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외출[1]
2장 외출[1]
성화상단(聖化商團).
오래전부터 유씨세가를 후원해온 산서 지역의 유서 깊은 상단이라고 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는 덕망 높고 평판도 좋은.
상단주인 종승재(鍾僧齋)는 가주인 아버지와 죽마고우였고 덕분에 그의 여식과 유진휘 또한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두 분 모두 종소저와 도련님이 좋은 관계를 이어가길 원하셨죠.”
“좋은 관계?”
“남녀 사이에 좋은 관계면 뭐겠어요?”
왕삼이 음흉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징그러운 표정 짓지 말고.”
“징그럽다뇨? 저같이 순수한 영혼이 어딨다고.”
왕삼은 상처받았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여자 손도 못 잡아봤을 텐데.”
“앗. 저를 뭘로 보시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왕삼이잖아?”
“그 순수가 그런 순수가 아니라···.”
“아무튼. 지금은 좋은 관계가 아닌가?”
“지금은 아니죠. 과거에 도련님이 소룡단에 입단하겠다고 하실 때 종소저께서 크게 말렸거든요. 다투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딱히 교류가 없었죠. 더군다나 도련님이 돌아오시고 나서는···.”
뒤는 더 안 들어봐도 알겠다.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유시(酉時, 오후 5~7시) 초에 오신다고 하니 가주님께서 수련은 일찍 마치고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알았다.”
왕삼은 그 말과 함께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유시까지 수련을 마치려면 조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바쁘게 움직였다.
운기조식을 시작으로 체력 단련이 이어졌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시각에 맞춰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오후가 됐을 때 품속에서 비급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운류검법(雲流劍法).
최근 며칠간 익히기 시작한 가전 무공이었다. 유씨세가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내 평가는, 나쁘지 않다 정도.
천일백야검법과 비교하자면 그랬고. 운류검법 그 자체로만 놓고 보자면 상(上)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다.
부드러움 속에 쾌가 숨어있는 현묘한 정수가 담겨 있긴 했다. 상대방으로선 부드러움에 익숙해지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번개 같은 한 수에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휘릭!
내가 휘두른 검로에 부드러운 바람이 깃들었다. 그 바람을 타고 올라온 낙엽들이 몸을 휘감았다.
휙!
검을 곧게 내지르자 낙엽들이 전방에 모여 한데 뭉쳤다. 이어 그어지는 호선에 낙엽들도 다시 둥글게 퍼져나갔다.
낙엽들은 한참을 그렇게 내 검무에 맞춰 부드러운 춤을 췄다. 얼마나 췄는지도 모를 검무 끝에 내 검이 허공을 단숨에 조각냈다.
파스스!
낙엽 하나가 네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뒤따라서 떨어지는 낙엽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공만 충분했다면 네 조각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대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지.
‘역시 내공이 부족해.’
한 달 동안 수련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망가졌던 신체는 일정 수준 회복했다. 앞으로도 계속 단련하면 조만간 과거의 내 수준까지 도달할 것이다.
문제는 역시나 내공이었다. 일영청심공이 있다고 하지만 과거의 난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던 때가 많았다.
천일백야검법은 그만큼 내공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마지막 초식을 사용하는 데만 무려 이 갑자의 내공이 필요했으니까. 덕분에 최후초식은 실전에선 써먹지도 못했다.
‘네 내공이 삼 갑자가 됐다면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겠구나.’
‘영감님. 개 패듯이 패놓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잘도 믿겠습니다.’
‘허허.’
그래. 천영검대의 일원이 되기 전날 영감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어디서 영약이라도 안 떨어지나.
과거엔 두 번. 영약을 먹어볼 기회가 있었다. 기연을 얻었을 때 먹었던 신묘한 풀뿌리가 일 갑자의 내공을. 영감을 따라 정천맹에 들어갔을 때 그가 내어준 자령초가 반 갑자의 내공을 주었다.
이번 생엔 그런 기회가 있을까 싶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급할 게 없으니 천천히 가더라도 착실하게 내공을 쌓아가면 되겠지.
내가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왕삼이 소리쳤다.
“아까 한쪽으로 쓸어뒀던 낙엽이 왜 이렇게···.”
뜨끔한 나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조금 걷다가 돌아보니 울상이 된 녀석이 빗자루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
“하하. 자네 왔는가!”
해가 뉘엿하게 질 무렵. 예정대로 종승재가 방문했다. 왕삼이 말했던 그의 여식과 호위를 위한 무사 두 명이 전부인 조촐한 인원이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잘 지냈나?”
아버지와 종승재는 정문 앞에서부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들을 크게 반겼다.
곧 종승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한발 먼저 나서서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마지막으로 본 게 소룡단에 입단할 때였던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자랑스럽다.”
상인답지 않은 박력 있는 외모와 목소리였다. 진실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감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나를 향한 음성엔 왠지 모를 호감이 담겨 있었다.
“너희 둘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겠지?”
그런 종승재가 살짝 옆으로 물러섰다. 그의 여식인 종화설이 그곳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그래.”
그녀에게서도 상인답지 않은 기개가 느껴졌다. 미모 또한 뭇 사내들이 한 번쯤 뒤돌아볼 정도였다. 무공까지 익히고 있는 것 같았고.
