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외출[3]
2장 외출[3]
“나설까? 나서긴, 니미. 네가 나서면 뭐가 달라지냐?”
밀려났던 거악부가 제자리로 돌아와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나도 놈과 시선을 맞추고 바로 섰다.
주변은 조용했다. 산적 수하들과 상단의 무인들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우리 두 사람 중 살아남는 쪽이 승기를 잡는다는 것을.
그 사이 왕삼이 억지로 몸을 움직여 종화설을 부축해 물러나는 게 보였다. 잘했다. 나는 곁눈질로 왕삼을 칭찬한 뒤 다시 거악부에게 집중했다.
“거악부 탁만호.”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놈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이야. 나를 알고도 앞으로 나섰단 말이야? 계집 앞이라고 허세는.”
“내가 알아보니 당황스럽나?”
“당황? 내가 왜? 이 거악부를 모르는 새끼가 있다는 게 더 이상하지.”
과도하게 침착한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나는 그가 조금 더 속마음을 끄집어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씩 웃었다.
“만호야. 산서까지 와서 산적질이나 하는 이유가 뭐냐? 돈이 궁해?”
“만호야? 이 새끼가 쳐 돌았나!”
아. 너무 도발했나. 나는 실수를 인정하고 황소처럼 달려드는 거악부를 응시했다. 꿈틀거리는 근육에서 이어지는 도끼날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놈의 텅 빈 옆구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푹, 핏물이 터져 나왔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었는지 놈의 도끼가 재차 날아들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검을 맞댔다. 순간 놈의 표정이 활짝 폈다. 감히 자신의 공격에 맞대응할 심산이냐는 듯이.
그러나 내공이 실린 내 검은 부드럽게 놈의 도끼를 흘려냈다. 휘청거리는 놈의 뒤로 돌아들어 간 내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검로 그대로 놈의 등을 벴다.
“컥!”
이번엔 꽤 깊었다. 놈의 등짝에 십(十)자 모양의 상처가 뚜렷하게 새겨졌다. 뚝뚝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까지 적시고 있었으니 곧 눈앞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다시 묻는다. 만호야. 산서에 왜 왔어?”
“닥쳐, 개새끼야!”
놈이 발작하듯 쇄도해 들어왔다. 거악부다운 둔중한 일격이었으나, 상처 때문인지 좀 전보단 위력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번엔 내공을 가득 실어 놈의 도끼를 검으로 올려 쳤다.
콰앙!
놈의 두 팔이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간 도끼는 저 멀리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틈에 내 검은 바짝 열린 놈의 가슴을 세로로 크게 벴다.
푸확!
핏물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놈의 신형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놈이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로 몸을 받아 세웠다. 자연스레 놈의 귓가가 내 얼굴 옆에 자리 잡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성화상단. 왜 노렸어?”
“그, 그냥 죽여.”
놈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거악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입은 아직 많으니까.”
나는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놈의 목을 검으로 그었다. 울컥, 핏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맞춰 몸을 틀었다. 옷을 더럽힐 순 없었고, 놈은 기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쿵! 덩치가 덩치인지라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맞춰 산적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종화설을 비롯한 상단의 무인들이 놈들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제압을 끝마친 상태였다.
*
“어떻게 됐죠?”
종화설이 수풀 너머에서 걸어 나오는 상단 무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제압해 둔 산적들을 하나씩 끌고 가서 심문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저놈들 모두 자세한 흉수까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악부의 명령에 따라 산적 행세하며 저희를 고의로 노린 건 분명합니다.”
“그 사실 만큼은 인정했다는 거죠?”
“예. 모두 실토했습니다. 거악부 또한 마찬가지랍니다. 정체를 모르는 자가 거액을 주고 의뢰를 했을 뿐이라고.”
“대체 누가···.”
종화설은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거악부는 엄청난 고수는 아니더라도 죄질이 좋지 않아 백대악인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돈으로 매수하는 존재가 성화상단을 노리다니.
나로서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성화상단을 견제하는 다른 상단일 수도 있었고 이번 거래가 불발되기를 바라는 특정 세력일 수도 있었다.
거악부를 살려둘 걸 그랬나. 멋쩍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종화설이 그런 내게 다가왔다.
“거악부 같은 고수를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는 거 알아. 그자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는 것 같고.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 큰 은혜를 입었어.”
이렇게 말해주니 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성화상단의 일이니만큼 여기서부턴 다시 그녀가, 나아가서는 성화상단이 처리할 문제였다.
“그리고.”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기에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잠깐 뜸을 들인 끝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상행을 출발하기 전에 했던 말들은···. 정말 미안해.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 부분은 이해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래도. 너로서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언사였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말했듯이 나는 그녀의 판단과 발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그때 일을 언급하는 것도 소모적인 상황이니.
“알겠다.”
“고마워. 왕소협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저요? 왕소협이요?”
