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환생[2]
1장 환생[2]
“기억을 못 한다?”
이번에는 낯선 중년인이었다. 선한 인상 속에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고 듬직한 체구에 허리춤엔 검을 차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눈에 깃든 기운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이끌고 아우르는 것에 익숙한 패자(霸者)의 기운. 이 자가 왕삼이 말했던 유씨세가의 가주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신체에 큰 충격을 받은 환자들은 이렇게 자신이 누군지 조차 기억을 잃고는 합니다. 좀 더 요양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겁니다.”
의원은 내 두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고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하면 의원도 까무러칠 테지.
“정말 사실이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느냐?”
중년인은 한 발짝 더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의원은 슬쩍 옆으로 비켜서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의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의원의 진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한들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 나조차도 믿기 힘든 일인데 말이다.
죽었던 천우혁이 지금은 이 청년, 유진휘의 몸을 빌려 환생했다는 사실을.
“후우. 그래. 몸은 좀 괜찮고?”
중년인이 내 상처들을 한차례 훑었다. 그 눈길엔 나를 향한, 아니 자기 자식인 유진휘를 향한 걱정이 가득 묻어나왔다.
“별것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별것이 아니라니?”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중년인이 아니었다. 쾅! 소리가 나도록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온 여인이었다.
“대, 대부인을 뵙습니다.”
왕삼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 여인이 청년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이게 별것이 아니냐? 이게 별것이 아니야?”
여인은 우악스럽게 내 몸을 흔들어 쥐었다. 우악스럽지만 따스한 손길이기도 했다.
“이따위로 흠씬 두들겨 맞아 쓰러진 채 돌아와서는 별것이 아니야? 어?”
짝!
따스하다는 말은 취소다. 그녀의 손길은 여장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매서웠다. 짝짝, 찰진 소리가 두어 번 더 터져 나왔다.
“부, 부인. 아직 환자요.”
중년인이 황급히 말리지 않았다면 몇 대는 더 내 등짝에 꽂혔을 손길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여인과 중년인을 올려다봤다.
태어나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맞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어머니라는 익숙지 않은 존재에게.
“최근에 다시 검을 쥐었다길래··· 어미는 네가 이겨낸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뭐? 기루? 도박장? 그따위로 살 거면 다시 때려치워라!”
때려치워? 무가의 자식이 무공을? 기루와 도박은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다시 동경 속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멍든 얼굴엔 초췌함과 무기력함이 언뜻 묻어나오고 있었다.
“몇 년을 방황했으면 이제 이겨내고 딛고 일어서야지. 일어서서 그저 평범하게 무가의 자식이 되어 살라고 했는데. 그게 그리 어렵더냐? 진휘야.”
호통이었던 여인의 외침은 어느샌가 애원이 되어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 부인, 그만 진정하시오. 나중에 합시다. 조금 나중에.”
중년인은 다급히 여인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잠깐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본 눈빛엔 ‘일단 푹 쉬거라.’ 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천천히 왕삼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밖에 없다.”
“네?”
“들어야 할 얘기가 좀 많은 것 같은데.”
그날, 나는 왕삼과 밤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태어난 나에 관한 이야기. 아니. 유진휘라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였다.
*
유씨세가.
산서성 진청에서 꽤 명망 높은 무가(武家)이자 검가(劍家)로 최근엔 그 기세가 좀 기울었다고 했다.
가주이자 청년의 아버지인 중년인은 유운호(劉夽浩). 어머니는 엄예화(嚴禮化).
두 사람 덕에 유씨세가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산서에서 그들의 명성은 높았다.
그런 두 사람의 외동아들이자 현재 내가 환생한 청년, 유진휘(劉進輝).
왕삼의 말에 따르면 유진휘는 어릴 적 신동 소릴 들을 정도로 무재가 뛰어났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밝은 아이였다고.
그런 아이가 열일곱의 나이에 가전무공을 팔 성까지 익히고, 산서의 후기지수 중 두각을 나타내어 정천맹 소룡단(小龍團)에 입단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깜짝 놀랐다.
‘소룡단이었다니.’
소룡단. 정마대전 당시 정천맹에서 새롭게 결성했던 무력 단체. 그들은 각 지역의 후기지수들로 이루어졌으며 특정 지역이나 문파의 수비 및 수호 역할을 맡는 집단이었다.
소호단(小虎團)도 마찬가지. 소룡단과 소호단은 맡은 바 책무를 충실히 해내는, 강호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이었다.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전쟁이 한참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중원 곳곳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소룡단은 전멸했다.
‘정확히는 딱 한 명. 생존자가 있었지.’
소룡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며 지키던 곳은 선우약가. 그 가문은 정천맹에게 있어서도 잃을 수 없는 중요한 가문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의를 배출해낸 곳이자 집안 대대로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의가였기에 전쟁의 승리를 위해선 꼭 필요했던 곳.
결국 소룡단 전멸 직전, 전방에서 활약하던 천영검대가 긴급하게 파견되어 그곳에 도착했다.
그래. 바로 나의 천영검대였다.
거기서 베었던 게 마교의 십장로 중 일인이었던 혈랑검(血狼劍)과 혈랑대 수십 명.
나와 천영검대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었다. 소룡단 전원이 희생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그때 살아남았던 소룡단의 무인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그의 행방은 돌연 사라졌지만, 그 행방을 쫓을 틈이 없던 우리는 전방으로 복귀했다.
‘그게 이 청년이었고.’
나는 방 마루에 걸터앉아 오늘따라 유난히도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엔 저 별들은 그냥 별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시선엔 저 별 하나하나가 소룡단의 단원들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청년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 전쟁에서 도망쳤다는 자괴감.