산서 삼대상단 중 하나라고 하더니 확실히 두 사람 모두 평범한 기세는 아니었다.
“손님을 문 앞에 너무 오래 세워뒀군. 일단 들어가세. 식사 먼저 하세나.”
“사양하지 않겠네.”
나와 종화설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먼저 나섰다. 그렇게 아버지와 종승재를 필두로 다 함께 객청으로 이동했다.
산해진미까진 아니어도 신경을 많이 쓴 식사를 시작으로 작은 술자리가 마련됐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문답이 있을 땐 정중하게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건 종화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우리 둘 사이를 엮으려는 부모들의 일방적인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다.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슬슬 때가 됐다 싶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려고 했는데.
“자네 요새 무공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네.”
종승재가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노력 중입니다.”
“부족하다니. 너무 겸손한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야. 물론 한때 힘든 일을 겪어 잠시 방황했어도 지금은 다 이겨내고 있잖은가?”
뭔데 이렇게 금칠을 해주는 거지? 나는 입을 다물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에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그러니 이제 슬슬 가문의 일을 도와야 하지 않겠나? 마침 내가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예. 말씀하시죠.”
“며칠 뒤에 본 상단에서 중요한 거래가 있을 예정이네. 물건도 우리가 직접 호송을 맡을 계획이야. 그 상행에 동행해줄 수 있겠나?”
호송이라. 이번에도 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먼저 살펴봤다. 낌새를 보아하니 정신 차리고 무공수련을 시작한 아들이 다시 방황의 길을 걷지 않도록 붙잡아두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나는 두 분의 간절한 눈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가문을 후원하는 상단의 주인이 직접 부탁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세 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중 어머니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거절한단 말이냐.
“고맙네! 위험한 일은 아니니 마음 편히 가지고 며칠 뒤에 상단으로 와주게나.”
결국 환생한 이후, 나의 첫 외출이 결정됐다.
*
며칠은 금방 지나 내가 성화상단으로 향하기로 하는 날이었다.
“아들. 조심히 다녀와야 한다.”
어머니는 정문 앞까지 따라 나와 물가에 내놓은 자식 바라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성화상단은 우리 가문에 큰 도움을 주는 곳이다. 언행에 조심하고 맡은 일엔 최선을 다하거라. 사람들과의 관계엔 항상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고.”
“네.”
“왕삼이는 진휘를 잘 보필하도록 하고.”
“예, 가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옆에 서 있던 왕삼은 짐짓 호위무사다운 듬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더 두 분의 근심과 염려를 덜어드리고 세가를 나섰다.
성화상단은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반나절 부지런히 이동하면 도착할 거리였다.
“도련님. 식사 먼저 하고 가시죠?”
“그럴까?”
저잣거리를 벗어나면 한동안 걷기만 할 예정인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삼을 돌아보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죽립은 어디서 낫냐?”
삼 보 정도 뒤에서 따라오던 왕삼은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죽립을 푹 눌러쓰고 있었다.
“이거요? 이건 제가 도련님의 호위무사가 된 첫날 샀죠.”
“왜?”
“왜라뇨? 죽립이야말로 호위무사의 소양 아닙니까.”
“그딴 소양도 있었어?”
“헐.”
왕삼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지었어야 할 표정을 가로챈 녀석에게 나는 한숨으로 대신해주었다.
“그딴 걸 쓰고 퍽이나 잘 싸우겠다.”
“제 표정을 가리고 의도를 숨기는 거죠. 눈이란 마음의 창과 같다고도 하잖아요.”
왕삼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들을 읊으며 의기양양하게 으스댔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휙!
나는 기습적으로 녀석에게 주먹을 날렸다. 기습적이긴 하지만 내공도 힘도 실리지 않은 가벼운 일격이었다. 기본적인 무공을 익힌 왕삼이라면 아주 쉽게 피할 수 있는 수준.
퍽!
“억!”
하지만 왕삼은 피하지 못하고 정수리를 그대로 내주었다. 녀석이 울상을 짓고 머리를 손으로 비벼댔다.
“네 시야는 제대로 확보할 수 있어야지.”
누군가와 싸울 땐 제대로 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볼 수 있어야 그다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왕삼은 어느새 죽립을 벗어던진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움을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또요?”
“뭐가 또야?”
“또 가르쳐주실 건 없나요?”
없긴. 아주 많아서 문제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넵!”
씩씩하게 대답한 왕삼이 천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가 무공을 주었다지만 제대로 된 가르침까진 아니었을 테고, 금검대의 무인들에게 가끔 훈련받는 것으론 부족함이 많았을 것이다.
이따금 내가 수련하고 있을 때 이것저것 물어보려다가 주저하고 돌아서는 걸 본 적도 있었다.
“왕삼아.”
“네?”
“수련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와서 물어봐라.”
“...네.”
“나 대신 칼도 맞겠다는데 알려줄 수 있는 건 다 알려줄 수 있다.”
“너무 다는 알려주지 마세요. 꼼짝없이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잖아요.”
“하하.”
나는 짐짓 몸을 떠는 왕삼과 함께 다시 길을 걸었다. 적당한 객잔에 들러 두둑하게 식사를 마친 뒤엔 성화상단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상단에서는 상행을 떠날 준비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이 선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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