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전화나 해볼까
“바요스와 건이 각자 수비진과 공격 포지션의 움직임을 컨트롤한다. 미드필더진은 서로 얘기하도록.”
“나바스는 반 박자만 빠르게 볼을 처리하고, 가르시아는 빌드업의 시작에서부터 관여한다.”
“수비진은…, 쿠아바는 골을 넣어라.”
그것을 받쳐주기 위해 다른 팀원들에게도 세부적인 지시가 들어갔다.
이미 세비야 FC를 상대하기 위한 훈련에서 연습했던 플레이들이었지만,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이니에스타였다.
그들을 상대로 최대한 미드필더진의 경쟁을 지원하는 진형.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플레이할 유건 한 명만 빼고 말이다.
‘…가보자고, 결승으로.’
그리고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전과 마찬가지로 오늘 경기의 승리와 패배는 자신이 어떻게 플레이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로시츠키와 외질의 동기화율이 적용된 이후로 훈련에서 독창적인 창의성을 보여주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유건.
그의 창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멍청이, 항상 말하지만 부담 가지지 마라.”
“건, 너 하나 실수한다고 안 지니까 훈련에서 하던 대로만 해라.”
이니에스타의 브리핑이 끝나고 경기를 위해 라커룸을 나서는 헤타페 CF 선수들.
목을 감으며 말을 걸어오는 가르시아에 이어 훈련에서는 대단했다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마르티노.
자신을 믿어주는 그들이 있었기에 부담감을 한 번 더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부담감이라는 감정을 내려놓은 마음속의 그 공간에 채워야 할 것은 욕망이었다.
승리라는 매혹적인 단어를 쟁취하기 위한 욕망.
***
삐이익-!
휘슬이 울리고 시작된 경기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진행되었다.
리그나 챔피언스리그에 비해서는 중요성이 떨어지고 주목받지 못하지만 우승컵이 걸려있는 대회였다.
그래서인지 두 팀 모두 패배라는 단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은 마찬가지.
퍼엉-!
“…아으, 아쉽다!”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두고 다투는 경쟁팀과의 지난 경기에 베스트 멤버를 내보냄으로써 오늘 경기는 1.5군으로 출전한 세비야 FC.
하지만 미드필더진을 위주로 풀어가며 사이드에서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플레이 자체는 비슷했고, 첫 번째 유효슈팅을 날린 주인공은 바로 모하메드 마르무쉬.
유건과는 올림픽에서 맞붙었었던 그도 발전을 거듭해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선발로 출전했던 것.
골대의 구석으로 향하는 멋진 슈팅이었지만 헤타페 CF 골키퍼의 성공적인 펀칭이 선제골을 헌납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나바스, 나이스 슛!”
다음 번에 공격에 성공한 것은 헤타페였다.
이번에는 로시츠키나 외질이 아닌 지단처럼, 오른쪽 날개에 위치한 실바가 전달해준 공을 많은 압박 상황에서도 간단한 개인기와 함께 지켜낸 유건.
그 공을 가지고 앞으로 드리블하며 치고 나가는 척하다가 힐킥으로 뒤로 살짝 내준 패스.
달려 나온 수비수를 속이며 만들어낸 빈 공간으로 유건이 미리 인지하고 있던 나바스가 달려오며 강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물론, 골대를 살짝 스쳐 지나가며 아쉽게 선제득점을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정말 치열합니다! 헤타페의 경기력이 정말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게 보이죠?”
“맞습니다! 그러나 아직 티는 안 나지만, 사실 조금 더 급하긴 할 겁니다. 헤타페의 입장에서는 세비야보다 많은 골이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전반전이 점점 흘러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캐스터들이 언급하는 대로 결승전 진출을 위해서는 두 골 이상이 필요한 헤타페 CF였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플레이가 다급해질 수도 있고 불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전제가 붙는다면 오히려 좋았다.
만약 먼저 득점에 성공한다면 역전을 당할 상황에 보다 더 조급해질 수 있는 건 세비야 FC였으니까.
투우욱-!
‘…좋은 움직임이라고, 마르티노!’
그리고 그 전제조건은 전반 16분경, 유건의 발끝에서 만들어졌다.
