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환생[1]
1장 환생[1]
“크으.”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삼 개월 만에 마시는 홍화주였다. 단맛이 일품인 홍화주가 오늘따라 더 달게 느껴졌다.
갓 병상에서 일어난 놈이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면 의당주가 야단법석을 피울 테지만, 여긴 천영각이다. 그것도 천영각 연무장 뒤편에 펼쳐진 대나무숲. 그 대숲 중앙에 몰래 마련된 정자.
천영검대원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이자···.
“대주님-!”
쿨럭. 느닷없는 외침에 나는 먹던 술을 반쯤 기침과 함께 토해냈다. 고개를 돌리니 대숲 저편에서 사내 하나가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순식간에 정자 앞에 도착해 나를 흘겼다.
“왔냐?”
“왔냐요?”
“왜.”
“왜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놈에게 피식 웃어준 나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놈은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 응시하다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삼 개월 만에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술이라뇨?”
“너도 그렇게 누워있어 봐라. 술 생각 안 나나.”
“그래도 그렇지.”
놈이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그 잔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계속 마셨다. 이렇게 말 많은 놈이 밖에선 무구일검(無口一劍)이란다.
무구일검 소이겸.
천영검대의 부대주이자 상대에게 자비도, 말도, 감정도 일절 베풀지 않고 베어버리는 냉혈한 무인.
“아무튼. 몸은 좀 괜찮으신 거예요?”
소이겸이 이 잡듯이 내 몸을 살피며 물었다. 삼 개월이란 긴 시간이 지났으니 상처로 가득했던 내 몸엔 거미줄 같은 흉터만이 남았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지.”
“오는 길에 보니까 의당주께서 대주님 잡아 오라고 난리던데요.”
“몰래 도망치느라 잠행술까지 썼다.”
“그걸 말이라고···.”
소이겸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다시 술을 들이켰고 소이겸도 결국 피식 웃으면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돌돌 말린 채 딸려 나온 그것은 두툼한 보고서였다.
“이겸아.”
“네, 대주님.”
“나 이제 막 병상에서 깨어났다.”
“술 그만 마실 거면 술병 이리 주세요.”
“...시작해.”
술을 포기할 순 없었다. 아직 반병이나 남았는데. 내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소이겸은 지난 삼 개월간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정파와 마교. 정천맹과 천마신교의 전쟁이 끝난 지도 삼 개월. 혼란스러웠던 강호는 정천맹의 지휘하에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정파오주(政派五柱)였던 정파 오대 세력은 이제 천하오주라 불리고 있었고 정천맹은 정파 연합에서 무림 연합으로 발돋움했다.
많은 무인과 많은 인력이 희생됐지만, 다시 많은 인원이 빈자리를 채워갔다.
정천맹주 검신(劍神) 백도천은 기나긴 강호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림일통을 이루어낸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단신으로 천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천영검대주 천우혁은 천하제일인이라···.
“잠깐.”
“네?”
나는 소이겸의 말을 끊었다. 뭔가 황당무계한 단어가 섞여 있었다.
“천하제일인?”
“네.”
“누가?”
“대주님이요.”
“왜?”
어이없어하는 내 반문에 소이겸이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뿌듯함까지 섞여 있는 눈빛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천마를 죽였잖아요.”
그랬지. 천마는 분명 내 손에 죽었지.
반나절 넘게 이어진 혈전 끝에 간신히 칼을 꽂아 넣었었다. 오랜 염원이자 내 복수의 시작이었고 내 복수의 끝이었던 천마의 심장에.
마교의 마인들에게 고향이 불타 사라지고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던 그 날. 운 좋게 마을 밖으로 심부름을 다녀왔다 홀로 살아남게 된 그 날.
그날부터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다.
살아남은 고아는 뒷골목 싸움꾼이 되었다. 싸움꾼은 다시 낭인이 되었고 낭인은 기연을 얻었다. 기연은 명성을 얻었고 명성은 정천맹으로 흘러 들어갔다.
