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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434화 (434/460)

434화. 쿠우웅! 희망이 오는 소리.

멀리 이십 리 너머였다.

높은 산이었다.

운부산까지는 다섯 개의 산이 놓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잘 보였다.

서 있는 곳이 더 높기도 했고, 날도 맑았다.

운부산의 일곱 봉우리 중 하나가 회영부의 본거지.

물론 보이는 바는 여섯 개의 봉우리.

하지만 실상은 일곱 개다.

결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감춰진 봉우리가 있다.

산행을 즐기는 이들은 닿을 수 없다.

볼 수 없으니 오를 수도 없고, 진법의 묘용에 길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쪽에서 볼 수 있으니,

운부산에서도 이곳을 볼 수 있을지도.

걱정할 건 없었다.

그래서 오행기 안에 있었다.

오행기 안.

누군가는 큰 호흡과 함께 전의를 다졌고, 누군가는 무심히 운부산을 바라봤다.

하지만 천롱삭 안 단혼각주 주란의 눈빛은 슬픔을 숨긴 채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제자에게 처음 천 년의 약속에 대해 말할 때였을 것이다.

사형이자 연인인 엽불.

귀기.

천 년이 지난 후 재회.

단예령의 눈빛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몽환적인 표정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환상을 품게 된 것이.

단예령은 자주 이야기했다.

스승님, 그날이 기다려져요.

그날을 어서 보고 싶어요.

긴 세월이 남았음에도, 그보다 경이로운 일은 없을 거라며 들뜬 목소리를 내곤 했다.

천 년의 약속에 매료되었다.

매료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꿈속에서도, 아침에 눈을 뜬 첫 순간에도.

잠들기 전에도.

그러다…….

천 년 후 엽불을 만나게 되는 이는 달라졌다.

매번 꿈꾸는 중에 단예령은 천 년의 약속의 당사자가 되었고 엽불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환혼된 바보 소녀가 노파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래서 환혼을 더 이상 다루지 않기로 할 때,

단예령은 의기소침해졌다.

예령, 이제 환혼은 없다.

나는 크게 후회한다.

그때 예령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실망했느냐.

대답은 없었다.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숙여진 고개 아래 제자의 눈은 웃고 있었을지도. 이를 드러내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그로부터 오 년.

환혼당했다.

그리고…….

“제자는 두 번째 환혼했을 때 이미 자신을 잊었습니다. 스스로를 단예령이 아닌 주란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렇게 단혼각주가 말을 맺으니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삼 호법 섬악은 탄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 주군…….”

그는 지금껏 주군을 단예령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이해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에 각오로 삼았을 것이다. 제자를 끝낸 뒤에 비로소 주란이 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놀람도 잠시,

그 긴 세월 주군이 어떤 마음이었지를 떠올리니 섬악도 결국 장탄식을 터뜨렸다.

하지만 화공신타는 아니었다.

후공은 아니었다.

“단혼각주, 넌 쓸데없는 말을 길게도 하는구나.”

풍제도 당명도 같은 마음이었다.

단예령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는 쓸데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눈물이라도 흘릴까? 그도 아니면 처연히 바라봐 줘?

다 쓸데없다.

그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아가고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약탈하고, 죽이고, 비웃어준다.

그 후 한줄기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래, 그뿐이다.

대형과 자신들은 공포로 남는다.

이번에도 같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입술을 달싹였다.

“주란, 정신 차려라.”

주란이 바라봤다.

말이 이어졌다.

“기억해라. 우린 약탈자의 마음으로 적을 상대한다.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기 전까지 감성 따윈 잊어라.”

“…….”

주란은 옅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가라앉았던 눈이 천천히 맑아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꼽추는 후공.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지난날 수많은 절세 고수들을 만나보았지만, 후공은 그 어느 시대에서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존재였다.

따뜻한 면모 안에 스산함이 늘 맴돈다.

그 스산함이 한 번씩 드러낼 때마다 날카롭게 살이 베이는 것 같다.

이내 주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깨우는 말에 머리는 맑아지고, 마음을 잠식해오던 우울함은 어느샌가 날아가버렸다.

후공은 사납게 노려본 후, 시선을 돌렸다.

“지귀.”