경기장의 왼쪽 지역에서 볼을 잡고 있었기에 오른쪽 날개 카를로스 실바는 중앙 지역의 숫자를 채워주기 위해 이동해있었다.
차단당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반대편 전환을 위해 유건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그 순간.
실바를 마크하기 위해 따라 나간 세비야 FC의 왼쪽 사이드백이 있던 공간으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르티노.
그 순간적인 움직임을 파악해낸 유건은 살짝 회전을 안쪽으로 주고 공을 감아서 차듯 패스를 보냈다.
촤아악-! 촤아악-!
“닿아라…, 젠장!”
“크로스 조심!”
그 패스를 차단하기 위해 실바를 마크하던 세비야의 왼쪽 사이드백과, 수비를 지원해주기 위해 돌아온 미드필더 한 명이 급하게 다리를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원하는 공간으로 향하는 유건의 패스는 그들의 발을 스쳐 지나갔다.
‘…후우웁! 미친놈아, 조금 길잖아!’
태클을 피하기 위해 안쪽으로 회전을 먹인 패스였기에, 코너 라인 밖으로 거의 나갈듯한 패스.
유건에 대해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숨을 크게 한 번 더 터트리며 폭발적인 질주를 지속하는 마르티노였다.
그 결과, 세비야 선수들과는 달리 발이 닿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공이 나가기 전에 말이다.
후욱-! 후욱-!
“쿠아바!”
코너 라인으로 나가기 전에 가까스로 도착한 마르티노가 공을 잡아두자마자 골키퍼와 중앙 수비수 사이의 공간으로 빠르고 낮은 크로스를 보냈다.
이미 중앙 수비수의 뒤쪽 공간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던 헤타페 CF의 스트라이커 디데 쿠아바에게.
자신의 발에 맞고 떠나는 공을 바라보는 마르티노는 가쁜 숨을 이제서야 몰아 쉬었고 말이다.
투욱-!
빠르게 들어오는 땅볼 크로스였기에 골대 앞은 넣고 막기 위한 양 팀 선수들의 움직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강한 슈팅은 필요가 없었다.
단지 공에 누구의 발이 닿는지가 가장 중요했을 뿐.
그 상황에서 앞서 있는 중앙 수비수의 뒤쪽으로 이미 위치를 잡는 데 성공한 쿠아바의 왼발이 공에 닿는 데 성공했다.
출렁-!
“으아아아아!”
혼잡스러운 상황 속이었기에 발에 닿은 뒤 살짝 굴절이 된 공의 경로는 골키퍼가 예측하기 어려웠다.
방향이 꺾인 슈팅은, 운이 조금 따라주며 골대를 지키는 골키퍼의 다리 사이 공간으로 빠져나가 골대의 그물을 흔들었다.
헤타페 CF가 선제득점에 성공하는 순간이었고 괴성을 지르며 골대 바로 뒤에 위치한 홈팬들에게 안겨버리는 쿠아바였다.
“여러분을 위해서 골을 넣었으니, 안아주고 환호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듯이.
와아아아-!
“나이스 골이야!! 한 골 더 넣어보자고!”
“건, 미친 패스였어. 마르티노도 나이스 플레이!”
“이리와, 멍청이들아! 내가 안아준다!”
차례차례 쿠아바의 등 뒤로 달려 와서 점프를 하며 팬들과 함께 기쁨을 즐기는 헤타페 CF의 선수들.
가장 먼저 도착한 나바스, 가까이 있던 실바가 차례로 도착하며 골을 축하해줬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유건과 쿠아바로 구성되어 있었던 멍청이 부대에 마르티노도 합류시킨 가르시아가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환호했다.
홈구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
1차전에서의 패배를 원점으로 돌리는 선제골을 넣은 기쁨은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표출되었다.
- 축따형! 축따형! 축따형!
- 와 미친, 저 패스 마르티노 보고 준 거 맞겠지? 진심 소름 돋았다
- 축따형, 외질 따라 하기로 결정했다더니 이런 킬패스도 바로 따라 할 수 있었던 거야?
- 이번 골 장면 말고 플레이 중에 로시츠키 같은 부분도 확실히 있는 것 같음.