정천맹은 검신 백도천과의 만남을 주었고 만남은 다시 가르침을 주었으며 가르침은 천영검대의 자리를 주었다.
그렇게 천영검대의 자리가 천영검대주가 되었을 때 나는 복수를 얻었다.
삼 개월 전 그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복수를 얻는 대신 모든 걸 잃었다.
무공도. 목숨도. 아, 목숨은 아직 아닌가?
“크으.”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들이켰다. 소이겸은 다시금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공식적으로 떠도는 소문인데, 맹주님께서 곧 사퇴하신다고 합니다.”
“그래.”
“알고 계셨어요?”
“대충은.”
“병상에만 누워계시던 분이요?”
“여기 오기 전에 잠시 뵈고 왔다.”
“그건 잘하셨네요.”
소이겸에게 참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지 싶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듣는 칭찬이겠구나.
“보고는 그만하고 좀 앉아라. 목 아프다.”
“그러려고 했어요.”
소이겸이 보고서를 다시금 대충 말아 품속으로 꾸겨 넣었다. 그 또한 그 많은 걸 다 읽으려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냥 대주님이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맹주님 얘기도 드려야 했고.”
“그러냐.”
“왜 그렇게 덤덤해요? 천하제일인이라니까요?”
“자고로 고수란 겸손해야 하는 법이지. 과묵해야 하고. 너처럼 말 많으면 고수 못 된다.”
“헐.”
소이겸이 코웃음과 함께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며 내 탓을 하는 거여서 그냥 못 들은 척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무 말 않고 있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대신 한차례 바람이 대숲을 훑고 지나갔다.
쏴아아아.
시원하고도 평화로운 바람이었다. 나는 그 바람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소이겸에게 주려던 걸 주었다.
“이게 뭡니까?”
“뭔지 몰라?”
“뭔지는 알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걸 왜 주시냐고요?”
소이겸이 내 손에 들린 신분패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수수하지만 기품있는 장식. 몸통은 더럽게 비싼 만큼 구하기 어렵다는 청옥에 무려 순금으로 천영검대주(天影劍隊主)라는 글씨가 음각되어있는.
“받아. 이제 천영검대주는 너다.”
“네?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애초에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가 아니었어. 알고 있었잖아?”
소이겸이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정천맹의 무인이 된 건, 천영검대에 들어오게 된 건 오로지 마교를 향한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걸.
“맹주님께서도 이미 허락하고 결정하신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부탁한다.”
부탁이라는 말에 소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래 내 부탁이라면 툴툴대면서도 안 들어준 적이 없던 그였다.
소이겸은 한참을 더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신분패를 건네받았다.
“고맙다.”
아니. 고마웠다. 나는 뒷말을 삼키며 다시 술을 마셨다. 이제 거의 다 마셔가는구나. 소이겸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앞으론 어쩌실 겁니까?”
“모르겠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복수에 미쳐 산 인생이었다. 그 뒷일까진 생각해본 적도 그럴 틈도 없었던 인생.
“아니. 계획도 없이 이렇게 그만두신다고요?”
“하하.”
소이겸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될 기미가 보였기에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넌 뭐 하고 살 건데?”
“저요?”
“그래. 언젠가 너도 그만둘 때가 오게 된다면. 뭐 하고 살래?”
“그러고 보니 저도 계획해둔 건 없네요.”
“그런 주제에 또 잔소리하려고 했던 거냐?”
“그게 아니라···.”
소이겸이 멋쩍게 웃으며 무언가를 떠올리듯 대숲 너머를 응시했다. 계획은 없었어도 막연히 생각해둔 건 있었다는 듯.
“그냥 뭐, 고향에 내려가서 가업도 잇고 무공수련도 하고 평범하게 살겠죠. 이래 봬도 제 가문이 고향에선 꽤 유명한 무가 아닙니까. 말씀드렸었죠? 그래서 제 검법도···.”
