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39화 (439/460)

439화. 두 사람만 남았다.

만상은혼로 중 만상(萬象)은 마음을 비추는 상.

자신의 슬픔과 두려움을 비추는 거울.

그렇기에 후공은 제갈유를 마주했다.

당연했다.

작별의 순간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슬픔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나란히 함께 걸을 수 있음은,

같은 이유였다.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에서 떠올리지 않으려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늘 아우와 함께 있었다.

지금만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거닐었다.

천화서고에서 깨어났을 때도,

천공단을 만날 때도,

제갈혜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도,

화공신타가 되어 북교산에서 성숙노괴를 죽일 때도.

그 뒤에도…… 그 뒤에도…….

지금까지도.

말을 걸고, 답을 들었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았고,

누구도 듣지 못하였지만, 함께 있었다.

그러니 같았다.

도리어 내면에서 함께하던 제갈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건 선물이었다.

“대형, 엽불이 걱정입니다.”

“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버릇이 생겼구나.”

천화서고 대공자의 모습이었지만, 이곳의 제갈유는 의문이 없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걱정하면서 그런다.”

“뭐…… 조금.”

소심한 인정에 제갈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소리가 너무 생생해, 후공은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유가 들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들켰네?”

“하하하하하!”

화창한 하늘, 넓은 들판에 제갈유의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쏴아아. 스스스. 쏴아아아.

소리를 내고 있는 건 거대한 바둑판이었다.

아니, 바둑판처럼 보였다.

그랬다. 가로로 세로로 줄이 그어져 있었지만 바둑판은 아니었다. 바둑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판의 가로와 세로는 일 장여.

그 판 위에는 모래가 움직이고 있었다.

흩어지고 모이고 하면서 모래의 형상은 사람의 형태를 띠었다.

그런 것이 각각 아홉 개.

모래 사람 몇은 싸우고 있었다.

또 다른 모래 사람은 천천히 헤엄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모래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만상은혼로 중 만상에 갇힌 이들.

그들의 현재 모습, 현재의 상황이 모래판 위 모래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판의 이름은 이름은 만상연(萬象聯).

만상의 거울과 마주한 이들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신물이었다.

그리고 그 만상연 앞에 단예령이 있었다.

“사형, 악인곡이 실은 풍제의 무리였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 않나요?”

천화서고 대공자다!

풍혼마제!

붕대를 휘감은 이는 누구냐?

주군, 악인곡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직접 듣기도 했고, 상세한 보고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환혼된 정파 인사들과 서른 명의 아이들을 구해낸 것도 알고 있었다.

“사형, 안타깝지 않나요? 왜 그리 최선을 다하는 걸까요? 어리석기 때문이겠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겠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어차피 다 죽는다는 것을 모르니까 그럴 테죠? 우스워요. 어차피 아이들은 또 잡아오면 그만인데 말이에요.”

단예령이 손을 입에 가져다댔다.

수줍게 웃었다.

“사형,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 나의 제자…… 단예령…… 그 아이도 온 모양이에요. 천롱삭을 얻고 싶어 했는데 결국은 얻었나 봅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일까요? 그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모양입니다.”

말의 끝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자신이 악독하다는 걸 그 아이는 잊은 것이겠죠. 그런 아이가 어찌 전설의 천롱삭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 것인가요? 그저 흉내를 낼 뿐이겠죠.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한 가지는 신경이 쓰입니다.”

단예령의 시선이 다시 만상연의 모래로 향했다.

부서졌다가 뭉쳤다가 하며 격렬히 움직이는 모래의 형태는 싸우고 있음이었다. 그 싸우는 모래 형태를 바라봤다가 헤엄치듯 두 팔과 다리를 저어대는 모래 형태를 지났다.

꼼짝도 하지 않는 모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예령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모래가 굳건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흩어지고 비산했다.

이 모래는 마음을 반영한다.

마음이 흩어지고, 불안에 떨고 있음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가 이상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모래 형상은 천천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뒷짐까지 지고서 마치 산책하듯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저자는 만상 속에 없는가?

아니, 그럴 리가.

만상 속에 없다면 만상연에 모래 형상으로 나타날 리도 없다.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는 자인가?

두려움 따위 없는 자인가?

아니,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지만 바보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애초에 만상은혼진에 접근할 수조차 없다.

“누구지?”

순수한 영혼이라도 슬픔은 있다.

갓 태어난 아이라도 두려움은 있다.

태어나기 전 뱃속에서 이미 두려움과 소망의 시간을 경험하고 나오기 때문.

한데 왜?

어찌하여 모래는 굳건한가.

한 알의 모래 알갱이도 흘러내리지 않는가?

흔들림 없는 마음.

초월적인 의식의 깊이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영향 때문일까.

다른 모래 형상들도 동요가 잦아들고 있었다.

놈이 다른 이들을 진정시킨 건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여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만상의 경계선을 어찌 뚫고?

단예령이 물었다.

후공.

천화서고 대공자.

천향오주는 만상의 경계선을 넘나들었기에 천향의 선을 따라 일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혹에 찬 목소리.

또 누구는 분노했고, 또 누군가는 절망에 빠져 탄식하기도 했다.

그 모든 소리를 천향의 선이 들려주었다.

또한 천향의 선을 따라 전음을 발할 수도 있었다.