└ 07-08 시즌 하이라이트 봤던 구너로서 동감. 공만 잡으면 경기 템포를 순간적으로 올려버리는 로시츠키 같은 선수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함
그 세레머니 장면을 보면서, 최창훈이 켜놓은 별튜브 중계방송에서 대화를 나누는 축따튜브의 팬들.
미친 활약을 이어 나가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주목받는 것은 순간순간 달라진 선택을 내리기 시작한 유건의 플레이가 더 보는 맛이 있다는 주제의 대화.
그런 댓글이 달리는 이유는 지단에 이어 로시츠키, 외질을 따라 해보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유건의 방송이 얼마 전이었는데, 벌써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한 골, 아니 두 골 더 넣어보자!’
세레머니를 마치고 킥오프를 위해 진형을 넘어오는 상황에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뒤편에 있는 세비야 FC의 골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유건이었다.
그는 승리를 위해 득점을 멈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라도 득점할 능력이 있는 상대 팀이었기에,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한 골을 넘어 두 골 이상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삐이익-!
전광판의 시계가 전반 18분을 가리키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경기가 재개되는 휘슬이 헤타페 CF의 홈구장 콜리세움에 울려 퍼진다.
***
“바요스, 조금만 템포 죽이자!”
그러나 득점 이후에도 현재 경기 스코어와 관계없이 양 팀이 팽팽하게 경기를 진행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추가적인 골을 넣기 위한 시도가 반복적으로 실패하자, 팀원들이 서서히 급해지는 것을 느낀 유건은 공을 키핑한 뒤 바요스를 향한 백패스를 보내며 외쳤다.
공격진과 수비진을 이끌며 리딩하는 두 선수였기에 유건의 외침은 곧 헤타페 CF 전체 팀원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귀여운놈, 나이에 비해 흥분도 하지 않고 언제나 침착하단 말이야.’
자신에게까지 돌려진 공을 발 앞에 둔 헤타페의 캡틴 다니 가르시아는, 오자마자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건에 대해 흐뭇하게 생각하며 그의 의견을 지지해준다.
“그래, 다시 천천히 하면서 골을 넣어보자고!”
“수비진에서 실점을 막아줄 테니 한 골 더 넣고와!”
단순하게 생각만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파트너인 중앙 수비수와 골키퍼를 비롯한 근처에 위치한 사이드백, 미드필더에게까지 들릴 크기의 목소리로 한 번 더 외치면서.
든든하게 골대를 지켜주겠다는 멋진 말과 함께 말이다.
“또 한 단계 발전하는군, 미래의 에이스가.”
“쿠아바의 파고드는 움직임도 빨랐어.”
그리고 그 시각, 다과를 먹으며 코파델레이 4강 2차전 경기를 틀어놓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바로 미켈 아르테타와 산티 카솔라였다.
선제골을 터트린 쿠아바의 칭찬도 빼놓을 수 없었지만 상황의 시작을 만든 것은 유건의 환상적인 킬패스였으니까.
“템포를 죽이면서 팀을 조율하는 타이밍은 장점이라고 할 정도로 확실하게 잡네.”
경기가 치열하게 진행되는 와중에도, 갑작스런 백패스와 함께 아래쪽으로 손을 두 번 내리는 제스쳐를 취하는 유건을 보며 감탄하는 카솔라.
나이에 비해 경기를 읽는 눈이 탁월한 것은 오래 지켜봐 왔기에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중계화면으로 지켜볼 때 급해 보이는 팀의 흐름을 경기장에서 직접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줄곧 저런 패스를 보여주던 친구가 떠오른단 말이지.”
“마침 그 말 하려 했는데! 전화나 해보자고, 오랜만에.”
유건의 플레이를 보고 한 사람이 떠오른 듯 잠시 감상에 빠지는 둘이었다.
카솔라의 말에 휴대폰을 들고 온 아르테타는 전화번호부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누른다.
[메수트 외질].
아직도 가끔 회자되는 아스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깜짝스러운 영입선수 중 하나.
무관 행진을 끊었던 독일의 슈퍼스타이자 아스날 레전드였다.
아르테타와 카솔라의 선수 시절, 함께 뛰었던 동료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