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443화 (443/460)

443화. 본래의 경지로.

일곱 번째 겁화까지는 평온한 길이었다.

후공이 그렇게 느꼈고, 삼악이 그렇게 느꼈다.

혼에 새겨진 오행들도 같았다.

겁화라고 하기엔 마치 봄 길을 걷는 것 같았고, 또 노랗고 빨갛게 물든 가을 단풍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후공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바란 건 자극.

수(水)의 각인을 위한 자극이었다.

수는 극의에 이르렀지만 각인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다음 겁화로 금이 나오면 좋다.

금은 수를 생하며 북돋는 것이다.

나올 때도 되었다.

만물은 오행을 벗어나지 않으며 일곱 번째 겁화까지 금의 겁화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후공은 기대했다.

다시 석실이 이동.

큰 울림과 함께 움직임이 멈추었다.

사면의 벽이 열리면서 여덟 번째 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 너머로 흰 광채와 검은 광채가 회오리 치는가 싶더니, 두 광채는 서로 서로 꼬리를 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느 쪽도 잡히지 않았고, 잡을 수 없었다.

흰 광채의 머리는 검은 광채를 뒤쫓을 수 있을 뿐이고, 검은 광채도 흰 광채의 꼬리에 닿으려 할 뿐이었다.

그 움직임이 순식간에 맹렬해지니 둥그런 원이 되었다.

둘인데 하나인 것 같아지면서 형태는 선명해졌다.

태극(太極).

절반의 흰 광채는 양.

절반의 검은 광채는 음.

음과 양은 서로를 침범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침범할 것이다.

후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이어진다면 어찌 겁화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순간 그렇다는 듯 변화가 일었다.

양의 하얀 광채가 검은 광채의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변했다.

‘바람이 불겠군.’

바깥을 두른 양은 음을 뚫고 들어가려 하나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세찬 바람이 일어난다.

휘이이이이잉!

사면에서 바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바람이 칼날이 되었고, 예측할 수 없고 모든 걸 휘감고 찢는 회오리가 되어 후공을 향해 불어닥쳤다.

‘무너지겠지. 결국 큰 화를 입게 되겠지.’

단예령은 마음으로 바랐다.

여덟 번째 겁화와 아홉 번째 겁화는 연속 된다.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친다.

음양의 불균형으로 일어난 바람은 천지를 쓸어담는 광풍이 되고, 천둥과 번개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렇게 되겠지.’

죽지 않고 버틴다 해도 결코 성한 몸이 되어 있진 않으리라.

그녀의 마음 속 바람만큼이나,

후공에게 몰아닥친 바람은 난폭했다.

하지만 바람은 불길만 거칠게 할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부채질 없이도 장작불이 활활 잘 타오르듯, 바람이 산야를 태우는 불길을 북돋듯 후공의 화극이 자극되었다.

징조가 좋았다.

사행이 서로 돕는다.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화극이 토를 생하고, 토극이 금을, 금극이 수를 왕성하게 북돋우면서 수극이 나아갔다.

태극의 음양은 다시 변모했다.

아홉 번째 겁화는 음이 양을 감싸면서 그 음 안에 있는 양이 나갈 구멍을 잃었고 막혔다. 그러다 별안간 음을 뚫고 밖으로 분출되면서 천둥과 번개가 일었다.

쿠르르릉, 쾅!

번개가 작렬했고, 천둥 소리가 뒤따랐다.

이는 후공이 내내 비라던 금의 겁화.

후공은 우수를 내밀었다.

수극이 수용을 준비되면서 작렬하는 번개는 펼쳐진 손으로 모여들었다.

파지지지지직.

금빛 뇌전은 일어났다 싶은 순간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길 마흔 두 번.

수극이 영혼에 각인되어 갔다.

그 영향으로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지독한 어둠이었다. 번개는 여전히 생성되고 있고 쏟아져 왔지만 이미 빛을 잃었다. 천둥은 소리가 사라졌다.

그 어느 누구도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번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공은 수극의 각인으로 고요한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듣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각인된 사행이 순행.

삼악이 순행하도록 도왔고, 서로 생하면서 후공은 거대한 기운의 폭발에 휩싸였다.

쾅, 콰광, 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은 후공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고, 후공은 그 굉음 속에 경지를 돌파해갔다.

우우우우우웅.

번쾌친과 검령이 울부짖었다.

본래의 경지!

경험하였고, 나아가고 싶었던 그 경지에 도달했음에 미칠 듯이 검신을 출렁였다.

쾅, 콰과광, 콰광!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단예령은 들을 수 없었다. 도리어 어떤 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었기에 단예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갔다.

‘죽었구나. 하하…….’

희미한 생명의 불꽃조차 없다.

그렇기에,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 웃음 소리를 제자에게 들려주고 싶었기에 단예령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대, 대공자…….”

들려온 웃음 소리에 주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도 태극을 보았고, 음양의 변화 속에 광풍을 지났으며 천둥과 번개를 견뎠던 터.

자신은 천롱삭을 두르고 있음에도 겨우 버텨낼 수 있었을 정도로 고통의 순간이었다.

한데 웃음이 들려왔다.

이 웃음이 대공자의 죽음을 알려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자야, 놈이 죽었다.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로구나.”

“넌 살려주마. 넌 죽이지 않으마.”

