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면[1]
4장 가면[1]
“돌아왔구나. 수련은 잘 마쳤느냐?”
내가 가주전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사평에게 설명을 들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왕삼에게 그때 일을 상세하게 전해 들었다. 잘했다. 그런 멸시를 받고도 참으면 무가의 자식이 아니지. 오히려 자랑스럽더구나.”
웃는 표정을 보니 아버지는 진심이었다. 나도 결국 그를 따라 피식 웃어 보였다.
“적당히 팰 걸 그랬어요. 그 정도로 약골일 줄은.”
“네가 너무 강해진 게 아니고?”
“그럴지도요.”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수련만 하더니. 조만간 나도 널 피해 다녀야 할 날이 오겠구나.”
이후에도 아버지는 이런저런 농 섞인 말들을 건네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왜 저러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나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내가 자책이라도 할까 봐서겠지. 물론 나는 자책 따윈 느끼지 않았다. 대신 내가 벌인 일이니만큼 책임은 질 생각이다.
“흑사방이 대놓고 일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위 대주가 얘기해줬군.”
“저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그래, 놈들은 전면전도 불사르겠다는 각오더구나.”
내가 산에서 수련하는 동안, 흑사방은 경고 차원이라며 유씨세가가 관리하는 사업체 몇 군데를 박살 냈다.
그중엔 금검대의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뒤 작은 무관을 차려 운영하던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와 위사평이 꽤 아끼던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는 대항하다가 크게 다쳐 내공을 잃었다.
“흑사방주가 마협문의 소문주를 제자처럼 아꼈다고 하더라. 사파의 인물이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었다는군.”
마협문이 넘어가겠다는데 대신 나서는 걸 보면 진짜 스승이라도 되는 건가. 마종태의 성정을 보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화감은 없었다.
“원래는 놈들과 원만한 대화를 통해 풀어갈 생각이었다.”
“이제는요?”
“그럴 수 없지. 감히 내 가족을 건드린 놈들이다.”
아버지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내 앞이라 애써 숨기려고 하는 건지 문득문득 살기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진휘야.”
“네.”
“여기서부턴 이제 이 애비가 처리할 일이다. 너도 내일 네 어머니가 있는 외가에 가 있거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어머니는 미리 보내놓으셨나. 나는 대답 대신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고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외가에 갈 일은 없을 테니까.
*
“도련님. 이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를 따라나선 왕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가 있는 외가는 호북으로, 산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왕삼아.”
“네.”
“너는 내 사람이지?”
“당연한 걸 왜 물어보십니까?”
“내 사람이면 내 비밀도 지켜주겠지?”
나는 대답이 없는 왕삼을 돌아봤다. 녀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다가 입을 쩍 벌렸다. 그래. 눈치 빠른 너라면 금세 알아차릴 것 같더라.
“왜 대답이 없어?”
“...내적 갈등 중입니다.”
“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려고?”
“그쪽으로 마음이 점점 기울고 있긴 하죠.”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내가 짐짓 탄식하자 왕삼이 나를 흘겼다.
“도련님.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나도 다 계획이 있다.”
“...역시 그런 거죠? 저는 도련님이 혼자서 흑사방에 쳐들어가기라도 하시려는 줄 알고.”
왕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녀석은 그 한숨을 도로 주워 담았다.
“그게 계획이었는데.”
“...가주님께 돌아가야겠습니다.”
“하하.”
말을 그렇게 했지만 왕삼은 여전히 나를 따르고 있었다. 울상인 표정의 녀석을 이끌고 나는 먼저 흑사방의 활동 지역으로 알려진 노주(潞州)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저잣거리에서 흑사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단체를 이용하면 수월하겠지만 그만한 돈은 없었다.
가뜩이나 흑사방은 본거지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방파였다. 은밀한 만큼 놈들에 관한 정보는 비싸겠지.
해서 일일이 객잔과 상점을 돌아다니며 놈들에 관해 물었다. 손에는 은자를 몇 개씩 쥐고 다녔다.
두 시진 정도 저잣거리의 끝과 끝을 가로질렀을 때 흑사방의 대한 정보가 정리됐다.
이곳 노주의 뒷골목을 대표하는 사파. 절정고수인 흑사방주를 필두로 그 밑에 세 명의 각주가 존재했는데 그들은 각각 백사(白蛇), 적사(赤蛇), 청사(靑蛇)라 불렸다.
문제는 그 세 개의 각(閣) 모두 독립적인 위치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흑사방 본거지를 비롯해 모든 위치가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흑사방을 없애려면 그 네 군데를 일일이 찾아 쳐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후룩. 나는 소면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달리 왕삼은 소면에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가장 약하다는 청사각주라는 놈도 육십 명이 넘어가는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고요?”
“그래. 소면 안 먹을 거면 나 주고.”
나는 대답과 함께 식어가고 있는 왕삼의 소면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든 말든 왕삼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혼자서 총 이백 명이 넘어가는 흑사방 무사들을 혼자서 상대하려고 하는 거고요?”
“왜 혼자야?”
“네?”
내가 반문하자 왕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요?”
“왕소협. 자네가 있어 든든하네.”
