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귀기. 엽불.
깊은 땅 속.
엽불이 몸을 일으켰다.
엽불은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흙에 파묻혀 있음에도 둥실 떠오르듯 몸을 바로 잡았다. 그 움직임에 흙은 저절로 밀려났다.
그 광경은 마치 흙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의 공간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엽불의 머리는 길었다.
허리에 닿을 정도.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이 없는데도 펄럭였다.
옷은 기이했다.
흑의.
하지만 그걸 옷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누군가 보았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검고 붉은 연기가 흐느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연기라고 불러야 맞았다. 그러나 옷인 것도 같았다. 형태를 보자면 소맷자락이 있고, 긴 장포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귀기(鬼氣).
엽불은 귀기를 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엽불이 귀기를 두르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귀기는 엽불의 내부에 가득했다.
그 넘쳐나는 귀기가 옷과 같은 형태로 형상화되었을 따름이었다.
천 년의 결과였다.
천 년 동안 귀기를 모은 결실이었다.
엽불이 머리를 들었다.
바라본 순간, 이미 엽불은 땅을 뚫고 나왔다.
높이 솟구쳐 하늘 높은 곳에서 멈췄다. 그대로 머물렀다.
먼 지평선에 드리운 석양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흐르는 구름이 붉게 물들어가는 광경은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와도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엽불에겐 천 년 만의 풍경이었다.
석양을 눈에 담았다.
그의 붉은 눈에 붉은 구름이 흘러갔다.
엽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술이 벌어지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한동안 웃었다.
이제 이 석양을 영원히 볼 수 있다.
벌어진 입에서 붉은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며 그 액체들은 연기처럼 흩날렸다.
엽불이 입술을 달싹였다.
“일어나라.”
안개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떠 있는 곳은 공동묘역 위.
“네?”
족히 수천 개의 묘지가 자리한 낮은 산이었고, 참배객들도 있었다. 오십 명 가량의 참배객들은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 허공에 둥실 떠 있으니 놀라 바라보고 있던 중.
그리고 이미 서 있던 자들이 많았다.
그중 놀라 주저앉았던 이들이 일어나라는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하지만 엽불이 부른 건 그들이 아니었다.
퍼석, 퍼석.
무덤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덤에서 손이 빠져나왔다. 머리가 빠져나왔다. 관을 부수고, 봉분을 뚫고 시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어헉!”
“으아아아악!”
“흐읍!”
누구는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고, 누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아, 아버지!”
“아들아!”
“누, 누님!”
참배객들은 죽었던 가족을 만났다.
반가울 순 없었다.
썩고 부패한 악취 때문이기도 했고, 썩어 문드러진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시체 중에는 부패가 심해 군데군데 뼈가 드러난 것도 있고, 아예 해골인 것도 있는 것이다.
시신들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수천 구의 시신들은 고개를 들어 한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은 자의…… 위안이시여…….”
시신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엽불을 향해 어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산 자의 영광이시여…….”
“귀황(鬼皇)……이시여…….”
그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모든 죽음에는 원(怨)과 한(恨)이 있으며, 그 원과 한을 들어준 이가 귀황인 것이다.
억울함. 원망. 좌절. 후회. 절망.
배신. 미련. 풀지 못한 욕망. 깊은 한숨.
그 모든 사연을 귀황께서 들어주셨다.
함께해 주셨다. 위로가 되어 주셨다.
그런 귀황께서 친히 이곳에 와 주셨다.
엽불의 사이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랬다.
천 년의 세월은 천 년의 위로였다.
많은 일이 있었다. 많은 이들을 만났다.
산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죽은 자들을 만났을 뿐. 그럼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한과 마주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
가족이 몰살당한 것을 지켜본 죽음은 거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켜본 죽음은 한이 깊었다.
그 한을 흡입했다.
흡족했다.
살아가는 내내 병마에 시달리다 죽은 자도 있었고, 도둑으로 몰려 맞아죽은 이도 만족스러웠다. 만두를 훔친 것뿐인데 사지가 잘려나간 자도 있었다. 죽어서도 원망했다.
