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치사한 놈
찰칵-! 찰칵-!
“당연히 기분 좋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저보다 잘하시는 많은 선배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함께 노력해서 최대한 높이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사실 메달은 따고 싶긴 하지만….’
바르셀로나로 출국하기에 앞서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에게 각자 기자들이 붙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고, 유건도 질문에 하나하나씩 대답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통상적인 질문.
대표팀에 승선한 소감과 올림픽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간단히 대답한다.
스페인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한국에 들어와 이중국적으로 병역문제는 유건에게도 남아있었다.
버티고 버티면 어떻게든 외국 시민으로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공식적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해줄 올림픽 메달 관련 답변은 속으로 삼켰다.
“…서울 유나이티드 관련 질문들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이적에 관련된 내용도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답변드릴 내용은 없구요. 올림픽과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인 FC 선배님들과 팬분들께서 많은 응원을 해주셔서 그에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선택적으로 답변하는 유건이었다.
서울 유나이티드 관련된 질문에는 답변을 기피해 버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악의적인 뉴스 기사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들과는 단 한 순간이라도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K리그1의 팀들이 유건을 노리고 있다는 뉴스가 몇 번 나왔고, 계속 나오고 있었기에 이적 관련 질문들도 있었지만 간단한 답변으로 일축했다.
뱉은 말 그대로 아직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는 않은 부분이었기도 하고 당장 앞에 남아있는 일정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답변을 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은 것은 용인 FC 선수 및 직원들과 팬들에 관련된 질문들뿐이었다.
“네, 별튜브는 꾸준하게 할 생각입니다. 팬분들과 소통하는 게 저는 기분이 좋거든요.”
별튜브에 관한 생각을 물어보는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출국수속을 위해 유건은 자리를 떠났다.
이미 하나둘씩 대표팀 선배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친 뒤 수속장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건아! 오랜만이다 이놈아. 우리 팀으로 올 생각 없냐?”
“에이, 포지션 겹쳐서 안 돼요. 저 경기 보러 갔을 때 그분 엄청 잘하시던데요.”
“크크 니가 더 잘해 인마. 아무튼 용인이 승격하면 내년 리그는 더 박 터지겠는데.”
“우리 팀 되게 잘합니다 선배. 방심하시면 큰코다치실 거예요.”
“아무튼 너나 나나 FA컵 못 뛰고 여기 왔는데 돌아가서 결승에서 만나면 좋겠다. 어휴 내가 남아서 싸가지 없는 서울 유나이티드놈들 코 좀 납작하게 해줬어야 되는데.”
수속을 밟는 유건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을 걸어오는 김현규.
이미 인천 유나이티드가 유건을 노리고 있다는 기사는 나온 지 오래되었기에 자신의 팀으로 이적하라는 장난스런 말을 건넨다.
하지만 유건은 같은 포지션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를 칭찬하면서 슬쩍 그 요청을 피해 갔다.
그리고는 FA컵에 대한 얘기.
4강에 진출한 두 팀의 선수로서, 김현규가 속한 인천 유나이티드는 서울 유나이티드와 4강에서 매치가 결정되어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대표팀에서 친해진 그와 결승에서 우승컵을 놓고 다투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라고 잠깐 생각했던 유건.
아주 잠깐이었다.
‘…선배, 죄송한데 이번에는 서울 유나이티드의 승리를 바라겠습니다.’
하지만 유건은 김현규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서울 유나이티드의 승리를 바랐다.
자신의 손으로 어떤 방식으로라도 직접 복수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돌아와서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사실 복수에 앞서 필요한 건 용인 FC가 결승에 진출해야 하는 것은 인천 유나이티드와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4강까지 올라온 강팀과의 매치가 남았고, 유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팀원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이미 그들은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쉽게 질 팀이 아니라 강팀이었기에.
물론 유건이 경기를 뛸 때보다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부족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
“모두들 장시간 비행하느라 고생 많았다. 미리 공지했던 대로 내일까지는 휴식을 취하고 모레부터는 바로 경기를 위한 훈련에 돌입할 예정이니 각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설마 이 중요한 시기에 말 안 했다고 해서 음주를 즐기는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팀에서 그런 미친 행동을 하는 놈은 실력 여하 상관없이 출전명단에서 뺄 거니 알아서 해라.”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 후, 예약해둔 버스를 통해 곧바로 숙소로 이동했고 각자 배정된 방으로 이동하기 전 로비에 잠깐 모여 김진용 감독의 일정 브리핑이 이어졌다.
약 10일 뒤부터 시작될 경기를 위한 한국팀의 일정은 시차 적응을 마치고, 모레부터 바로 조별 예선 통과를 하기 위한 훈련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집트, 코트디부아르, 아르헨티나와 한 조에 편성이 된 조별 예선.
8강 진출을 위해서는 최소 2위안에 들어야 가능한 상황에서, 올림픽 대표팀의 도전이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건이만 따라다니면 되는 거지?”
“우리 막내 가이드 좀 받아볼까!”
“유명한 가우디 건물들은 구경해보고 싶은데, 거기 가려면 택시를 타는 게 낫나?”
“형님들 걸어서도 갈 수 있고 버스로 충분합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십쇼!”
바르셀로나에 떨어진 건 낮시간이었기에 시차적응을 위해 미리 비행기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한 대표팀.