“네!”

지귀객이 예를 취한 후 바로 지면을 파고들었다.

구르르르르르.

그 뒤를 검선과 검존이 이었다.

하염없이 내려갔다.

거의 백여 장쯤에서 멈췄다.

공간을 넓게 확장했다. 세 사람이 서 있어도 될 정도였고, 몇 걸음 거닐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 시작해볼까.”

검선의 우수에 기운이 맺혔다.

검존의 우수에도 태극이 떠올랐다.

검선의 우수에는 커다랗게 맺힌 붉은 광채는 점점 커졌고 그 일렁임은 마치 수백 개의 매화가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검존의 태극은 커졌다가 웅축되었다.

그렇게 동시에 발출되었다.

화산의 구소육합장과 무당의 태극무현장이 바닥을 때렸다.

쿠우웅!

쿠우우우우웅!

그 충격에 형성해둔 천장이 무너졌고, 산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느껴야 했다.

지귀객이라고 구경만 할 순 없었다.

무너진 자리를 빠르게 복구하고, 위로 올라가 다시 통로를 견고히 확보했다.

계획은 세워져 있다.

인위적인 지진을 타고 이동.

또 이후 각자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쿠우웅,

쿠르릉, 쿠우웅.

“따, 땅이 흔들려!”

“지진이야!”

“이, 이거…… 괜찮은 건가?”

“엄마아아아아아!”

“괜찮다, 괜찮아. 곧 멈출 거다.”

“나무가 뽑혔어요!”

나무만 뽑힌 것이 아니었다.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산짐승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산 주변의 민가에서는 소동이 벌어졌고, 산에서 먼 곳에서도 지진의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지진의 여파는 운부산에까지 미쳤다.

거리가 멀어 미약했지만 회영부주는 분명 지진을 감지했다.

그래서 웃었다.

“혹시…….”

그녀는 흘러내린 한줄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더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사형인가요? 내게 오고 있는 건가요?”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꿈꾸듯 물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의 바람을 듣고 사형이 서두르고 있는 것이면 좋겠어요.”

잠시 쉰 지진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여전히 미약했지만 이제 땅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도 느낄 수 있었다.

회영부주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부터 아래.

.

더 아래.

더 아래쪽에 억압된 이들도 지진의 여파를 느꼈다.

“지진이 난 모양이군.”

거의 오십여 명이었다.

노인도 있었고, 중년인도 있었다.

커다란 석실 안에서, 하나같이 쇠사슬에 팔다리가 묶인 채 벽에 걸려 있다시피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소향객, 지진이 더 커졌으면 좋겠구려.”

“릉인 대사, 염불이 통했나봅니다.”

소향객의 말에 소림 릉인이 웃었다.

“허허허…… 바라긴 했소이다. 부처님께선 지진으로 응답하신 것인가보오.”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소향객이었고, 릉인이었다.

그 대화에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지진이여! 더 크게 일어나라! 아예 산을 무너뜨려라. 모두를 죽여라!”

철커덩, 철커덩.

요란한 외침만큼이나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하, 방주. 그래도 우린 살아야지. 듣고 있자니 섭하네.”

연신 크게 외치던 개방 방주 곤오신개가 외침을 멈추고 쏘아봤다.

“소향객아, 꿈깨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세상 일 모르는 거요. 우리가 환혼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뭐……. 그건 그렇다만…….”

방금까지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외쳤던 개방 방주는 침울해졌다.

“아니 뭔데 또 울상이야!”

“그러게. 시발, 분위기 기껏 띄워놨더니만.”

소향객과 다른 쪽에 걸려 있던 원광자가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개방 방주는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고 싶어서 그런다. 너무 보고 싶어. 소천개가 너무 보고 싶다.”

세 명의 제자.

취운개, 은앙개, 소천개.

모두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제자가 소천개.

모두가 곤오신개의 눈물을 보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소향객은 아니었다.

“혹시 아들? 그렇지? 아들이었던 거지?”

“야이, 시발놈아아아아아!”

“맞네, 맞아. 아들이었어. 아들.”

“아니라니까, 이 개자식이 진짜!”

덕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곤오신개도 욕을 쏟아내고 나니 한결 슬픔이 덜어졌다.