어린 나이엔 이겨내기 힘들 수도 있었을 감정들. 청년은 결국 심마에 빠져 검을 놓았다.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어리석긴. 그때 소룡단의 희생이 없었다면 선우약가는 멸문했을 것이다. 정천맹. 선우약가. 나아가 강호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다.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왔으면 떳떳하게 잘 먹고 잘살았어야지. 미련한 새끼.’
나는 다시 나에게 실컷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계속 밤하늘을 주시했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더욱 큰 빛을 발하는 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유진휘의 삶은 저렇게 빛날 가치가 있었다.
만일, 그때 혼자 살아남았던 그 청년을 찾아 수고했다는 한마디. 네 잘못이 아니라는 한마디.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는 그 한마디만이라도 전해주었다면.
그랬다면 유진휘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천우혁은 복수심에 미쳐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였다.
지금에 와서야 후회한다,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면 헛소리겠지. 이 청년으로 환생한 건 내 운명이다. 같은 운명론 따위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난 네게서 찾으마.’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이대로 이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떳떳하게 잘 먹고 잘살아주마. 청년의 부모가 원하는 평범한 삶과 함께.
*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원래부터 나는 잠이 적은 사람이었다. 잠은 사치였고 그 시간에 차라리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자는 게 내 지론이었다.
과거에는 그 지론이 복수의 길이 되어주었다. 이번에는 그 지론이 당당한 삶의 길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어제 앉아있던 그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내 몸을 관조했다. 단전엔 대략 십 년 정도의 내공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인 청년에게는 적지 않은 양임이 분명했다. 평범한 심법으로 십 년이라는 시간을 꾸준히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니까.
정마대전 중간에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무공수련도 다 때려치웠다고 하니 그전까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만큼 케케묵은 내공이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제대로 사용해본 적도 없을 테니 단전 속에서 고이고 고여 정순함을 잃었다.
신체 또한 무인이라기엔 부족했다. 활력이 없었고 근육의 탄탄함도 사라졌다. 유연함은, 그런 게 있었을까 싶은 정도였다.
과거의 내 몸과 비교하자면 창천을 거닐던 새가 깊디깊은 망망대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
한마디로 심신이 제대로 무너졌다. 이따위 몸 상태론 떳떳하게 잘 먹고 잘살기는커녕 눈먼 칼에 맞아 죽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럴 순 없지. 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로 한 이상은. 낯부끄럽긴 하지만 죽기 직전엔 천하제일인 소리도 들어봤던 나인데.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준 무공이 지금 내가 운용하기 시작한 일영청심공(日映淸心功)이었다. 낭인이었던 시절 칠채산에서 마인들을 상대하다 죽을 뻔했을 때 얻은 기연 중 하나였다.
칠채산 어딘가에 있을 높은 절벽 중간쯤에서 발견한 동굴. 정신없이 도망치다 떨어지고, 허우적거리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돌부리에 매달려 숨을 돌리다가 발견한 그 동굴이었다.
그곳엔 두 권의 비급과 이름은 모르지만 신묘한 풀뿌리가 하나 자생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두 무공을 익혔다.
동굴 안에서 일 년 동안 수련에 전념했다. 주인 모를 두 개의 무공은 당시의 내 느낌으론 천외천의 무공이었다.
고작 일 년 수련한 걸로 날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마인들을 손쉽게 도륙했다. 내 복수의 진정한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누구의 무공인지 말해줄 수 없겠느냐?’
정천맹주, 그러니까 검신이라 불리던 백도천도 당시 내 무공을 보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이름 모를 동굴에서 발견한 거라고? 엄청난 기연을 얻었구나. 그걸 스승도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익힌 너도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졌으니 가능했겠지.’
‘천마에게 복수를? 그럼 우린 공통의 적을 가진 사람이구나. 함께 하자. 내가 도와주마. 너도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천영검대. 내 직속, 기밀 검대다. 천마를, 나아가 마교 전체를 무너트릴.’
‘이놈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맹주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나도 체면이란 게 있지. 영감님이 뭐냐.’
‘일영청심공. 묵 군사가 알아본 바로는 전전대의 무공이라더구나. 극상승의 심법인 건 확실하지만, 어느 분이 창안하신 것인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
나는 단전에 잠들어있던 십 년 내공의 일주천을 끝내며 눈을 떴다. 극상승의 심법답게 내공이 단숨에 정순함을 되찾았다.
확실히 일영청심공은 기존에 익혔던 심법이 무엇이든 거스르지 않았다. 심법뿐만 아니라 그 어떤 무공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내공을 쌓는 속도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 정순한 다음은 내공의 양이다. 십 년 치 내공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천일백야검법(天日白夜劍法).
동굴에서 발견한 두 번째 비급. 그걸 익히기 위해선 최소 이십 년의 내공이 필요했다. 그걸로도 전반부 일초식과 이초식이 한계였다.
‘당분간은 내공을 쌓고 망가진 몸을 뜯어고쳐야겠다. 사신무가 도움이 되겠지. 가전 무공도 살펴보고.’
사신무(四神武).
권, 수, 각, 장을 비롯해 모든 외공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격투술로, 뒷골목 싸움꾼 시절부터 사용해왔던 무술을 백도천의 가르침을 토대로 뜯어고쳐 창안한 무공이었다.
천영검대원 모두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기도 했다. 무기를 잃었을 때도 싸울 수 있도록 실전적이고 실용적으로 만들었고, 사신무에 의해 죽은 마인들은 수두룩했다.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운기조식에 빠져들려는 찰나였다.
“어? 도련님, 왜 여기 앉아서 졸고 계세요? 방에서 주무시지.”
한쪽 눈을 뜨자 빗자루를 든 채 날 쳐다보고 있는 왕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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