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아홉 개의 재앙, 네 개의 행운. (3)
쿠구궁.
석실의 천장이 열리며 다섯 번째 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아아아악!
음산한 소리를 동반했는데, 그 형태도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의 형태를 띤 하얀 연기였다.
수증기가 뭉쳐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을 떼어내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유령처럼도 보였다.
어린아이가 보았다면 유령들이라고 소리쳤을 그런 모습의 새하얀 연기가 일곱.
후공은 미간을 찡그렸다.
‘선물이 멈췄군.’
유령은 선물이 아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정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네 번째까지 지나오는 동안 셋이 선물.
쉬어갈 때도 됐다.
게다가 이번이 다섯 번째다.
누군가 여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온전한 상태는 아닐 테니, 지금의 겁화는 확인사살의 의미일 터.
그런 점에서 후공에겐 하찮기 짝이 없었다.
그런 주인의 마음에 번쾌친과 검령이 호응했다.
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자줏빛 광채가 되어 유령들을 향해 쇄도했다.
본래 주인의 경지가 눈앞.
지고무상한 힘에 다가가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거침이 없었다.
과거를 경험한 적 없는 검령조차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거기에 천람이 동반자가 되고, 금극이 친구가 되니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일곱 유령이 스러져갔다.
후공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닥 너머, 그 너머.
저 아래쪽에 있는 주란의 상태를 가늠했다.
주란은 고전 중이었다.
후공은 쉬어가는 겁화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겐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험난한 재앙이었다.
네 번째 겁화가 원인.
천장이, 바닥이, 벽이 조여들었을 때 그녀는 후공만큼 작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축골공을 시전하긴 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고작 삼분의 일.
뼈를 더 축소할 수 없었고, 내부 장기를 더 작게 하는 건 도리어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는 것이었기에 그 상태로 몸의 압박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산에 깔리는 듯한 압력이었고, 온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압박이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천롱삭 때문이었지만 고통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저절로 신음을 흘려야했고, 기혈이 뒤틀리는 걸 막을 길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다섯 번째 겁화를 맞이했으니 힘겹지 않을 수가.
쿠웅! 쿠웅! 쿠우웅!
일곱 유령에 둘러싸여 주란은 난타당했다.
유령의 주먹이 보였다 싶을 땐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손이 복부에 다가왔다 싶을 땐 몸을 숙여야 했다. 유령의 발이 허리를 가격하고, 등에도 날아들었다.
유령들 사이로 천롱삭의 줄기가 뻗어갔지만 유령들은 연기처럼 천롱삭의 줄기를 빠져나가며 목을, 머리를, 가슴을, 다리를 가격해 갔다.
그때마다 주란은 허리가 접히고, 머리가 들렸으며 또 한쪽 무릎을 꿇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 주란의 안광은 조금씩 맑아졌다.
‘고통이…….’
줄어든다.
기이한 일이었다. 몸이 타격당할수록 기운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원인은 바로 알아차렸다.
천롱삭이 타격이 닿을 때마다 유령들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흡수된 기운은 도리어 몸을 감싸듯 어루만졌고 북돋기까지 하는 것이다.
쿠웅, 쿠웅, 쿵!
그렇게 다시금 순식간에 백여 차례 난타당했을 때 일곱 유령의 형체는 완연히 흐려졌고, 이어진 오십여 차례의 눈부신 타격은 의미가 없었다. 그저 솜방망이.
“후우.”
주란은 길게 숨을 토해냈다.
‘천롱삭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넷.
단예령도 헤아렸다.
‘이제 남은 건…… 넷.’
그녀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난 떨고 있지 않아.
그녀의 눈동자에도 두려움이 피어났다.
난 두렵지 않아!
마음을 부정하면서 단예령은 손끝을 떨며 의문을 떠올렸다.
‘위기는 기회. 그런 말이 있긴 해. 하지만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날 수 있나? 아니. 가끔이다. 한데 왜지? 왜 천화서고 놈은 강해지는 거지? 왜 내가 놈에게 영약을 건네주는 것 같지? 영약을 준 적이 없는데…… 난 놈을 죽이려는 것인데…….’
다섯 번째 겁화는 확인사살.
여섯 번째도, 일곱 번째도 그렇다.