“내가 약속한다. 여기 있는 모두를 증인 삼고.”

“약속?”

“그래, 만약 살아남게 되면 매일 목욕한다. 매일! 아니 하루에 내가 두 번 씻는다! 옷도 깨끗하게 입고 다닐 거고!”

“와아아, 이건 크네.”

“크다, 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구만.”

소향객에 이어 청우자도 거들었다.

천하십객 중 둘만이 아니었다. 릉인은 불호를 외우고, 또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리며 살아남자며 외쳐댔다.

유일하게 원광자만 냉소를 터뜨렸다.

“뭐 그렇게 장황해. 내가 몇 번을 말해. 후공이 올 거라니까. 후공은 죽지 않았다고! 내가 누구야?”

“누구긴. 후공의 비둘기 중 한 마리지.”

“그래, 비둘기로서 장담하는데, 후공은 절대 그냥 떠나지 않아! 허망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근데 왜 갑자기 처 우냐. 원광자, 이 개새끼야!”

“누가 울어. 내가 언제 울어. 난 안 울어. 씹객 새끼야!”

그러면서 엉엉 울었다.

다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늘 이랬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가도 이내 가라앉는다.

괜찮아.

또 시간이 흐르면 한바탕 웃으면 되니까.

그렇게 모두가 마음을 다독였다.

소림의 전임 방장도, 무림맹의 천하 십객도, 머리를 대머리처럼 밀고 다녀 멀리서도 번쩍번쩍 잘 보였던 후공의 또 다른 비둘기였던 원광자도.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문세가의 서문헌도.

‘아버지를 원망하고, 형을 원망하고……. 천화서고 대공자도 원망했는데…… 난 너무 어렸구나. 세상을 몰랐구나.’

가문이 천화서고를 집어삼키려 했음에 놀랐고, 그 결과 멸문지화에 휩싸이면서 뛰쳐나와 방황하던 서문헌은 환혼의 제물이 되어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그가 있었다.

자신의 몸이 있었다.

그곳 아래.

서문헌이 쇠창살로 다가갔다.

겉모습만 서문헌.

실제로는 회영부 사 호법.

쇠창살 안쪽에 있는 오십 명의 아이들 중 한 아이를 바라봤다. 그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고, 우는 소리가 컸기에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쇠창살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야. 울지 마라.”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에게 보내주세요.”

“곧 보게 된다. 이리 오렴.”

아이가 다가오자 사 호법이 아이의 목을 틀어쥐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니, 만지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거의 근접했을 뿐이었다.

그 상태로 그의 검지에서 하얀 실이 흘러나왔다.

“으으, 으으읍!”

아이의 눈도 실을 보았다. 공포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실이 입을 꿰매어갔다. 실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따끔함에 아이의 눈동자가 춤췄다. 그렇게 파고들고 빠져나왔다가 또 파고들었다.

꿰매지고 있어! 아이는 덜덜 떨면서 혀까지 꿰매질까 봐 혀를 입안으로 말아넣었다. 그렇게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실이 촘촘히 입을 봉했다.

부릅뜬 아이의 눈을 보던 사 호법이 웃었다.

눈이 춤춘다.

춤은 그만.

아이의 눈도 꿰매어갔다.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게 된 아이는 극한의 공포에 바람이 없는데도 나부끼듯 몸을 떨었다.

“귀는 멀쩡하니 들릴 테지. 발작하면 그땐 입과 눈의 실을 풀어주마. 하지만 그때가 되면 너는 혀가 뽑혀나가겠지. 한쪽 눈이 뽑혀 매달려 있는 것을 멀쩡한 눈으로 보게 되겠지.”

아이는 이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떨지 않아야 해.

그래도 떨림을 멈출 수 없어 눈물이 쏟아졌다.

눈은 꿰매져 있어 작은 방울만 맺혔다.

사 호법은 그 모습이 흡족했다.

어린아이건 늙은 자이건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

그가 한껏 미소를 머금고 아이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곧 거룩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마음을 평안히 가져라. 천 년의 삶을 살아온 귀황(鬼皇)이 오신다.”

오고 있었다.

쿠우웅, 쿠우우우웅!

지진과 함께 희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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