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응, 나 마드리드 출신
- 와 이거 진짜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지네
- 축따 오늘 선발은 아니지? 근데 실시간 채팅창이 열려 있네
- 별튜브 관리해주는 분 있다더니 그분이 열어놓으신 듯
- 강병훈 있는데 주전으로 뛸 수는 있을까 걱정되긴 한다
- 와 직관 진짜 부럽다 알렉스 둠바 개멋있을듯
마침내 다가온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
여름이 한 일은 축구를 보며 유건의 별튜브에서 구독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라고 실시간 방송을 켜고 축따 화이팅 화면만 올린 채 채팅방을 열어둔 것.
덕분에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축따의 팬들은 모여서 과연 유건이 출전을 할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와아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과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 간의 친선 경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오늘 라인업은 거의 현재 대표팀의 베스트 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병훈, 김수영 선수를 주축으로 한 열한 명의 선수들이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습니다.”
“축구팬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대표팀에 승선한 유건 선수도 오늘 벤치에 대기하고 있죠!”
국내에서 진행되는 평가전이었기에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해설자들이 말한 대로 오늘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선수들이 현재 올림픽 대표팀의 베스트 라인업.
과연 그들이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에이스 선수이자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신성 중 한 명인 알렉스 둠바를 뚫어낼 수 있을지도 관심사였다.
알렉스 둠바.
지난 시즌 1군으로 콜업되어 이제 막 한 시즌을 치렀을 뿐이지만 벌써 ‘마드리드의 벽’이라고 불리고, 20살의 나이로 월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89cm 98kg의 피지컬.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주력.
그 두 가지를 갖추고 있는 그의 앞에서 프리메라리가의 뛰어난 공격수들도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AT마드리드는 올해 리그의 왕좌를 거머쥐었다.
비록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일찍 탈락했지만 말이다.
“오늘 과연 우리 선수들이 둠바 선수를 뚫을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과장이 아니라 지금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체구를 가졌군요.”
“쉽진 않겠지만 우리 선수들! 오늘 한 번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삐이익-!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목에 힘을 주고 소리 지르는 관중들의 함성이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그 옛날 붉은 악마라고 불렸던 대한민국 관중들의 전통적인 응원가와 박수를 치면서.
‘어우, 저거 뚫을 수는 있으려나.’
경기를 진행 중인 둠바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속으로 생각하는 유건.
벤치에서 봐도 확연히 보이는 압도적인 피지컬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선사한다.
작은 동산 하나를 세워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은 그는 나이지리아의 골문을 굳건하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계의 평가가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그야말로 철벽.
프리미어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국의 유망주들마저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우스 햄튼에서 핵심 유망주 대접을 받으며 리그에서 몇 번 날카롭게 수비 공간을 가로지르던 강병훈의 전진패스도,
단단한 수비와 강력한 세트피스 공격력으로 강등권에서 항상 벗어나는 번리에서 교체 출전하는 김수영도,
모두 둠바의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커버 범위 앞에 가로막혔다.
“감독님, 크로스는 아예 안 통하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말로만 듣고 영상으로만 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쟤는 소문이 모자란 것 같다.”
“볼 나가면…, 병훈아!”
김진용 감독은 코치와 얘기를 나누던 도중 반대편 사이드에서 스로인 상황이 되자 강병훈을 부른다.
밖에서 보기에도 모든 축구팀의 주요 공격 루트 중 하나인 크로스가 올라가도 둠바의 머리에 다 차단되고 있었기에.
“애들한테 말해서 크로스는 지금부터 땅으로만. 저 괴물을 상대하지 말자고.”
“미들도 약간 불안불안하니까 조금 더 집중하고!”
“넵 알겠습니다.”
‘좋은 선택인 것 같긴 한데, 결국 둠바를 못 뚫으면….’
시작한 지 단 20분이 되었지만, 부분적으로 전술을 변경하는 김진용 감독이었다.
경기장 밖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키는 강병훈도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감독의 말을 눈앞에서 무시하진 않았다.
옆에서 보던 유건도 감독의 전술 변경에는 동의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결국 골을 넣기 위해서는 둠바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저 덩치를 뚫으면 되는 거잖아.’
물론 주목받는 유망주이자 경기 보는 눈이 꽤 탁월한 강병훈도 유건과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다.
‘윙이 벌리지 말고 조금 좁혀서 2대1 패스를 통해서 뚫으면….’
‘개인기로 뚫어주마.’
서로 둠바를 뚫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할지는 약간 다르겠지만.
‘맨마킹 너무 빡센데…, 어떻게 된 놈이 달리기도 이렇게 빨라서는!’
그 와중에도 전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수영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며 골을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렇지!”
“이제 저기로 패스하면!”
다시 시작된 경기 중 오랜만에 찾아온 대한민국의 역습 상황.
코너킥의 세컨볼을 따낸 왼쪽 사이드백이 주는 패스를 건네받은 것은 강병훈.
상대 수비가 네 명 남은 상황에서 압박을 들어오는 한 명의 선수를 손쉽게 벗겨내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며 말하는 코치진이었다.
그리고 약간 길어 보이는 듯한 드리블에 달려드는 또 한 명의 수비수를 연속된 동작으로 반대 발을 이용해서 떨쳐낸다.
“Oye, asiático, ya llegué(이봐 동양인, 내가 이미 도착했다구).”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 인마!”
두 명을 제쳐낸 강병훈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둠바.
자신의 머리를 넘어가는 코너킥을 보자마자 수비 진영으로 복귀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내려왔고 수비 자세로 재정비하면서 말한다.
영어는 세계공용어였기에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스페인어로 도발하면서.
‘이놈만 뚫어내면!’
분명 더 좋은 공격상황을 만들어낼 기회가 있었다.
