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33화 (433/460)

433화. 나는 주란. 사형을 기다려요.

회영부를 향해 나아가는 길.

일행의 움직임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길을 걷는 사람들도.

곁을 지나쳐도 그저 돌풍이 불었다고 생각했다.

‘뭔 바람이…….’

보지 못한 것이 나았다.

보았다면 놀랐을 테니. 한동안 꿈에서도 나타났을 테니.

누구 할 것 없이 흉악하고, 한 사람은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이다.

본다 해도 누군가는 악인곡이라 생각했을 모습.

악인곡이 늘었군.

혹시 시안조의 눈에 띈다 해도 그렇게 짐작될 만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나아갔다.

지체할 수 없다.

“허어업, 후흡!”

조금은 쉬어가도 좋지 않을까, 그런 소망을 품은 건 지귀객뿐이었다. 그가 달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힘들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대공자님, 아니 화공신타 님 너무 빠릅니다.

화공신타의 손에 들려 붙들려 편하게 이동하고 있는 건 좋은데 너무 빨라, 밀려오는 바람이 너무 거세 지귀객은 호흡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휴식을 취하자라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졸개다.

발언권이 있을 리가.

도리어,

- 지귀, 한 번만 더 신음 소리를 내라. 그땐.

협박당했다.

입을 찢어버리실지도.

- 죄, 죄송합니다.

지귀객은 허허업, 하지 않으려 아예 숨을 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아가는 길.

눈앞의 산이 한 호흡 만에 뒤로 밀려나는 중에,

‘사형의 천 년은 이제…… 이십구 일.’

천롱삭의 붕대 사이로 단혼각주 주란의 눈이 빛났다.

하루가 지났다.

남은 날은 그만큼 줄었다.

‘이십팔 일.’

모두의 마음에도 시간이 줄어갔다.

다시 하루가 지나면서,

색관조도 남은 날을 헤아렸다.

[금섬아, 이십칠 일이야.]

[그으으으으으윽!]

엽불의 천 년.

그날이 멀지 않다.

그 전에 회영부주 단예령을 끝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전력을 다해 나아갔다.

*

물속.

연못이었고, 물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여인도 날을 헤아렸다.

‘이십오 일.’

알몸이었고, 나이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가라앉지도 그렇다고 떠오르지도 않았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조금씩 흐느적대며 움직였을 뿐, 여인은 미동도 없었다.

죽은 건가?

아니, 살아 있다. 긴 간격을 두고 한 번씩 보글보글 공기 방울이 여인의 코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여인은 소녀였다.

그땐 고작 열두 살, 열세 살.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은 성장해 그녀는 어느샌가 꽃다운 숙녀가 되어 있었다.

모두 이 연못 덕분이었고,

그녀의 강렬한 염원 때문이었다.

‘사형을 만나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어. 그러니 잊어선 안 돼. 내가 누구인지……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끔 잊게 된다.

방심하면 자신의 이름을 잊을 때가 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천 년이다. 수많은 환혼을 거쳐왔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노파가 되기도 했고, 또 여러 번 소녀가 되기도 했다. 성장하여 숙녀가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남자의 몸이 된 적은 없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뛰어난 근골을 지닌 사내아이를 보았을 때, 소녀가 아닌 소년이 되어 볼까 잠깐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결코 남자의 몸이 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언제나 여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형을 기다리는 몸……. 나의 이름은…….’

주란!

여인은 마음으로 크게 외쳤다.

남자여서는 안 된다. 단 한 순간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여인은 그래야 한다.

회영부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 한 번이라도 남자의 몸이 되면 사형이 알아차릴 것만 같았고, 사형의 실망스러움에 찬 눈동자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버려질지도 몰라.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여인으로 환혼했다.

그 천 년의 재회가 가까워 오기에 여인의 모습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천 년 전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때의 나이로 지금 다시 돌아가고 싶었고,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사형을 맞이하고 싶었다.

‘분명 사형도 같은 모습일 테니.’

그래서 하루의 절반.

그녀는 연못 속에 머물며 성장했다.

오행의 목(木)을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 연못의 특이한 성질이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돕는다.

생하고, 성장시킨다.

이 연못의 공능까지 합쳐져 그녀는 나무가 자라듯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 점에서 목극(木極)을 취한 건 그녀로선 현명한 선택이었다.

번쩍.

회영부주는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온통 초록빛.

강렬한 초록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연못 위로 나아갔다.

연못 위는 동굴.

그녀는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다.

웃음을 머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고, 완벽한 나신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완숙해졌다.

곧 분홍빛 장포를 걸치고 동굴의 통로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그녀는 한 석실에 앉아 찻잔을 들어올렸다.

사방은 꽃으로 가득했다.

노랗고, 붉고, 새하얀 꽃들이 벽에도 천장에도 피어 있었다.

꽃과 꽃 사이를 벌들이 오가며 날았다.

꽃이 없는 곳은 그녀가 앉아 있는 황금 보좌였고, 또 그녀가 앉은 보좌 옆에 놓인 또 다른 황금 보좌뿐.

그녀가 찻잔의 깊은 향을 음미한 다음 입술을 달싹였다.

“단혼각으로 떠난 암주들의 소식은?”

- 아직입니다.

모습은 볼 수 없이 전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호수 아래 파멸의 진은 함정이었구나. 나의 제자가 교활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하까지 속이고 있었을 줄이야. 한데 준비는?”