그 원망을 흡입했다.
그 원망이 귀기가 되었다.
그런 원망과 비통함이 온 천하에 널렸다.
자식에게 버려져 산의 찬바람에 서서히 얼어죽은 노파는 죽어서도 울었다. 좋은 양분이 되었다. 버림받은 자식들도 있었다. 맞아죽기도 하고 굶어죽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에 울부짖던 혼도 있었다.
그때마다 엽불은 위로했다.
그때마다 웃었다. 귀기를 흡입했다.
억울하지 않음에도 억울하다며 이를 가는 죽음은 힘이 약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이러 갔다가 죽은 이들의 귀기가 부족함을 메꿔주었다. 길을 걷다 낙석에 깔려 죽어간 이들의 황망함도, 천둥이 치는 날 번개에 맞아 전신을 요란하게 떨며 죽어간 이들의 망연자실도 위로했다. 귀기로 치환했다.
꿈을 이룬 순간 죽음을 맞이한 자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자도 모두 귀기가 되었다.
원한이 클수록,
좌절의 깊이가 깊을수록.
천 년의 시간은 줄었다.
일각, 일각, 일각, 일식경, 반시진.
천 년의 계산은 틀렸다.
인간의 원과 한은 깊고 진득해 시간을 앞당겼다.
일각, 일각, 일식경, 반시진.
그렇게 줄어든 시간이 이십사 일.
귀기의 원천은 시기(屍氣)와 사기(死氣) 그리고 원한(怨恨).
시기를 얻기 위해 온 세상의 지하를 떠돌며 시체들 곁에 있었다. 썩어가고 부패해가는 시체에서 귀기를 얻었고, 오래된 죽음에서는 사기를 얻었다.
생의 소멸.
죽음.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던 시체들.
그리고 죽은 자의 한숨.
죽은 자 곁의 을씨년스러움은 모두 죽은 자의 한숨이었다.
그 한숨은 시기와 사기를 능가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도 그 한숨을 들어보자.
엽불의 그 의지에 시체들이 호응했다.
참배객들을 바라봤다.
주춤 물러날 새도 없었다. 시체들이 덮쳐 물어뜯고 몸을 찢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산야를 물들였다.
그 비명이 엽불에게 흘러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고, 자식에게 목이 졸려 죽은 이의 황망한 눈동자가 있었다.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몸에 귀기가 떠돌았고, 엽불은 그들을 위로했다. 시신들에서 검은 연기가 일어 엽불의 숨결로 빨려 들어갔다.
산 자였다가 죽은 자가 된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
같아졌다.
꿈틀대며 일어나 귀황을 바라봤다.
“죽은 자의 위안이시여…….”
“귀황(鬼皇)이시여!”
엽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엽불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점을 찍듯 허공을 점했다. 먹물이 찍혔다. 먹물이 찍힌 것처럼 찍힌 검은 점은 넷으로 분화되었고 순식간에 커졌다.
그렇게 어둠이 퍼져갔다.
공동묘역만 어둠에 잠긴 것이 아니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어둠에 잠겼다.
멀리, 아주 멀리.
빛이 달리는 것처럼 어둠이 내달렸다.
“헉!”
부근 마을에 소동이 일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밤이 되었어?”
“농담이지?”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사물을 볼 수 있었고 사람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저 밤과 같았다. 하지만 분명 방금까진 해가 저물고 있을 뿐이라서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그 어둠이 청해성을 뒤덮고, 사천을 뒤덮었다.
길을 걷던 이들이 놀라 멈췄고, 창 너머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이던 이들은 잔을 놓쳤다.
감숙성과 섬서도 밤을 맞았다.
섬서의 안강에 머물고 있던 천공단도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가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응? 나 방금 잤었나?”
“하하! 뭐여? 시간이 삭제된 거야?”
“해 어디 갔냐?”
소천개가 눈을 비볐고, 은앙개는 웃었다.
