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외출[2]
2장 외출[2]
“종소저가 상행 대표인가 봐요.”
왕삼은 짐을 실은 마차 앞에 서 있는 종화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상단의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으며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고 하더니. 자식은 여식 하나뿐이라 걱정이 많다던 종승재의 고민은 그저 허언이었다.
“합류하자.”
“네.”
나는 왕삼과 함께 그녀 앞에 당도했다. 그녀에게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간 맞춰 왔네.”
“물론이지.”
“일단 와줘서 고마워. 아버지랑 유 가주님 두 분께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신 일인데.”
“날 위해 결정하신 일이라는 것도 알아.”
“그래. 그러면.”
종화설은 마차 곁에서 이것저것 점검하고 있는 짐꾼 한 명에게 언질을 줬다. 짐꾼은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금방 나타났다. 두 필의 말이 그의 손에 이끌려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걸 타고 마차 좌측에서 이동해줘. 유사시에 물건을 지켜주기만 하면 돼. 다른 잡일들은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가 가는 곳은 금룡문이고 상행은 이틀 정도 소요될 거야.”
“그러지.”
“이건 공식적인 역할이고.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어.”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최근에 산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단순한 산적이 아니라 연합체까지 이룬 전문적인 산적집단이야.”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놈들은 통행세 같은 것도 받지 않는다니까 마주치게 된다면 전투는 불가피할 거야.”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확실히 중요한 상행이라지만 상행치고는 무인들의 수준이 높았고 숫자도 종화설을 포함해 일곱이나 되었다.
“산적들을 상대하게 되면 힘을 보태달라?”
그런 일이 아니었으면 내가 동행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종화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나서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줘. 괜히 나서서 다치면 나나 상단의 입장에서도 곤란해지니까.”
예상치 못했던 말이긴 하지만 그녀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정보나 소문에 민감한 상인인 만큼 유진휘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을 테고.
최근 한 달간 무공수련을 열심히 했다지만 제삼자로선 사고 친 놈이 잠시 조용히 지내는 걸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그래. 굳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니 나서지 않을게.”
내가 쉽게 수긍하자 오히려 그녀가 놀란 눈치였다.
“미안.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서.”
“이해해. 이번 상행의 책임자니까 너로서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나였어도 그랬을 거다. 아니, 나였다면 불확실한 요소는 아예 배제하고 나섰겠지. 책임자 처지에선 올바른 선택이었다.
첫인상대로 확실히 그녀는 어린 나이치곤 범상치 않았다. 자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난 다시금 지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여식 걱정으로 엄살을 피우던 종승재가 떠올라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웃어?”
“아냐. 출발은 언제지?”
“금방 출발할 거야.”
그녀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상행이 시작됐다. 목적지는 북서쪽 지역의 금룡문. 나로서는 주변 풍경이나 감상하며 왕삼과 수다를 떠는 일이 다였다.
“떨려요, 도련님.”
“네가 왜?”
“제가 강호초출이잖아요.”
“그렇게 되나? 축하한다.”
“축하는 저희가 이 상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면 받고 싶네요.”
“우린 딱히 할 일도 없다잖아.”
“그래도요. 보는 것만으로도 큰 경험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왕삼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나.
“그래. 잘 지켜보자. 전문적인 산적집단이라니까.”
“전문적인 산적이라니. 무섭겠죠?”
“모르지.”
정마대전이 끝나고 정파 세력이 무림일통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진정한 일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적이 전문적으로 들끓는 걸 보면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 사파의 기세가 살아난 상황이고 그건 비단 산적뿐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새로운 맹주가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보니 누가 선임됐다고 했더라? 정파오주의 인물 중 하나려나. 나로서는 애초에 맹 내부의 정치와 관련해선 관심조차 없었기에 예상가는 바도 전무했다.
왕삼은 소문을 들었을 테니 그에게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미유산 초입이에요.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을 테니 다들 조금만 힘내주세요.”
“예! 소단주님!”
선두에서 지휘하는 종화설이 활기차게 외쳤다. 뒤따르던 인원들의 대답은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져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와. 멋있어요.”
“그러네.”
왕삼은 존경 어린 눈빛으로 종화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상단의 무인들에게 눈길이 갔다. 실력도 실력이고 단결력까지 높다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천영검대원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잘 지내려나.’
깐깐한 소이겸이 알아서 잘 이끌고 있을 테니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상념과 심심할 때면 말을 걸어오는 왕삼과의 수다와 함께 상행의 첫날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문제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야영을 끝내고 성도와 맞닿아 있는 숲속을 빠른 속도로 지나려 할 때였다.
“온다.”
일정 거리를 두고 옅은 살기가 느껴졌다. 하나의 무리가 한데 뭉친 데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였다.
“뭐가 와요?”
내 속삭임을 들었는지 왕삼이 물었고 다시 왕삼의 목소리를 들은 상단의 무인들이 긴장한 얼굴로 보고했다.
“나타난 것 같습니다!”
보고하자마자 종화설이 손을 높게 들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예!”
그녀의 명령에 마차를 중심으로 짐꾼들이 가장 안쪽에, 그 옆쪽에 나와 왕삼이 자리를 잡았고 다시 그 주변을 상단의 무인들이 인(人)자 대형으로 에워쌌다.
선두는 당연히 종화설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그녀가 이곳에선 가장 무위가 높았다.
숲속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파드득!
아침 새소리의 주인이었던 한 마리 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신호에 맞춰 하나의 무리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담하게 정면으로 거리를 좁혀온 놈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의 소유자들이었다.
나는 놈들을 보자마자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와. 누가 봐도 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꼬락서니네.
하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기에 힘겹게 표정을 바로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맨살에 호랑이 가죽만 뒤집어쓰고 오는 건 좀.