- 내 아우가 이렇게 멍청이였나?

- 이 시대 마교 교주는 얼간이였군.

당명과 풍제에게 전음으로 조롱했고,

- 단혼각주, 천롱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군.

- 현이신녀, 귀뚜라미는 어떻게 웁니까?

주란과 현이도 일깨웠다.

검선과 검존, 그리고 삼 호법 섬악도.

비웃기도 하고 떠올려 보게 하기도 했다.

그 결과 마음 깊숙한 슬픔과 마주한 모두가 깨어났다.

한순간 깨어난 주란이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주루였다.

그리고 어느샌가 혼자였다.

현이의 빙벽은 녹아내렸다.

풍제는 무림맹에 홀로 덩그러니 선 채 주변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마음의 거울에서 벗어날 때,

후공은 들판을 걷던 걸음을 멈췄다.

‘찾았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들판에 핀 하나의 꽃.

보랏빛과 하얀색이 조화를 이룬 그 꽃은 여태 걸으며 찾고 싶었던 꽃이었고, 만상을 깰 수 있는 생점(生點)이었다.

현음신녀도 발견했다.

“찾았다!”

물에서 나와 한 송이 꽃을 발견했다.

풍제도,

“이것이로군.”

무림맹 전각의 지붕 위에 다소곳하게 피어 있는 꽃을 찾았고, 주란의 눈에도 보였다.

주루의 창밖.

저 멀리 건물들 사이에 놓인 돌 위에 피어난 꽃을 보았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땐 결코 바라볼 수 없었던 꽃을 그렇게 하나둘 찾아내 빼들고 그것이 여섯이 되었을 때,

화아아아아!

강렬한 빛이 뿜어지며 만상이 깨어져 나갔다.

그렇게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멀리, 혹은 부근에 각각 서 있었다.

파지지직. 천장으로 바닥으로 흐르는 금빛 선이 몇 번 점멸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스스슷.

모두가 한자리로 모였다.

후공 곁이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한가롭게 방금 겪은 만상에 대한 감회나 감상을 나눌 시간은 없었다.

후공은 둘러보다 풍제에게 이르러 시선을 멈췄다.

“여기까지. 풍제께선 일행과 함께 벗어나십시오.”

“그럴 수 없네.”

풍제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이제부터 나아가는 길부터는 대형은 단혼각주인 주란과만 함께한다.

“이미 약속한 것으로 압니다만, 제 기억이 틀렸습니까?”

풍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한 약속이었다.

만상은혼로에서 만상을 깨뜨리는 데까지가 동행의 마지막.

만상을 깨뜨리는 데 최소 여섯 개의 생점을 찾아야 했기에 인원이 필요했고, 함께한 것이었다.

무위가 애매하다.

걸리적거린다.

단혼각 삼 호법 섬악이 그렇고, 현음신녀가 그렇다.

그리고 더 넓게는 자신까지.

함께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악인곡의 실체가 드러났으니 거기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다.

회영부 중 누군가 운부산을 벗어나는 것도 신경 써야 할 부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떠나도 되는가?

대형만 남겨놔도 되는 것인가?

왜 일이 이 지경이 된 건가.

풍제는 절로 눈이 이글거렸다. 그렇게 바라보자니, 들려왔다.

- 시간을 끌 거냐?

이내 풍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가자!”

풍제가 신형을 날리니, 당명이 답했다.

바로 뒤따르진 않았다.

당명은 잠시 대형을 바라보았다. 매섭게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진심은 후공만 이해했다.

당명이 신형을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현음은 다가왔다.

“대공자.”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본 다음 신형을 날렸다.

검선과 검존도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뒤따랐다.

현이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대공자, 저는 이곳에…….”

“사양합니다.”

미소와 어우러진 가벼운 말투에 현이는 눈물이 맺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곧 만나게 되겠죠?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은 마음으로만 건넸다.

섬악까지 그 자리를 떠난 후,

후공의 곁에는 단혼각주 주란만이 남았다.

쩌적, 쩌저쩍.

거대한 바둑판과 같은 형상의 만상연의 모래는 모조리 허물어졌고, 동시에 금이 가면서 갈라졌다.

“흐음…….”

단예령이 침음성과 함께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호호!”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사형, 보았나요? 보셨겠죠? 이 시대의 강호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의 제자인 예령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아이는 악독한 반면 멍청한 년이라 결코 만상을 깨뜨릴 수 없답니다. 하지만 누군가 해냈습니다. 그자는 누구일까요? 뭐 상관없겠죠.”

바로 두 손을 모아 부딪혔다.

쩌엉!

부딪힌 손에서 녹색 광채가 일었고, 손을 뗀 순간 다섯 줄기의 녹색 광채가 천장과 벽면을 때렸다.

쿠궁, 쿵!

콰콰과아아아.

천장은 낮아지고 벽이 빠르게 좁혀들었다.

사방에 장식해둔 꽃들은 짓뭉개졌고, 바닥은 거칠게 흔들렸다.

천장이 멈추었을 땐,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장에 거의 닿을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좁혀든 벽으로 인해 사방의 공간도 작은 방 크기 정도로 협소해졌다.

그리고 한순간,

쿠르릉.

그 공간이 아래로 푹 꺼지듯 내려갔다.

은혼(隱混).

감춰진 혼돈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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