- 시신 삼백 구를 온전히 마련해두었습니다.

“빈틈은 없었겠지?”

- 모두 처녀입니다. 단 한 번도 남자의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는 16세에서 18세의 처녀들의 시신들입니다. 생혈(生血)도 준비해두었습니다. 환혼된 정파 인사들에 더해 열 살 아래 오십 명의 아이들까지 거두었습니다.

그제야 회영부주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오늘부로 외부 활동은 멈춘다. 남은 날은 이십오 일. 하지만 더 빨라질 수도 있다.”

- 존명!

다시 적막해진 꽃의 석실 안에서 회영부주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형, 이제 곧 보게 되는군요.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천 년이 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 시간은 이리도 더디게 흐르는 것인지 시간을 원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왜 천 년이어야만 하는지 사형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왜일까요? 날이 가까워지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더 예쁜 모습으로 사형 앞에 서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회영부주는 석실 안 꽃들을 눈에 담았다.

‘분명 사형은 저 꽃처럼 저를 바라봐 주시겠죠? 천 년 전 사형이 제게 꽃이라고 불렀던 그 수많은 날처럼 말이에요. 사저요? 사저도 보고 싶은 건가요?’

후후.

회영부주의 미소는 짙어졌다.

‘사저의 소식은 모릅니다. 사저의 그림을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사저는 분명 누군가 자신의 그림 속으로 찾아오길 희망했겠지만, 제가 찾을 수 없었으니 아무도 사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죠. 왜 조금 더 찾아보지 않았냐고 물으셨나요?’

회영부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저의 제자 때문입니다. 이름은 단예령. 그 아이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귀엽기도 했지만 뛰어난 아이이기도 했어요. 저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요. 저는 그 아이를 사랑했어요. 아, 오해 마세요. 그런 사랑은 아니니까요.’

싱긋 웃은 회영부주가 마음의 말을 이어갔다.

‘네, 사랑했어요. 저는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만난 것이 고통의 시작이란 걸 그때는 몰랐어요. 단예령은 저를 배신했습니다. 그 아이는 환혼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천 년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형을 만나는 것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기쁨인 걸 단예령은 이해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회영부주는 처연해졌다.

‘제가 깨어났을 때 저의 몸은 하반신이 사라졌습니다. 네, 맞아요. 그래요. 단예령이 저를 배신했어요. 그 아이가 제게 환혼을 시전했어요. 지독한 일이었고, 믿을 수 없었죠. 저를 죽이려고 그 아이는 환혼 전에 자신의 몸을 절단한 거였습니다. 저는 황급히 지혈한 후, 두 팔로 땅을 짚고 도망쳐야 했어요. 쫓아왔어요. 저를 죽이겠노라며 쫓아왔어요.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사람이 무섭다고 느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는데, 아낌없이 모든 것을 전수했는데 그 아이는 저를 죽이려 눈에 불을 켰어요. 그년은 미친년입니다. 제가 미친년을 제자로 받아들였어요.’

‘그때부터였어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때부터 제자와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이기고, 어느 날은 죽음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어요. 간교한 년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저는 사형을 생각하며 견뎠습니다. 사형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어려운 고비도 많았습니다. 제자도 제자이지만 환혼에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환혼 후 다시 환혼할 때까지는 일정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두 번 혹은 세 번의 환혼 후에는 긴 안식의 시간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또 생각지 못한 여러 부작용도 나타나기도 했어요. 몇 번의 환혼을 지나면서 간혹 누군가에겐 기억을 잃게 되는 일도 나타났답니다. 영영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어요. 누군지 말해주어도 소용없었죠. 도리어 누구라고 알려주니 미쳐버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건 제게도 너무 큰 두려움이었어요. 혹시 내가 어느 날 내가 나란 걸 잊게 되지는 않을지. 사형을 봐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닐지. 사형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회영부주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우습죠? 저도 우습네요. 그래요.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어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사형이 곧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리고 사형…….’

회영부주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치 눈앞에 사형이 있는 것 같아서,

그토록 사랑했고, 잊은 적 없던 사형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녀는 손을 뻗어 허공을 어루만졌다.

‘제가 사형을 위해 준비해 두었어요. 처녀인 채로 죽인 삼백 구의 시신. 그리고 사형에게 생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싶어, 살아 있는 싱싱한 피도 준비해 두었답니다. 저…… 기특하죠? 저…… 귀엽죠?’

어루만지는 손길을 거두며 회영부주가 수줍게 웃었다.

‘분명 그년도 찾아올 거예요. 누구냐고요? 호호, 단예령. 아까 이야기한 저의 제자. 스스로 하반신을 잘라낸 후 몸을 바꾸었던 그 지독한 년도 올 테죠. 환혼 후 저의 기억을 그년도 모두 가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걱정 마요. 이곳에 들어설 순 없어요. 제자는 제자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사형, 조금 앞당겨 오세요. 열흘이든, 하루든. 그렇게 제 앞에 나타나 저를 불러주세요. 사랑을 담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래 기다렸느냐. 주란. 이렇게.’

**

언젠가부터…….

그렇게 자신을 주란이라고 믿게 된 단예령이 들뜬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먼 발치에서 화공신타가 운부산을 바라봤다.

그 뒤로 악인곡이 섰다.

그 곁으로 천롱삭을 두른 단혼각주 주란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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