내 웃음과 동시에 왕삼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결정했습니다. 가주님께 일러바치기로.”
“농이야. 나 혼자 갈 거다.”
“도련님!”
왕삼은 내가 소면 두 그릇을 깨끗이 비울 때까지 크게 반대했고, 설득했다.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걸 알기에 무시하는 대신 왕삼의 얘기를 귀담아들었다.
“다했냐?”
“아뇨. 일단 숨 좀 돌리고요.”
왕삼이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는 그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품에서 책자 한 권을 꺼내 왕삼에게 주었다.
“이게 뭐예요?”
“뇌물.”
“네?”
“이번 일 조용히 눈감고 지켜보고 있으라는 뇌물이자 네 갈망을 채워줄 무공.”
나를 바라보는 왕삼의 눈이 커졌다. 지금은 저 정도지만, 내가 주는 비급을 익힐 때면 더 놀라게 될 것이다.
정천맹에는 수많은 무공 비급들이 보관된 비고가 여럿 존재했는데 그중에서 최상으로 여겨지는 곳이 정천맹주와 본인이 허가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천상비고(天上祕庫)였다.
나로선 천영검대주였던 시절 그곳에 몇 번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직접 익힌 무공도 많았고 그저 외워두기만 한 무공도 몇 가지 있었는데 지금 내준 것이 그중 하나였다.
연활팔식(延活八式).
활검을 추구하는 검법이자 수비의 비중이 큰 검식으로 당시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검법이어서 익히진 않았다.
대신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구결을 외워뒀었고 그걸 비급으로 다시 정리해둔 것이다.
“도련님.”
“왜?”
왕삼은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받아 쥐었다. 동시에 진중한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으셨어요?”
“갑자기?”
“그게···. 원래는 도련님이 기억을 잃으셨던 날부터 뭔가 달라지셨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거악부를 쓰러트리는 모습을 보곤 정말 강해지셨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요. 근데 지금은.”
왕삼의 두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순간 나는 움찔했다. 인극의 경지에 올라 기세를 숨기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상태인데, 녀석은 지금 그런 내 기세를 조금이나마 읽어내고 있었다.
나 이전의 유진휘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온 탓일까. 혹은 타고난 기감이 뛰어난 것일까.
“도련님이 혼자서 흑사방에 쳐들어갈 거라고 하셨을 때. 걱정은 당연히 됐지만, 왠지 도련님이라면 정말로 혼자서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확신도 들었어요. 당당한 도련님의 태도 때문인가 싶다가도 뭔가···.”
왕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녀석의 추측에 동조해주었다.
“맞아. 기연을 얻었어.”
“헉!”
왕삼이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그래, 내가 이 몸으로 환생한 게 기연은 기연이지.
“이것도 비밀이다.”
“알겠습니다! 어쩐지, 도련님이 갑자기 죽기 살기로 수련하시고 하던 것도 다···.”
왕삼은 머릿속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기라도 한 듯 시원한 얼굴로 계속 떠들어댔다.
*
어스름이 깔린 초저녁에 나는 홀로 객잔에서 빠져나왔다. 흑사방과 삼각(三閣)의 위치를 알아내기엔 요원하니 놈들이 찾아오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먼저 구해야 할 물건이 있었다. 유진휘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한.
‘죽립이나 복면···은 좀 부실할 것 같은데. 인피면구는 구할 수도 없고.’
장인의 손길을 빌어야만 제작되는 인피면구는 그 가치가 수만 냥에서 수십만 냥까지 다양했다. 정천맹에도 인피면구는 스무 장 내외가 전부였다.
나는 고심하면서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튼튼한 복면을 구매하기로 타협하고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포목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나는 문득 발길을 멈췄다. 거리의 한구석에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노인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낡고 닳은 것부터 손때 하나 타지 않은 새것까지 다양했다.
노점상인 듯 보였는데 뭔지 모를 기운이 계속 걸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결국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내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노인을 일별한 뒤엔 물건을 자세히 살폈다.
눈으로 살피다가 묘한 기운을 내뿜는 가면 하나를 발견했다.
새하얀 가면이었는데 만져보니 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주둥이 부분을 제외한 안면 전부를 가리는 형태였다.
묘한 기운이 느껴진 건 그 가면 위에 사선으로 길게 새겨진 검상 때문이었다.
그 검상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가면 위에 검상을 새긴 자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그때, 앞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가면이 지닌 사연을 알고 있는가?”
나는 가면을 손에 든 채로 물었다.
“모릅니다. 어떤 사연입니까?”
“...내가 물은 걸 왜 다시 물어봐? 뭔가 안다는 듯이 살펴본 건 네놈이잖느냐.”
아.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거였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가면을 다시 살펴봤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정체는 감추고도 남을 것이다. 튼튼해 보이기도 했고.
“어르신. 이 가면 파시는 겁니까?”
“파는 물건이니 내놨겠지.”
“제가 사겠습니다.”
“은자 두 냥.”
“...”
생각보다 비쌌지만 나는 기꺼이 값을 치렀다. 그 자리에서 가면을 써보니 예상보다 착용감도 뛰어났다.
“그럼.”
나는 그대로 노인에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내내 노인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혀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은 흑사방에 집중할 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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