왕삼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 팔을 내저었다.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이후에는 인원을 둘로 나눠 일을 진행했다. 상단의 무인 세 명은 단전이 부서진 산적들과 거악부의 시체를 인근 정천맹 지부로 압송하기로 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상행을 마무리 짓기로.
다행히 금룡문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시길래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호송이 지연되어 송구합니다. 중간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그만.”
“안전하게 도착하셨다는 게 중요하지요.”
자신을 금룡문의 총관이라고 소개한 중년인은 인상 좋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꽤 격한 환영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상행이랬으니 당연한 반응인가 싶었다.
“일단 다들 안으로 드시지요. 물건 확인도 해야 하니 그동안 조촐하지만, 식사라도 하시면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종화설은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듯 인원들을 이끌었다. 규모 있는 문파와의 상행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도착하고 나니 상행이 잘 마무리됐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그러냐. 성공적인 강호초출이네.”
“하하. 그렇습니다, 도련님. 이게 다 도련님 덕분입니다.”
나와 왕삼도 그들과 함께 객청으로 이동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조금 쉬면서 배를 채운 뒤에 돌아갈 거라고 하니 오래 머물진 않으리라.
*
쾅!
화려한 장삼을 둘러 입은 노인이 거칠게 의자를 걷어찼다.
“실패했다고?”
“죄송합니다.”
대답한 사내는 복면을 차고 있었다.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졌음에도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거악부가 대단한 고수는 아니란 걸 잘 알지. 그런데 그렇게 병신같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정도였어?”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복면인을 노려봤다. 입을 놀릴 테면 놀려보라는 얼굴이었다.
복면인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닥치고 있을까 하는 고민인 것 같았으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씨세가의 소공자가 동행중이었습니다.”
“한때 정천맹 소룡단에 있었다던?”
“그렇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고작 폐인이 다 됐다던 애새끼 하나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
“그게···.”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복면인으로서는 이 침묵을 자신이 깼다가는 왠지 목이 날아갈 것 같았기에 입을 굳게 잠갔다.
다행히 먼저 나선 것은 숨을 고르고 냉정을 되찾은 노인이었다.
“놈의 무공이 거악부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인가?”
“놈도 그렇고, 성화상단의 무인들이나 종승재의 여식 또한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예상보다 숫자가 많기도 했고요.”
“종승재. 그자가 매사에 조심성이 많다고는 들었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포섭해온 인물이 거악부가 아니던가. 유씨세가와 성화상단의 관계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유씨세가의 주력인 금검대가 출가한 틈을 노리는 치밀함까지 더했다.
성공을 확신하고 벌인 일인데 염두에 두지도 않던 어린놈 하나 때문에 일이 틀어지다니.
“날개를 먼저 확실히 찢어놔야 하나.”
턱을 쓰다듬던 노인은 서늘한 안광과 함께 복면인에게 명령했다.
“유씨세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조사해 와.”
*
“은자 사백 냥이요?”
왕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화설이 내민 전표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거악부 탁만호의 현상금.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돈에 관심이 없었다 할 뿐이지, 돈의 가치는 천영검대주 시절부터 충분히 절감했다. 은자 사백 냥이면.
“사백 냥이면 제가 월봉을 다섯 해는 꼬박 모아야 할 액수···.”
그래. 왕삼이 저렇게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큰 액수였다.
“거악부의 시신을 넘기는 순간 지부장께서 맨발로 달려 나오시던데요?”
“하하. 그러니까. 두 분도 그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정천맹 진청지부에 산적들을 압송하고 돌아온 상단의 무인들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백대악인의 악명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죽인 건 나지만, 성화상단의 정체를 밝히고 시체를 넘겼을 테니 평판에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종화설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행 내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녀가 내민 전표를 받아 챙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 아버지도 나랑 같은 마음이실 거야.”
“그래.”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 건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별일도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후 우리는 금룡문 근처의 객잔으로 이동했다. 부상자가 있었던 탓에 하루 더 푹 쉬면서 여독을 풀기로 했고 성공적인 상행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작은 술자리도 열렸다.
다들 즐거워했지만 유독 왕삼이 크게 기뻐했다.
“도련님! 이게 진정한 강호인이군요!”
“이리 와서 한잔 받게, 왕소협!”
“왕소협이요? 예. 왕소협 지금 갑니다!”
녀석은 언제 친해졌는지 상단의 무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술을 마셨다.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옆에서 종화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밝은 사람이네.”
“맞아. 밝은 녀석이지.”
그녀는 몇 잔 술을 받아마셨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술병을 들자 그녀도 자연스레 잔을 들었다.
우린 말없이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끌벅적한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시면서 그녀의 표정을 슬쩍 보니 과거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싶었다.
내가 아닌 유진휘와의 추억일 거란 생각에 나는 그저 앉아서 추억의 대상이 되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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