나?

그리고 자줏빛 광채의 주인.

서우가 보았다는 미래.

단혼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모두 나의 탓이다. 나의 탓이다…….’

서우는 완전히 얼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깨어난 건 아니었다.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몸은 굳어 있고, 혈류는 천천히 흐른다. 뜨거움보단 안온한 기운으로 유도하며 풀어주어야 했다.

그걸 도운 건 풍제와 당명 등이었다.

둘러앉아 추궁과혈로 몸을 풀어주고, 혈류의 흐름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의식이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왔다.

“당 가주, 의식을 찾으면 원신단을 사용하십시오.”

예지자가 최상의 상태를 찾길 바랐다.

당명은 냉랭히 고개만 끄덕였다.

- 대형, 우리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 쓸데없어도 된다. 사람 하나 살린 셈 치자.

- 후후, 네.

예지? 미래를 본다고?

당명도 큰 기대는 없었다.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렇게 일행에게 맡겨 둔 후공은 처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연공을 하기도 하고, 밤이 되어 단혼각주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단혼각주는 다정함을 보였다.

다정함 아래 조금은 슬픔이 엿보이는 것 같았고, 미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괜찮습니다. 각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후공은 마음으로만 답해 주었다.

연교교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째가 되었다.

그때도 연교교는 찾아왔다.

차를 내려놓으며 교교가 감사의 말을 건넸다.

“대공자님, 이제야 말씀드려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줍은 미소가 함께였다.

감사할 일이 많다.

대공자는 환혼으로 잠입한 회영부의 두 암주를 가장 먼저 파악한 이.

처음 만났을 때 대공자가 했던 질문의 의미를 나중에 가서야 이해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각주님의 염원 중 하나도 대공자가 해결했다.

대공자가 빙석을 녹일 줄이야.

그러니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해도 부족하다.

“연 소저.”

연교교의 눈이 커졌다.

대공자가 뚱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연교교가 의아해할 때, 들려왔다.

“감사의 말을 이렇게 늦게 해도 되는 겁니까?”

“아……. 그게 아니라…… 하려고 할 때마다 연공 중이시고 각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하시니……. 죄송해요.”

“크흠, 앞으로는 감사는 무조건 빠르게. 아껴두지 말고 신속하게 해주십시오. 언제 그 말을 하시나 조마조마했습니다.”

교교는 나지막이 대답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마음으론 크게 웃었다.

하하, 조마조마했다니!

점잖은 말보다 이렇게 이야기해 주니 허물이 사라지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뭐 어쨌든 차는 잘 마시겠습니다. 제가 단숨에 들이켜…… 앗, 뜨거!”

대공자가 허둥대며 찻잔을 입에서 떼는 모습에 교교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대는 빙석을 녹인 이.

극양의 불을 다루는 이.

절대로 뜨거울 리 없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마치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 연교교를 후공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리가 취미.

특기도 취미라고 했다.

숙수가 꿈이라고도 했다.

‘네가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왔으면 좋겠다.’

언젠가 큰 반점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 연교교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공이 입으로 꺼낸 말은 달랐다.

“재밌습니까? 에잇, 전 그만 나가봐야겠습니다.”

연교교가 다시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땐 이미 대공자가 사라지고 없었기에 눈만 더 커졌다.

교교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으으으……. 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

억지로 참는 듯한 신음 소리.

하지만 결국 터져버린 소리.

대공자는 이미 들으셨구나.

‘깨어났어!’

서우가 깨어났다.

비명 같은 소리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원신단.

회복 후 원신단을 복용하면서 일거에 기운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잠력이 격발되면서 경맥은 확장되고 혈류가 미칠 듯이 빨라졌다.

일식경이 지나서야 진정되었다.

한번 확장된 경맥은 그대로.

그 결과 그는 칠백 년 전 본래의 경지에서 칠 할 가량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짐작건대 화경의 중.

그리고 들었다.

“요란하구만.”

“그렇게까지 소리를 꼭 지를 건 아닌데 너무 지르네.”

당명과 검선이 타박.

서우가 주변을 돌아봤다.

여러 사람이 보였다.

노인들과 여인들. 한 여인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한 여인은 귀여운 여자 아이었다.

노파도 있었다.

서생 차림의 청년도.

하지만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지? 누가 날 깨웠지? 자줏빛 광채의 주인은? 그리고 단혼각주는?’

나선 건 단혼각주였다.

“서우, 오랜만에 보는군.”

“칠백 년 만인가?”

서우의 눈이 커졌다.

처음 보는 노파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칠백 년 만이라면 노파가 누구인지 모를 수 없다.

“단혼……각주!”

모습은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건 당연한 일.

칠백 년 전에는 이 모습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었다.

대체 몇 번의 환혼을 거쳤을까.

단혼각주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서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의 예지는 절반이 맞고, 절반은 틀렸나 봅니다. 각주께서 저를 깨우셨으니 말입니다.”

“아니. 내가 아니다.”

서우가 갸웃할 때, 단혼각주가 손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너를 깨운 건 여기 이분이다.”

“어……?”

서우가 멍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그가 본 자신의 미래는 자줏빛 광채를 뿜어내는 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체형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누구인지는 느껴졌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있었다.

“그대가……? 정녕 그대가 해낸 것인가?”

서우가 물었다.

그 물음에 후공이 답했다.

“겨우 해낼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라 불리고 있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

서우는 멍해졌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었다.

예지 속에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체형도 보지 못했지만,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 각주, 어떻게 된 겁니까? 그가 혹시 자줏빛 광채를 발하였습니까? 그걸 보았습니까?

- 보았다. 그래서 나도 많이 놀랐다.

단혼각주가 담담히 답했다.

하지만 서우는 결코 담담할 수 없었다.

- 각주, 저를 구한 건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입니다. 저 청년일 수 없습니다.

- 맞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천하제일인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후공이지만, 환혼되었다.

서우가 멍해졌고,

단혼각주는 한숨과 함께 전음을 이었다.

- 이는 모두 나의 탓이다. 나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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