그사이, 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놈은 거대한 도끼를 붕 휘둘러 어깨에 걸친 뒤 누런 이를 내보였다.
“아이고. 보아하니 성화상단의 상행이 아니오?”
“그걸 알면서도 길을 막아?”
챙!
종화설은 기세에 눌리지 않고 검을 뽑아 들며 대꾸했다. 놈들로서는 웬 계집 하나가 나서니 우스울 수밖에 없었을 테고.
“아니까 길을 막지 이년아. 설마 네년이 상행 대표인 건 아니겠지?”
“내가 대표라면?”
“그럼 더 좋지. 네가 그 유명한 성화상단의 종화 뭐시기였나 그년이라는 거잖아. 아직 처녀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특상품이겠구나.”
“저 개새끼가!”
“저 산적새끼들이!”
덩치 사내의 조롱에 상단 무인들은 크게 격노했다.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가 놈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그때 종화설이 팔을 뻗어 제지했다. 그녀는 예상외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당신과 나. 둘이서 승부를 보는 게 어때?”
“당돌한 년일세.”
덩치 사내가 감탄과 함께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차갑게 얼어버린 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왜?”
이어지는 명령은.
“계집년 빼고 싹 다 쳐 죽여!”
정확히 열두 명의 산적들을 동시에 달려들게 했다. 맹수의 생가죽을 뒤집어쓴 놈들은 뿜어대는 살기만큼이나 실력도 상상 이상이었다.
“막아!”
“소단주님을 보조해!”
“자리에서 이탈하지 마라! 마차를 보호해!”
“보호는, 씨벌. 네놈들 목이나 잘 보호해라.”
“저년은 최대한 상처입히지 마! 두목 다음은 우리 차례니까!”
“이 벌레 같은 새끼들!”
곳곳에서 악에 찬 고함이 뒤엉켰고.
챙! 채채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커억!”
“컥!”
이어 살가죽이 찢어지고 꿰뚫리는 파륙음과 시뻘건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고 단말마의 비명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숲속이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말에 올라탄 채 마차 옆에서 그 광경을 차분하게 지켜봤다.
“도, 도련님.”
왕삼은 옆에서 겁먹은 얼굴로 나와 장내를 번갈아 주시했다.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괜찮아. 우리 쪽은 아직 다 살아있다.”
나는 저들의 혈전을 주시하면서 왕삼을 다독였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져서 그에 대해 고심하는 중이었다.
저들은 산적이다. 연합체까지 만들어 전문적으로 털어먹는다니 실력도 그만큼 높겠지. 그런데 그 실력이 지나치게 높았다.
종화설과 상단의 무인들은 이류에서 일류 사이. 그런 그들과 산적 열두 명이 비등한 형세였다. 아, 세 놈 죽었으니 아홉 명. 이쪽은 부상자 두 명.
문제는 산적들의 우두머리인 덩치 사내가 아직 나서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놈의 생김새가 어딘가 익숙했다. 거대한 도끼. 대머리. 정수리 주변에 깊은 흉터. 구 척에 달하는 체구.
흐릿하게 떠오르던 기억이 놈의 생김새를 살피면서 점점 명확해졌다. 머릿속의 안개는 금방 걷혔다.
‘거악부(巨嶽斧)?’
해마다 정천맹에서 지정하는 사파 세력의 백대악인. 말석이긴 하지만 분명 그 백 명 중 하나였던 거악부였다.
실력 보다는 죄질로 줄을 세운 순서이긴 하나, 실력이 있으니 정천맹의 추격을 피해 악행을 일삼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놈은 분명 상당한 고수였다.
정마대전이 일어나는 시기에도 백대악인의 수배서는 매년 선정됐기에 본 기억이 있다. 산동에서 활동하던 놈이라고 한 것 같은데 산서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느닷없이 산적질을.
놈을 주시하는 사이에도 전황은 팽팽했다. 마침내 지켜보고만 있던 거악부가 지면을 박찼다.
거대한 덩치는 햇빛을 가려 짙은 그늘을 만들 정도였다. 그런 놈이 치켜올렸던 도끼를 그대로 내리그었다.
콰앙!
도끼는 목표로 했던 종화설 대신 바닥 위에 틀어박혔다. 깊은 구덩이가 파였을 만큼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잘 피했네. 나도 모르게 죽여버릴 뻔했어.”
거악부가 킬킬거리는 사이, 바닥을 두 바퀴 굴러 간신히 피한 듯한 종화설이 자세를 잡고 숨을 골랐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짓쳐 들었다.
부웅!
사선으로 휘둘러진 도끼를 피한 종화설이 검을 찔러넣었다. 거악부는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몸놀림으로 검을 피했고 다시 도끼를 내려찍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서 점차 밀려나는 것은 종화설이었다. 딱 한 번. 도끼를 피하지 못하고 검을 들어서 막아낸 순간.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놈의 거력에 밀려난 그녀는 그때부터 연신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만 급급했다.
쩌엉!
“꺅!”
결국 검이 튕겨 나가고 자세가 무너졌다. 거악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종화설의 옆구리에 마지막 일격을 내리꽂았다.
“조, 종소저!”
지켜보던 왕삼이 울부짖었고.
“소단주님!”
상단의 무인 하나는 등에 칼이 꽂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사람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텅!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거악부가 주륵 밀려났다. 내가 휘두른 검과의 충격을 상쇄시키지 못했으리라.
나는 놈보다 종화설을 먼저 살폈다.
“괜찮아?”
“고, 고마워.”
내가 내민 손을 붙잡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은? 나설까?”
종화설의 흔들리는 눈빛이 보였다. 나는 그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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