단예령의 목소리는 따사롭고 자비로움으로 가득했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목소리였다.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어찌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단예령의 마음이었다.

그래, 죽이지 않겠다.

너를 지금 죽이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왔으니. 악연도 천 년을 함께하면 정이 들고 마는 것인가.

너도 보고 싶을 테지.

넌 나로 착각하며 살아왔으니.

사형을 보고 싶을 테지.

제자여, 그러니 살려주마.

이쯤 되니 사형에게 널 소개해 주고 싶다.

너의 상체만 남겨둔 채로.

하체는 멀리 버려둔 채로.

사형은 아마도 널 내려다보며 웃으실 테지. 뭐 이런 괴상한 년이 다 있냐며 웃으시겠지. 이건 도대체 뭐하는 년이지? 이러시면서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구나. 사형이 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고생했다면서 웃으시는 표정을 난 보고 싶구나.”

“나도 볼 수 있을까?”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단예령이 눈을 부릅떴다.

음성이 천화서고 대공자인 것.

“너, 너는…….”

살아있었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단예령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놀라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없다. 없다.

주변에도 없고, 다른 곳에서도 기척이나 생명력을 느낄 수 없었다.

서른여섯 개의 은혼로의 어느 석실에서도 감지되지 않는데, 다시 들려왔다.

“회영부주.”

단예령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또 들려온다. 어떻게? 어디에 있는 거지? 은혼로 안에 있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그녀였다. 목극의 묘용으로 이어져 있어 극히 낮은 숨결까지 크게 들을 수 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데…… 목소리만 들려온다.

“날 찾지 않아도 된다.”

“내가 찾아가마.”

단예령은 목젖을 출렁였다.

석실의 반탄을 넘어섰다고?

열흘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은혼의 겁화들이 다시금 놈을 강하게 한 것이라고?

단예령은 다른 걸 떠올릴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이유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이 목소리가 결코 환청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 석실의 반탄도 지나올 것이다.

환상처럼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자를 상대할 수 있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단예령은 손을 떨쳐냈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광화가 뻗어나가 석벽으로 스며들었다.

쿠르르르, 쿠구구구궁.

석실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있는 석실들부터 어떤 건 좁아졌고, 어떤 건 넓어졌다. 천장과 바닥이 열리기도 하면서 한 곳으로 이동했다.

겹겹이 중첩되면서 쌓여갔다.

단예령이 머물고 있는 석실에 포개어져 갔다.

세 겹, 네 겹, 다섯 겹.

단예령의 석실의 벽들은 두껍게 쌓여 갔고, 천장과 바닥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여 가고 있었다.

주란의 석실에도 변화가 일었다.

석벽이 밀려나고, 천장이 젖혀지는가 싶더니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리보다 확인하고 싶은 소리는 따로 있었다.

“대공자!”

그녀도 대공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단예령의 당혹에 찬 목소리도 들었기에 다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후공은 무심히 벽을 향해 양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에 닿은 벽은 두부.

손이 벽에 닿았다 싶을 때, 후공은 두부에 손을 밀어넣듯 손목까지 파고들었다.

금빛 도형과 기괴한 문자들이 석벽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점멸하는 가운데, 후공은 벽을 찢어냈다.

마치 휘장을 찢어내듯 벽을 두 갈래로 찢어 떨쳐냈다.

후공으로선 과거 본래의 경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찢어낸 벽을 지나 주란의 위치를 가늠했다.

주란의 석실은 이미 변화를 맞이한 상황.

그녀와의 사이에 있는 석실들도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돌파해야 할 석벽은 일곱 개.

후공은 한쪽 벽을 향해 우수를 내밀었다.

백광이 떠올랐다 싶은 순간,

콰과과과광!

주란이 한쪽 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땅이 진동한다 싶을 때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바라봤을 땐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놀라 바라보다 눈을 한차례 깜박였다 떴을 땐,

눈앞에 후공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대공자의 신위가, 달라져 있었다.

원래도 극히 정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고요함의 끝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맑은 호수.

그런 맑음이었고, 그런 고요함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주란의 눈동자는 그와 같이 묻고 있었지만, 후공은 주란을 향해 가볍게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주변을 둘러봤다.

석벽들이 한곳을 향해 이동 중.

그 석벽들이 하나둘 겹겹이 쌓여간다.

단예령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있었기에 후공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영부주,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아니, 넌 이해 못 해.

결코 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해!

쿵, 쿠궁.

천장이 두터워진다. 바닥도 겹겹이 두꺼워진다. 사방의 벽도 중첩되면서 수십 겹으로 쌓이고 견고해져 갔다.

그 안에서 단예령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벽을 찢어낸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곱 개의 석벽이 단 일격에 뚫린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은혼로를 만든 자신도 그럴 순 없었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하루? 반나절?

아니, 한 시진도 어려워 보인다.

그때가 되면 천 년의 소망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마주하게 될 상황이 공포스러웠고, 사형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서러움이 되었다.

‘사형…….’

시간이 없어요.

앞당겨 주세요.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나를 다시 보려면…….

신강 북동쪽.

위혼산.

혼을 위로하는 산.

높지 않은 산.

수많은 묘지가 빼곡이 들어찬 그 아래.

한 사람이 눈을 떴다.

붉은 눈이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번져갔다.

엽불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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