네 번째를 버텼을 땐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테니, 일곱 번째까지는 최후를 확인하는 의미다.
한데 확인 결과가 황당하다.
더 강해졌다.
‘멈춰야 하나? 나아가야 하나?’
만약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그땐 걷잡을 수 없기에 단예령은 갈등했다.
‘넌 누구냐? 대체 누구냐? 난 천 년을 기다렸는데, 사형을 만날 날은 이제 이십사 일이 남았을 뿐인데 내가 죽는다고? 놈은 정녕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이 정도일 순 없다.’
혼돈의 재앙이 도리어 적에게 행운을 안겨다주고 있는 상황에 단예령은 혼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 년을 보내오는 동안 여러 위기를 맞이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
‘놈은 환혼자일 테지. 반로환동한 것이겠지. 물어보자. 놈을 알아야 해.’
단예령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의 제자, 예령.”
주란의 석실에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석실의 벽 모서리를 타고 흐르고 있는 녹색 광채가 짙어졌다가 옅어졌다를 반복했다.
주란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너의 스승이다.”
단예령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저년 또 저런다. 아직까지 저런다.
뭐…… 내가 이해해야겠지?
저 아이는 미쳤으니까.
악랄한 아이니까.
또한 여러 번의 환혼으로 기억이 뒤죽박죽되었을 테니.
단예령은 고개를 저어댔다.
마음은 답답해지고 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저 아이는 어느 날은 소녀가 되기도 하고, 풍만한 체형의 중년 여인이 되기도 했다. 한 번은 남자가 된 적도 있어서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한 번이라도 남자가 되어선 안 돼.
그래서 넌 주란이 될 수 없는 거란다.
그래서 넌 사형을 만날 자격이 없는 거다.
천 년의 약속. 천 년의 사랑은 순결해야 하니까.
그동안 많이 꾸짖었다.
하지만 지금 꾸짖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단예령은 마음속 분노를 다독이곤 입을 열었다.
“제자야, 천화서고 대공자는 누구냐? 그는 환혼자이겠지?”
“들은 바 없다.”
“넌 괜한 심통을 부리는구나. 어서 말해보렴.”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지.”
“오호! 그래, 들어보자.”
“그가 천롱삭의 비밀을 풀어냈으니 천롱자일 수도 있고, 동해삼선 중 하나가 반로환동하여 나타난 것일지도. 그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후공일지도.”
“하하하하!”
천롱자와 동해삼선에선 고개를 끄덕였는데, 후공이란 말에는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후공은 죽었다.
후공의 자살은 환혼의 영향.
환혼은 실패했지만 영혼은 흔들렸을 터.
그날 미쳐버렸을 것이다.
검성도 그랬으니까.
환혼의 실패로 검성은 혼란 속에 마화하여 폭주했으니. 하지만 후공은 달랐다. 마화하기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무림맹을 지키기 위해서.
강호를 위해서.
후공답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그녀가 이해하는 진실.
그때였다.
- 회영부주.
순간 단예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음?’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놀랐고, 전음의 목소리가 천화서고 대공자였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서른여섯 개의 석실에서 정확히 자신을 찾아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
천향의 선은 운부산을 뒤덮고 있었고, 각각의 석실에도 닿아 있는 것이다.
천향의 선이 목소리를 들려주고, 상황까지 알려주고 있으니 이미 방금 전 두 사람의 대화도 후공은 듣고 있었다.
- 회영부주,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이야기했을 텐데.
“넌 여전히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 아니.
“그럼?”
- 널 죽일 자.
그 말에는 단예령이 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얼마 전 들었다는 걸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젠 그 말이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다.
후공이 전음을 이었다.
- 이제 남은 건 넷. 이어가도록 하자.
“후후, 내가 멈춘다면? 나아가지 않는다면? 널 영원히 가둬둔다면?”
단예령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후공도 웃었다.
-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열흘.
“열흘?”
- 내가 이곳에서 열흘의 시간을 갖게 되면 널 찾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
단예령은 답하지 않았지만, 마음까지 침묵한 건 아니었다.
그게…… 무슨? 고작 열흘이라고?
눈동자도 커져 경악을 표했다.
열흘 동안의 운기행공만으로 석실의 반탄을 부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될 리 없다. 그럴 순 없다.
