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정에 연연할 문제는 아니야
[올림픽 축구 대표팀 에이스 유건, 별튜브에서 공개한 여자친구의 정체는 과연 누구?]
[차세대 스타 유건의 여자친구를 파헤치다!]
기쁜 마음으로 별튜브에서 공개한 여름이와의 관계는 생각보다 큰 파장을 가져왔다.
축따튜브의 구독자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기도 했고,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직 올림픽 축구의 좋은 성적에 대한 국민들의 환희가 선수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니까.
당사자인 유건으로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도가 집중되어 있을 줄 몰랐고, 혹시나 배우 생활을 하는 여름이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으휴, 그런 건 이미 너희가 공개한 이상 어쩔 수 없지. 요즘 사람들이 남에게 관심이 얼마나 많은데!”
뉴스 기사가 관련된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유건의 집.
일일연속극에서 여름의 할머니 역할로 출연하는 강혜리를 초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그녀에게 손녀 남자친구의 존재를 소캐시켜 주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유건으로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뒤 처음으로 그녀의 주변인에게 인사하는 것 아닌가.
“할머니, 그래서 어때요! 우리 오빠 제가 말했던 대로 괜찮죠?”
“…말만 번지르르 한놈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네.”
긴장하고 있는 유건의 맘도 모른 채 강혜리에게 붙어서 방실방실 웃음을 짓는 여름이 괜히 미워지려다가도 얼굴을 보면 그 마음이 바로 사라졌다.
봐도 봐도 왜 예쁘단 말인가.
아무튼, 내심 어린 여름이 이상한 놈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던 강혜리도 만족했다.
손녀 같은 자신의 어린 후배에게서 시선을 한시도 떼지 못하는 유건의 눈빛은 보지 않으려 해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여름이는 소속사에는 분위기 보고 미리 말해두든지 해. 그런 거 하나하나가 이 바닥에서는 신뢰가 되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정체가 드러나도, 저 녀석이면 오히려 너네 대표가 환영하면 환영했지 싫어하진 않겠어.”
“정말 그럴까요? 어제부터 그것 때문에 걱정이 돼서 잠도 못 잤습니다. 혹시 배우 생활에 지장이 갈까 봐서요!”
다음으로는 앞으로의 대처에 대한 얘기.
연예계 생활을 오래한 강혜리는 여름에게 스캔들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녀도 한때 스포츠 스타와 불타는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면서, 국민들도 나쁘게 보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국민 영웅 취급을 받는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면 말은 다 했다고 봐도 된다며, 유건와 여름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내가 유럽에 가더라도 할머님같이 의지할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네.’
여름과의 연애를 시작한 건 좋았지만, 자신에게는 유럽진출이라는 꿈이 있었다.
그게 현실이 된다면 그녀가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기정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혜리의 존재는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자가 아니지 않은가.
‘…남자는 안 되지, 크흠.’
누가 됐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게 성별이 남자인 사람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유건이었다.
이유는 없지만, 그냥 꼴 보기 싫을 것 같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용인 FC로 복귀하기가 이틀 남았던 날은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빨리 유건이 돌아오기만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
“모두 잘 지내셨죠?”
원래라면 내일 훈련 때 복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유건의 일정이었지만, 하루 빠르게 복귀해서 구단의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올림픽 멤버들은 각자 팀으로 다들 흩어졌기에 서울에서 딱히 혼자서 할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혼자인 이유는 자고 일어나자마자 지방으로 촬영을 가야 하는 여름이가 강혜리의 밴에 같이 탑승해서 가버렸던 탓이다.
유건이 순간적으로 너무 유명해져서 그렇지, 사실 나여름도 인기를 얻고 있었다.
재벌들의 불륜과 음모가 판을 치는 일일연속극, [재벌의 사생활].
초반에는 반응이 미적지근했으나 갈수록 시청률이 올라가 제법 인기를 끄는 연속극이 되었다.
선한 역할로 나오는 강혜리의 옆에서, 금전적 지원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20대 여성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던 나여름.
아름다운 외모와 싹싹하게 구는 손녀의 연기는 특히 40대 이상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물론, 젊은 층이 다수 포함된 커뮤니티에서는 아직 연기력보다는 외모 때문에 이목을 끌었고 말이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선배님들!”
“막내야, 선물은?”
“형 거 뭐 사 왔냐?”
“…기념품 말고 저도 왔는데요, 형들?”
다음으로는 선배들이 진행 중인 훈련장으로 방문을 했다.
짐 한 바가지를 손에 들고 말이다.
자신을 반겨주리라 믿고 기분 좋게 들어온 유건이었는데, 박범호를 비롯한 선수들은 유건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눈맞춤만 하고는 준비해온 기념품을 낚아채 가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감독님, 저 돌아왔습니다!”
“푹 쉬고 내일 돌아와도 된다니까 인마!”
“하루빨리 준비해야죠, FA컵 진짜 이기고 싶다구요.”
용인 FC의 선수단, 코치들과 해후를 나누던 중 훈련장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상찬 감독을 보고는 달려가서 말을 거는 유건이었다.
