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언젠가 오늘을 말하겠지?
소리가 난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조용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눈이 말하고 있고, 표정이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소리보다 큰 환호성이었다.
입과 눈이 꿰매진 아이도 곧 그 환호성에 동참했다.
볼 수 없으니 안심할 수 없었던 그 아이에게 후공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실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알았고, 입과 눈에서 실이 빠져나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된 거지?
손이 닿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프지 않아!
입이 벌어져. 눈이 떠지려고 해.
영원히 말하지 못하게 되고, 언제까지나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위로하듯 따뜻한 기운이 입가와 눈매를 아른거렸다.
언젠가 이런 감촉을 느낀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 밖에서 놀다 입술이 부르텄을 때. 엄마가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면서 약을 발라주곤 했는데, 그때와 비슷했다.
이윽고 아이는 눈을 떴다.
엄마는 아니었다. 청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활짝 피어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엄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이 사랑하던, 막연히 아껴주는 엄마의 그것과 같아서 아이도 목소리보다 큰 환호성을 마음으로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그 마음 속 외침을 들은 다음 후공은 돌아섰다.
무흔신투와 지귀객 뒤로 풍제와 당명, 검선 등이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악인곡.
흉악한 모습들.
신형을 날려 일제히 점혈을 가했다. 교릉을 회수했다. 역용을 해제했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보는 순간 안심하도록.
풍제는 스스로 역용을 이루었기에 스스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악인곡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강호의 명숙들이 되었고, 혹은 절세의 미녀, 귀여운 소녀가 되었다.
유일하게 괴이한 건 붕대를 감고 있는 단혼각주뿐.
그래도 괜찮았다. 붕대 안 그녀의 눈빛을 본다면 아이들도 안심할 테니.
본래의 모습이 된 것은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악인곡이 될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풍혼마제다!
암향야다!
천화서고 대공자다.
이런 회영부의 고함이 몇 번이나 울려퍼진 터.
이제 남은 회영부의 인원은 스물 셋.
후공은 천향의 선을 통해 가늠했다.
회영부는 더 이상 쏟아져 내려오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 모두 인지는 했을 것이다.
회영부주도.
“대공자, 아이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우선이네.”
무당의 검존이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둘 혹은 셋.”
모두가 알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회영부를 멸하는 것보다 우선.
석실에 바람이 일었다.
아이들이 세찬 바람을 느꼈을 땐 자신들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우리 이제 집에 가!
엄마도 이렇게 안아주겠지!
붕대 인간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이 사람도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더 강해 보이잖아.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치 꿈속에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추락하고 있는 느낌에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바람도 불어와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상상조차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추락하고 있었다. 떨어지고 있는 것이 맞았다.
끝도 없는 수직 동굴이었다.
그걸 잘 볼 수 있었다.
어둡지 않은 것이다.
환하게 불이 밝혀졌기에 동굴을 하염없이 낙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상조차 못한 광경이란,
그 불빛이었다.
호박만한 세 덩어리 불덩이가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아래쪽에 하나.
두 개의 불덩이는 함께 떨어지면서 시야를 밝혀주고 있었다. 또한 네 줄기 자줏빛 광채도 서로 교차하면서 아래쪽으로 향해가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공이 날린 화극의 염화였고,
후공의 신검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광채로만 보였다.
“와아, 아름다워.”
그 광채들이 선사하는 광경은 경이로움으로 반짝여 한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 아이뿐만은 아니었다.
누구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가히 상상력조차 뒷걸음질칠 정도의 광경에, 아이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추락하고 있음에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빛을 따라서 행복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았다.
밀려드는 이 바람이 꼭 선물 같아!
잡혔던 것이, 그동안 괴로웠던 것이 이 순간을 위한 것만 같아!
잊지 못할 거야.
일각 전만 해도 살아난다면, 그런 행운이 주어진다면 평생 이 고통과 좌절의 경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절망을 덮어버렸다. 이젠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굉장히 아픈 기억이었는데,
이제 멋진 추억이 될 것만 같아!
언젠가 오늘을 말하겠지?
내가 어릴 때 말이야, 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와와아, 끝내주잖아!”
한 아이가 외쳤고,
그 마음은 빠르게 모두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건 미쳤어!”
“엄청 나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아아아!”
미칠듯한 바람 속에서도 아이들은 마음껏 환호했다.
호흡은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모두가 절세 고수.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시켜 엄청난 하강 중에도 아이들이 편히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었다.
어느샌가 맨 밑.
자줏빛 검광이 돌아오고, 슈욱!
후공은 땅굴로 파고들었다.
연달아 그 뒤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파고든 건 신투와 지귀객이었다.
둘은 빙벽에 갇힌 얼어붙은 몸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건 회영부 사 호법이었다.
땅굴을 빠르게 지났다.