둠바를 뚫어야만 골을 넣을 수 있을 거라는 강병훈의 뇌리에 박힌 생각.
그 생각은 가슴 한편에 하나의 감정을 불러온다.
자신이 조금 더 돋보이겠다는 욕심이라는 감정 말이다.
양쪽 윙, 사이드백, 후방의 수비형 미드필더 모두가 올라오고 있는 아주 좋은 역습 상황.
거기서 강병훈의 욕심이 이끈 것은 패스보다는 드리블.
이미 자세를 낮추고 수비에 집중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헛다리를 짚는다.
오른쪽으로 가려는 바디페인팅과 함께 한 번 휘둘러지는 오른발.
그리고 한 번 더 반대 방향으로 치려는 왼쪽 동작은 꽤 효과가 있었는지 둠바도 움찔한다.
그 찰나, 최종 선택을 오른쪽으로 내리고 공을 치고 나가려는 강병훈.
투-욱!
“Es bastante rápido, pero sólo es una habilidad asiática(꽤 재빠르지만 동양인의 실력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
눈앞에 있는 수비수가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는 점.
살짝 뻗어도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긴 다리를 이용해 앞으로 나가기 위해 친 공을 빼앗는 둠바.
역습을 위해 모두가 올라가고 있던 상황에서 공을 빼앗긴다면, 그 역풍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치명적인 위기로 말이다.
“저, 저거 아이구!”
“…크흠, 멍청한 놈!”
“패스를 주면 되는데!”
코치진과 감독 및 벤치의 선수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흘러나오는 사이, 나이지리아의 공격이 시작된다.
빠르게 수비에 복귀한 건 둠바를 비롯한 중앙 수비수와 미드필더들뿐.
대한민국의 진영에는 상대편 선수가 더 많은 상황이었다.
“아으! 왜 안 걸리냐고!”
뻗은 발 옆으로 살짝 지나가는 공을 커트해내지 못한 것을 대표팀의 수비수가 아쉬움의 감정을 담아 외치는 사이 만들어지는 일대일의 상황.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골키퍼였지만 가볍게 구석으로 밀어 넣는 슛은 막을 수가 없었다.
출-렁!
“다시 집중하자! 아직 전반전일 뿐이야!”
“하, 이 정도는 수비가 막아줘야….”
“강병훈, 주장으로서 말하는데 선 넘지 마라.”
단체로 코너 라인 쪽에 가서 특유의 리듬을 타며 댄스 세레머니를 하는 나이지리아 선수들.
그들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표팀 선수들을 김수영이 박수를 치며 독려한다.
그 와중 들려오는 강병훈의 개 같은 소리.
축구를 잘하더라도 자신의 실수인데도 이런 정신상태가 말인가.
삿대질을 하며 한마디 하는 주장에게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입을 삐죽이는 건 이미 중계 카메라에 잡히고 있었다.
삑! 삐이익-!
“아 얘네 빡세네.”
“강병훈 대충 하지 마라. 아까 실수 한 번 했다고 멘탈 나갔냐? 왜 계속 공을 뺏겨.”
“내가 원할 때 공을 바로바로 주면 그런 일 없을 거 아니야!”
“…뭐라고?”
그때부터 어긋난 강병훈과 김수영의 호흡은 경기 흐름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20분간 거의 반코트 경기를 하며 두들겨 맞는 대표팀이었다.
라커룸으로 들어오며 하는 대화에서도 강병훈으로 인한 트러블이 조금씩 생겼고.
중재하는 김수영이 있었기에 큰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실점 전에는 플레이가 나쁘지 않았다. 근데 실점 이후의 플레이들은 축구팬들에게 욕먹기 딱 좋아 보였다.”
“다들 정신 안 차려?”
“대표팀 경기가 애들 장난 같아?”
“너네가 어떤 리그에서 뛰고 있든 여기는 다르다. 수많은 축구선수 중에 태극마크를 달고 뛸 수 있게 뽑힌 거라고 짜식들아!”
불같은 김진용 감독의 호통은 라커룸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고, 자연스레 선수들의 입도 굳게 닫혔다.
한바탕하고 나서야 코치진들이 말없이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그때까지 말이다.
“강병훈, 후반전엔 유건이랑 교체다. 머리 식혀라.”
“넵! 열심히 뛰겠습니다!”
‘…드디어!’
슬며시 분위기를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던 유건은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병훈이 그런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지만 감독 바로 앞에서 자기가 어쩌겠는가.
고개를 슬쩍 돌려 전방을 주시한 채 오히려 더 크게 대답하는 유건이었다.
하프 타임이 끝나고,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22명의 선수.
그중에는 이제까지 안 보였던 반짝이는 머리를 가진 유건이 태극마크를 단 채로 비장한 표정을 짓는 게 카메라에 잡힌다.
삐이익-!
그리고 시작된 경기.
“Hazte el tonto, asiático!(재롱부려봐라, 동양인!).”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압박에 당황한 나이지리아 수비형 미드필더의 실수로 공을 빼앗아낸 유건.
하지만 이제 그의 앞에는 나이지리아의 에이스 둠바가 있었다.
강병훈과 같이 처음 공을 잡고 자신 앞에 선 유건을 향해 스페인어로 크게 소리치며 위협하는 둠바.
그러나 유건의 귀에는 너무 익숙한 언어였다.
“No grites por primera vez, grandulón!(초면에 소리 지르지 마라, 덩치만 큰 놈아!)”
“…너, 너 스페인어 할 줄 아니?”
“응, 나 마드리드 출신.”
마치 자신들의 비밀 얘기를 알아듣는 화교 출신의 사람을 바라보는 중국인처럼,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둠바.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며 자신의 출신을 밝힌다.
앞으로 세계 무대에서 수없이 부딪히게 될 유건과 둠바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