낭인왕도 해를 찾는다고 서성였다.
금적자는 아는 척했다.
“달이 해를 가린 것인가 보군.”
아주 드물게 그런 날이 있다.
잠깐이지만 해가 가려질 때가 있다. 하지만 가려져가는 과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전조도 보지 못했기에, 금적자는 말을 하고 난 후 머리를 긁적였다.
어둠은 하북과 하남을 덮고, 안휘까지 뻗어갔다.
천화서고도 어둠에 잠겼다.
“이게 무슨 일이냐?”
“진법이 오류를 일으켰나 봐요!”
“당장 모든 진법을 점검하여라!”
두 손자와 함께 뜰을 거닐던 천화서고 노가주도 엽불의 어두움과 마주했다.
동쪽 바다도, 북해빙궁도 다를 건 없었다.
“왜 추위가 느껴지지?”
북해빙궁의 현유신녀는 서늘한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북해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추위를 모르고 지낸 그녀였지만 이 어둠 안에서는 스산함을 느꼈다. 매우 불쾌하기까지 하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놀라는 소리, 혹은 비명.
겁에 질려 움츠러들며 속삭이는 목소리들.
엽불이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이 어둠은 귀무(鬼霧).
귀무가 닿는 곳은 어디든 연결되어 엽불은 산 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원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들려왔다.
멀리 북동쪽.
“설마…… 엽불?”
“엽불이 깨어난 건가?”
운부산 주변.
풍제와 당명이 엽불을 입에 올렸다.
“그럴 리가 있소이까. 단혼각주는 천 년이 차려면 아직 이십여 일이 남았다 하지 않았소이까?”
검존은 그럴리 없다며 부정했다.
“아니, 이건 엽불이 틀림없어요. 이 음산함이 귀기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현음신녀도 엽불을 떠올렸다.
그녀도 이런 기이한 한기는 처음인 것이다.
그 목소리를 엽불이 들었다.
그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짙어졌다.
원하던 목소리였다.
자신을 아는 이.
조금 더 귀기울였다.
“엽 사형! 사형이로군요! 오셨군요! 나의 외침을 들었군요!”
단예령의 석실에도 귀무는 스며들었다.
그녀가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주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형…….”
천롱삭 안 드러난 주란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엽불은 더 찾았다.
찾고자 하는 이는 아직이었다.
찾아야 할 목소리는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그 부근에 있을 터인데…….
산 자 중 의미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연능화의 의식 속에서 보았던 자.
연능화의 의식을 지배하던 서생.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가.
“엽불, 내가 보이나 보구나.”
“흐릿하게.”
“넌 살아 있군.”
“죽어 있다.”
“어디에?”
“후후후………….”
분명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놈을 찾아야 한다.
‘귀안(鬼眼).’
들을 수 없다면 본다.
귀무가 퍼진 곳에 머물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선에 엽불은 자신의 시선을 연결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보는 수많은 광경을 엽불이 보았고, 귀안의 공능에 죽은 자와 산 자는 엽불이 보는 것을 보았다.
“이, 이상한 게 보여!”
“뭐, 뭐야?”
“공동묘지?”
“나, 나도 보여!”
“다 같은 것이 보인다고? 왜?”
“시, 시체들이…….”
천하 각지에서 모든 이가 눈앞의 현실의 광경과 겹쳐 보이는 산야의 무덤과 시체들을 보며 경악했다.
그렇게 엽불은 찾았다.
주란의 눈을 통해서였다.
“그래, 너로구나.”
엽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귀무 속에 있는 천하의 모든 이들의 귀에 들려왔지만 후공에게는 더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주란의 눈을 바라보면서였다.
“일찍 왔네? 너희는 도통 약속이란 걸 모르는군.”
연능화가 미녀도의 약속 기한을 앞당기더니, 이번엔 엽불이었다.
엽불이 답했다.
우수를 뻗었다가 당기는 자세에,
파아아아앙!
쏘아져 나감에 공간이 파도치듯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