수직 동굴에서 뛰어내렸는데, 이젠 긴 땅굴을 지나는 추억이 더해졌다.
이것도 잊을 수 없겠지.
엄청난 속도로 나아감에도 아이들은 긴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고, 느린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하강했을 때도 그랬었다.
이내 위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고, 솟아올랐다.
순간, 쩌어어엉!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고, 햇살이 소리를 내는 걸 들은 것만 같아 아이들은 저마다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음은 만개했다. 낮이 었구나! 해를 다시 봤어! 햇살의 따사로움이 그동안의 눅눅한 나날을 날려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또 달렸다.
들판이었다가 순식간에 또 다른 산이 지나갔다.
강물은 건너 뛰었다. 발 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었다. 강물이 햇살에 반짝이는 광경을 보았다. 그건 강물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멈춘 건 어느 마을 어귀였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두 발을 땅에 딛을 수 있었다.
“여긴 우리 마을이야!”
한 아이가 뛸 듯 기뻐했다.
다른 아이들도 좋아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함을 느껴 돌아보다 멍해졌다.
다 어디로 갔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꿈이야?
자신들뿐인 것이다.
모두…… 떠났어.
인사도 못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조금 더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너무 굉장한 일이어서 순간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렇게 아이들이 어안이 벙벙해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웃음이 끝나기도 전, 두 사람이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들고 나타났다.
“녀석들아, 우리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반드시 집에 돌려보내 주마!”
무흔신투와 지귀객은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도적놈들이 아닌 척.
마냥 좋은 사람인 척.
츠츠츠츠!
운부산 아래.
그곳으로 돌아온 건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후공과 일행은 수직 동굴을 날아올라 회영부의 지하 구층에 올라섰다.
아무도 맞이하는 이는 없었다.
회영부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건 그저 널브러진 시체들뿐.
“꼭 여긴 회영부가 아닌 것 같군.”
검선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눈에 보이는 광경만을 놓고 보자면 여긴 더 이상 회영부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회영부라 해도 이미 끝나버린 것만 같은 정적만 맴돌았다.
하지만,
파지지직.
천장과 바닥, 벽면이 말하고 있었다. 금빛 선이 이어졌다가 점멸하면서 옅은 소리를 내며 이곳이 회영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회영부의 만상은혼로.
그 진법의 발현은 지하 7층부터 본격화된다.
회영일존과 환혼한 삼 호법 섬악의 기억이 그랬다.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의 덫.
진법의 신묘한 묘용을 만나게 될 터였다.
그러니 지금 회영부의 잠잠함은 이런 말로 들린다.
너희는 올라올 자신이 있는가.
그런 목소리가 고요 속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아가야겠죠?”
현음신녀의 말했다. 모두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후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중에 천향오주를 일으켰다.
‘연향.’
무향의 선들이 일행의 몸을 뒤덮었고, 모두와 이어졌다.
향은 없고, 선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고 느낀 건 단혼각주 주란뿐이었다.
- 후공, 방금 천롱삭이 반응했는데…… 혹시 그대도 느꼈습니까?
천롱삭이 무언가를 떨쳐내는 느낌을 받은 주란이 물었다.
후공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 나의 향기. 한데 천롱삭은 신통하군.
후공도 천롱삭이 향을 떨쳐내는 걸 이미 느낀 터였다. 향기에까지 반응한 점은 의외였고 놀라운 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천롱삭은 모든 걸 봉하고 있지 않다. 외부로 드러난 부위가 있다. 두 눈. 그녀의 눈가를 따라 천향은 스며들었다.
천향의 선을 이은 건 떨어져 있게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때 일행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고, 또 반대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각자가 분리될 가능성이 높다.
마치 호수 아래 단혼각에서 거울의 진법이 나타나 각각 분리되어 갇히게 되었던 때처럼.
그러니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천향뿐이었다.
‘향기?’
주란은 대답을 들었음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되묻지는 않았다.
대공자, 아니 후공이 하는 일 중에 여태 의미 없는 일이 있었던가.
그가 천롱삭의 비밀을 풀었고,
여기까지 인도한 것도 그였다.
이곳에서 아이들의 환호 소리를 듣게 된 것도 모두 그 덕분이 아니던가.
그래서 되묻는 대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만상은혼로가 발현되면 우린 각각 분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필연적으로 그리될 테죠. 파훼를 위해서는 생점(生點)을 찾아야 하고, 그건 우리 중 여섯은 이루어야만 해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마음에 다시 새겼다.
생점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여섯.
여섯 명은 생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만상은혼로를 멈출 수 있다.
그때가 되면 회영부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엔 자신을 잃어버린 단예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엽불이 깨어나기 전에.
후공이 신형을 날렸다.
유령처럼 흐릿하게 위층으로 향하니, 여러 유령들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