전설로 여겨지는 천롱삭조차 뚫지 못한 석벽의 반탄을 뛰어넘을 수 있을 리가. 이곳은 천 년의 만남을 위해 사백 년 동안 준비한 곳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고함쳤다.
그 외침이 곧 두려움의 증명.
공포는 이미 단예령의 머리에 자리잡았고, 한번 자리잡은 공포는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단예령의 석실이 움직였다.
은혼의 남은 겁화를 멈추지 않고 퍼붓는다.
행운이 이어질 리가.
그때가 되면 분명 온전한 몸은 아니겠지.
그때가 되면 아무리 대단해도 가둬둘 수 있겠지.
사형이 도착할 때까지.
그 시각.
운부산 주변은 수많은 빛이 비산했다.
어떤 땅은 움푹 꺼져 분지가 되었고, 언덕은 평지가 되었으며, 봉우리가 날아가기도 했다.
‘염능(念能). 구계(九界). 폭(爆)!’
단혼각 삼 호법 섬악의 공능에 흙이 솟아오르며 폭발을 일으키는가 하면,
‘태청(太靑)!’
무당 검존의 비검은 거대한 푸른빛이 되어 쏘아져 갔고,
‘자하선염!’
화산 검선의 검강은 불타오를 듯 나아가 분화되었다.
그 사이로 풍제가 날아올랐다. 염혼들이 사방에서 날뛰는 틈에는 당명의 만천화우가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분노한 건 현이신녀였다.
사매인 현음신녀가 피를 울컥대고 있기 때문이었고, 현음신녀의 오른쪽 어깨로 창이 꿰뚫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극풍한촉(極風寒觸)!’
대기의 수분을 끌어모았고, 얼렸으며, 쏘아냈다.
가히 수만 개의 얼음 화살이 회영부 이 호법의 눈에 들어찼다.
그가 막 만천화우를 벗어났을 때였고, 염혼의 손길을 떨쳐냈을 때였다.
‘아…….’
끝을 직감한 그가 눈을 감았다.
이름은 이송.
육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그렇게 불린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환혼하여 온 그가 허망한 웃음을 지었을 때는, 이미 수만 개의 얼음 화살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간 뒤였다.
사백 년 전 십대 고수 중 하나도 같아졌다.
허공에 떠 있는 채로 회영부 삼 호법인 그의 머리는 풍제에게 붙들렸다.
떨쳐내는 건 불가능.
이미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허리를 염혼들이 붙잡고 있었다.
‘긴 세월 같지 않았는데…….’
허허로운 그의 상념은 어깨를 딛고 선 풍제가 목을 뜯어내면서 사라졌다. 이어 염혼들이 그의 팔다리를 뜯어낸 후 떨어져나오니 조각난 채로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나간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생의 마지막 풍경에 보였다. 회영부 일 호법의 최후가 보였다.
털썩.
일 호법이 무릎을 꿇었고, 피를 게워낼 때.
그의 몸을 금빛 만천화우가 쓸고 지나가니 수천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 광경을 바위에 기댄 채 현음이 바라봤다.
끝냈구나.
피에 물든 입을 벌려 웃었다.
시야는 흐려져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죽진 않겠지.
일행이 다가오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땐 금빛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뭐였지?’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오른쪽 어깨가 화끈해졌다.
화끈함도 잠시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현음은 시야가 조금 선명해졌다.
‘응?’
어깨를 바라봤다.
그곳엔 금빛 두꺼비가 어깨를 물고 있었다.
[그윽, 그윽!]
공청석유를 지키는 치유의 영물인 금섬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말을 하는 영특한 색관조는 떠들었다.
[궁주님! 피 좀 흘린 걸로 너무 무게 잡는 거 아냐? 까르르르르르!]
그 말에 주변에 모여든 일행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색관조의 말을 듣고 보니 별 일 아닌 것 같아진 것이다.
색관조의 말투가 대형을 닮았다.
대공자를 닮았다.
풍제와 당명은 대형을 떠올렸고,
다른 이들은 대공자를 떠올렸다.
*
그러는 사이,
쿠구구궁,
운부산 내부에서는 겁화가 이어졌다.
겁화가 지나갔다.
여덟 번 째 겁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