나는 신나게 떠들기 시작하는 소이겸의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가 꿈꾸는 미래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 평범하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은 꿈이고 좋은 계획이며 좋은 미래일 것이다. 응원한다, 이겸아.
나는 진심 어린 마음과 함께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 홍화향이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향긋함에 취한 내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
천하제일인 천우혁.
그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천마와의 혈전에서 입은 부상이 양패구상에 가까웠기에, 삼 개월간 병마와 싸우며 버텼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고.
다시 며칠 뒤엔 검신 백도천이 정천맹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천우혁의 죽음을 대신해 살아있는 자신은 맹주직에 더 이상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며, 그의 죽음을 통감하고 애도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대신 차기 맹주가 정해지기 전까진 계속 정천맹을 이끌어가겠다는 뜻도 함께였다.
그렇게 강호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
눈을 떴을 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해했다.
나도 그만큼 놀랐으니까. 아니 나만큼 놀랐을 리도 없었다.
‘아직 살아있다?’
분명 그날, 나는 죽었다. 나를 휘감았던 그 날의 그 기운은 분명 죽음이었다. 주마등이고 뭐고 뭣도 없었지만, 생명이 사그라드는 그 느낌은 또렷이 기억했다.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의아했고 황당했다. 멍하니 상념에 잠겨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괜찮으세요?”
사내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겸이냐?”
“네?”
사내가 반문했고 나는 시선을 옮겼다. 아, 아니구나. 소이겸보다 좀 더 어린 사내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내이기도 했다.
“누구야?”
사내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만큼 황당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묻는 게 그럴 일인가?
“도련님. 접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너야말로 왜 그러냐. 분명 낯선 얼굴인데. 도련님이란 호칭은 또 뭐고. 난 기억에도 없는 사내를 뒤로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윽.”
몸 여기저기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아팠다.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 같은 통증이었다. 몸을 살펴보니 곳곳에 타박상이 있었고 반쯤 아문 검상도 보였다.
“좀 더 누워 계세요. 하월이가 가주님께 도련님 깨어나셨다는 소식 전하고 의원을 부르러 나갔습니다.”
“하월이? 가주님?”
“네. 무섭게 자꾸 왜 그러세요.”
사내는 이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방문을 힐끗거렸다. 의원은 대체 언제 오냐는 듯이.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방문을 살폈고 이어 주변을 살폈다.
이곳 역시 내가 모르는 장소였다. 꽤 비싸 보이는 풍경화를 비롯한 여러 가구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있었다.
“여긴 어디지?”
“네?”
“여긴 어디냐고. 되묻지만 말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라.”
나는 짐짓 짜증 섞인 어조와 함께 사내를 마주 바라봤다. 무복을 입고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무인인 것 같은데.
“어디긴요. 여긴 유씨세가이고 도련님의 방이죠.”
사내는 드디어 내가 바라던 대로 대답이란 걸 해주었다. 유씨세가. 도련님. 이해는 안 갔지만 나는 계속 물었다.
“너는?”
“저는 왕삼입니다. 도련님, 지금 장난치시는 거죠?”
“왕삼? 왕가네 셋째?”
“네. 맞습니다. 왕가네 셋째 왕삼.”
간결하고도 단순한 이름이라 오히려 뇌리에 박힌다. 그런 왕삼이 내 몸을 이 잡듯이 살폈다. 하는 짓이 왠지 소이겸을 떠올리게 했다.
“농도 치시고. 몸은 좀 괜찮아지신 겁니까?”
“농···이라고?”
“도련님?”
왕삼이 나를 살피는 사이, 나도 같이 내 몸을 다시 살펴봤다. 내 몸 같지 않은 이질감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동경 속에 웬 청년 하나가 나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농이겠지. 이 상황이 농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