덕분에 브리핑 이후 짐을 간단히 푼 다음 바로 관광을 나온 유건 일행이었다.
김수영, 김현규, 이호준, 송화경을 포함한 총 다섯 명.
숙소를 나오기 전부터 이미 유건은 스페인은 자신의 고향이라며 가슴을 두어 번 치면서 자신 있게 가이드를 자처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마드리드에 주로 있었지만 바르셀로나를 아예 와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관광지로서는 더 볼 게 많은 도시였으니까.
“저기 맞은편에 보이는 게 까사바뜨요라고 유명한 가우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진짜 색이 알록달록하고 예쁜데, 이것만 마저 드시고 이동하시죠.”
“…그거는 크흠, 인터넷이 아마 저보다 정확하게 알려줄걸요?”
첫 번째 목적지는 까사바뜨요.
맞은편의 맥도날드에서 첫 끼 식사를 익숙한 맛의 햄버거로 장식하는 그들이었고, 먹으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는 유건이었다.
물론 전문 가이드처럼 상세한 설명을 할 정도로 지식이 풍부하지는 않았기에 선배들이 모르는 질문을 할 때면 인터넷을 추천했다.
더군다나, 자유시간을 이용해 별튜브 방송을 켜고 있던 유건이었기에 별튜브 채팅창에서도 팬들의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역사 같은 건 말 안 해도 알고 계시죠? 우리 모두에게는 인터넷이 있습니다 여러분!”
- 축따형 가이드해준다며. 설명 제대로 해줘 봐!
- 이야 근데 스페인 진짜 좋아 보인다. 당장 휴가 쓰고 나도 가고 싶네
- 매일 축따형만 보다가 다른 선수분들 웃는 거도 보니까 너무 좋네
- 도착하자마자 스페인 음식이 아니라 맥도날드 먹는 거 나만 웃기냐
한국시간으로는 밤이었기에 채팅방의 화력은 돌아다니면서 간간이 말하는 유건이 읽기는 힘들 정도로 강했다.
더불어 유건이 훈련이 시작되고 올림픽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은 방송을 쉴 수밖에 없다고 미리 공지를 해둬서인지 평소보다 더 많은 팬들이 방송을 보고 있었다.
맛있는 스페인 음식들을 두고 햄버거를 먹는 일행을 보며 웃기도 했지만, 사실 오늘 별튜브에는 유건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을 보며 얘기를 나누는 게 주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평소 국가대표 훈련 영상이나 리그 경기를 제외하고는 이런 방송에 출연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형님들, 이제 쇼핑도 하셨으니 다음은 까사밀라라는 곳이구요.”
“이번에는 구엘 공원이라고 유명한 곳인데 제가 잘 모르니 대충 구경하고 인증샷이나 찍으십쇼!”
“여기가 그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입니다. 밖에도 이쁘지만 안으로 들어가야 진짜니까 얼른 들어가시죠!”
저녁까지 진행된 유건의 가이드는 같이 다닌 선배들이나 방송을 시청하는 팬들에게 꽤 만족스러웠다.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자신이 관광왔을 때 어떤 얘기를 들었고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들은 꽤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선배들과 함께 시차 적응을 하는 하루를 즐겁게 보낸 유건은 기분이 좋았다.
‘개같은 새끼들이랑은 또 마주치겠네.’
지금까지는 모른 척했지만 서울 유나이티드 선수들 중 대표팀에 승선한 선수들도 올림픽을 위해 왔다.
계속 그들과 떨어져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보지만, 어떻게든 마주쳐야만 한다는 현실은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루이스! 여기!”
“거어언!”
대한민국 대표팀은 사실 하루 정도 빨리 도착한 편이었고, 다음날부터는 서서히 다른 나라 대표팀들도 입국을 하나둘씩 하고 있었다.
훈련이 시작되면 자유시간이 줄어들 예정이었기에 그전에 유건이 바라던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인 루이스를 시간이 나면 경기 전에 만나보는 것.
그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바로 저녁에 약속을 잡아서 만나게 된 것이다.
후안 루이스.
바로 이 년 전 레알 마드리드에서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활약으로 괴물 신인으로 불리우고 이제는 레알의 핵심 스타 선수로 올라섰다.
그는 조별 예선에서 만나게 될 아르헨티나 올림픽 대표팀의 에이스였고, 그의 존재와 다른 유망주들 덕분에 명실상부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잘 지냈지? 형이 왔다 이 자식아!”
“크크, 아직 약속했던 빅이어를 두고 펼치는 경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랑 만나는 경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너네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데 지면 어쩌려고 크크.”
“어릴 때부터 누가 계속 이겨왔더라?”
오랜만에 만나 서로 맞붙게 될 경기를 얘기하며 도발부터 시작했다.
언제라도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라는 존재는 유건에게는 아직까지 루이스가 유일했기에, 더 반가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도발은 루이스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그의 말대로 레알 마드리드의 유스 시절부터 항상 승부가 걸린 내기를 하면 유건이 졌었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엄청났던 친구였고, 실력에 비해 겸손한 척하면서 자신에게만은 항상 뽐냈었다.
‘치사한 놈, 유스 시절을 들먹이네!’
그러나 그게 비꼬려는 의도가 아닌 그저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건이었기에 화가 나거나 그러진 않았다.
물론 속으로 옛날 얘기를 끌고 오는 루이스가 치사하다고는 생각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