좋은 활약으로 대한민국의 축구를 세계에 보여주고 온 그리웠던 막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슬며시 웃으면서도 장난을 걸어본다.
단 한 시즌이었지만 많은 소중함이 느껴지는 선수였고, 내년이면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노력해야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선수 중 한 명일 뿐이라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상찬 감독이었다.
“건이도 왔으니까 남은 시즌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지난번에 이어서 한 번 더 얘기하도록 하겠다.”
“우선 여러분의 좋은 활약으로 K리그1에 올라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
“누가 경기에 뛰게 될지 아직 모르겠지만 남은 매 경기에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어라.”
“1부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보다 다들 한 단계 발전해야 되는 것을 항상 잊지 말도록, 리그에서도 지지 말고! FA컵도 이긴다!”
“예, 알겠습니다 감독님!”
팀을 떠나있던 유건이 돌아오는 순간, 용인 FC의 1부 승격에 대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했다.
자신들의 색깔을 만들어야 1부리그에서 생존은 물론 좋아해 주는 팬들도 늘어날 것이니까.
‘…모두 다 같이 가는 건 불가능하겠지.’
이상찬 감독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환상이었다.
격변의 과정 중에서는 다음 시즌을 위한 이적 시장에서 팀을 떠나는 선수도, 팀에 새롭게 들어오는 선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모두가 다 더 좋은 조건과 대우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 실력 부족으로 강제적으로 내쳐지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프로의 세계란 그렇게 무자비한 것이었다.
좋은 활약으로 팬들과 팀을 웃게 해주고, 승리를 가져올 선수.
그게 프로리그의 모든 구단들이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선수다.
운동선수라면 한 번쯤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사소한 하나, 두 개의 활약으로 재계약 제안을 받거나 영입 제안이 들어올 수도 있기에 모든 선수가 그저 노력할 뿐이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열심히 하면 자신의 미래가 밝아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
***
“…그래, 니 마음 잘 알겠다. 그럼 지금 제안 들어온 것들은 다 거절하면 되겠냐?”
“우선요. 조만간 에이전트 계약하면 이제 직접 처리할게요! 괜히 귀찮게 해드리네요.”
“일찍도 말한다 이놈아. 그나저나 에이전트는 누구로 할 생각이냐?”
이상찬 감독의 사무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유건, 이상찬, 박 팀장.
확실하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유건이 국내팀과 번리의 오퍼를 거절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다른 유럽팀의 제안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만 팀을 떠나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의견을 전달한 뒤 나온 얘기는 에이전트 관련.
“그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요. 이제 찾아봐야죠!”
“역시 내 그럴 줄 알았다. 아직 얘기된 건 하나도 없는 거지?”
“박 팀장, 그때 그 친구는 어떤가? 단순히 생각만 해본 건데 그 친구라면 유건이랑 잘 맞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유건의 대답에 예상했다는 듯이 이상찬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박 팀장에게 질문했다.
예전부터 에이전트를 희망했지만, 경력을 쌓기 위해 스카우터팀으로 먼저 입사한 직원.
“아, 저희 팀에 있는 최 대리 말하시는 거군요! 어차피 최종 목적이 에이전트였던 친구라 좋아라 하겠는데요.”
“한번 만나 뵙고 얘기해볼 수 있을까요?”
“조만간 물어는 봐주마. 근데 감독님, 그 친구 우리 팀 에이스인 건 알고 계시잖아요? 인원 충원은 알아서 두 배로 해주셔야 됩니다.”
“…크흠, 그건 단장님 마음 아니겠나!”
인연은 언젠가 이어진다고, 예전에 깊은 인상을 새겨주었던 스카우터팀 신입이 떠올랐던 이상찬 감독이었다.
처음 막내로 입사했을 때부터 “구단의 일을 배워 최종적으로는 세계 최고 선수의 에이전트가 될 겁니다!”라고 말하던 그 친구가.
당시 직원 중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패기가 마음에 들었었고,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예 새로운 에이전트를 구하는 것보다는 안면이 있는 구단 직원과 편안한 상태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말이다.
‘최 대리님이 에이전트를 꿈꾸시고 계셨다고…? 이건 정에 연연할 문제는 아니야.’
당연히 유건도 매일 볼 때마다 인사를 하는 직원이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의 최종적인 목표가 에이전트였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계약 이전에 얘기를 나눠보긴 하겠지만 앞으로의 프로 축구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마음이 맞는지가 중요했다.
안면이 있어서, 잘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상황으로는 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하는 유건.
‘…내가 어떤 팀에 잘 맞을지, 발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론 유건의 조건이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진심으로 자신의 발전을 함께 고민해줄 사람을 찾는 의도 빼고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계약한 선수에 대해 보여줄 진심이 필요했다.
유건이 유럽진출을 하게 된다면 어떤 팀에 어울릴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며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요소는 무엇인지.
이 팀의 영입 제안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가면 주전으로 뛸 가능성이 있는 건지.
예를 들어, 그런 요소들 말이다.
‘얘기를 나눠봐야겠지만, 빠르게 결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야.’
판단해야 될 부분이 많기에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거라는 것을.
미래를 위한 선택의 순간이 빠르게 찾아올 거라는 그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