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면[2]
4장 가면[2]
백화루(白花樓)는 산서 노주 근방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기루였다. 덕분에 하늘이 어둑해질 때쯤 영업을 개시하고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손님이 몰려왔다.
‘시발. 오늘따라 더 바쁘네.’
백화루에서 오 년째 점소이로 일하고 있는 광표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어서 오십쇼!”
물론 겉으로 내색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광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여기 두 분이시란다!”
“예!”
개시 이후 다시 한 시진 정도. 광표는 쉬지 않고 손님들을 안내했다. 기루 안에 자리가 다 찼을 즘에야 광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좀 여유로워지나 싶어질 때였다.
“이봐! 밖에 아무도 없어?”
백화루의 삼 층 특실. 이곳에서 가장 비싼 값을 받는 특실 중 한 곳에서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옙! 갑니다!”
광표는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웬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지···.”
“있으니까 불렀겠지. 즉묵노주 한 병 더 가져와.”
목소릴 보니 어린놈 같은데 말하는 꼬락서니가. 광표는 화를 눌러 담으며 환한 미소를 연기했다. 그러면서 슬쩍 사내 주변을 살폈다.
보아하니 이미 즉묵노주(卽墨老酒)를 다섯 병은 마신 것 같았는데.
‘돈이 썩어 넘치나?’
광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즉묵노주는 한 병에 은자 수백 냥이 넘어가는 고가의 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내의 행색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무복. 아무렇게나 넘겨 묶은 머리. 기루에 와서 기녀는 찾지도 않고 정체를 알 수 없게 가면까지 뒤집어썼다.
“안 가져오고 뭐 해?”
“죄송합니다.”
광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수상쩍긴 하지만 무림인에게 따지고 들 순 없었다. 일단 술을 가지러 가는 척 방에서 빠져나온 광표는 재빨리 움직였다.
“형님!”
광표가 도착한 곳엔 백화루의 경비를 책임지는 무인들이 서 있었다. 광표는 세 명 중 친분 있는 무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그게···.”
광표는 사내에 관한 얘기를 빠짐없이 전했다. 수상하다는 말도 확실히 덧붙여서.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지.”
다행히 이들도 사내를 주시하고 있던 것 같았기에 광표는 안심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흑사방의 삼대세력 중 하나인 백사각의 무인들이었다. 이곳 백화루도 백사각이 관리하는 곳이었고.
‘여기서 허튼짓 벌이다 맞아 뒈진 놈이 얼만데.’
광표는 씩 웃으며 무인들과 함께 사내가 있는 특실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내가 움찔 놀라더니 소리쳤다.
“가져오라는 술은 안 가져오고. 뭐하냐?”
“그 전에 확인 좀 해야겠습니다.”
“뭘?”
“돈이요. 술값 치를 돈은 있으십니까?”
광표는 말을 하고 잠시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사내는 쯧, 혀만 찰 뿐 반응이 없었다. 광표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무사들을 바라봤다.
“저럴 줄 알았습니다.”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도 있어야 우리가 할 일이 생기는 거지. 물러나 있어.”
“예.”
광표는 대답과 함께 물러섰다. 돈도 없이 술을 처먹으러 온 사내는 곧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되겠지. 오 년 차 점소이의 직감을 무시하면···.
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에 광표가 얼어붙었다. 간만에 몸 좀 풀겠다며 선두로 나섰던 무인은 얼굴이 반대로 꺾인 채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 이 새끼 너 뭐야!”
나머지 무인 두 명은 위기감을 느끼고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뽑아 들었다고 생각했으나.
“헉!”
가면 사내가 유령 같은 몸놀림으로 무인들 지척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콰직!
검을 뽑지도 못한 무인 하나는 명치 위에 꽂힌 주먹으로 인해 몸이 직각으로 꺾여 피를 토했다. 풀썩,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걸 보니 그대로 절명한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무인은 반쯤 검을 뽑긴 했으나 시야를 뒤덮는 발차기에 안면을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크윽.”
무인은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마저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재빨리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 그가 당황했다. 손이 허전했던 탓이다.
“검이 어디 간···.”
무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가면 사내가 언제 뽑아갔는지도 모를 자신의 검을 휘둘러오고 있었다.
쉭-
빠르고도 간결한 일검은 단숨에 무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툭.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잘린 부위에서 핏물이 터져 나와 허공으로 치솟았다.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던 광표는 얼굴에 튄 핏물에 움찔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에게 가면 사내가 휘둘렀던 검을 내팽개치면서 다가갔다.
“여기. 흑사방이 관리하는 곳이지?”
“...마, 맞습니다.”
“흑사방주가 직접?”
“아, 아뇨. 정확히는 백사각주가 주인이신···.”
광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흰 가면이 반쯤 붉게 물들었음에도 사내는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대협께서 누구신지 여쭤봐도···.”
누구긴? 바로 나였다.
“죽고 싶은 거면 알려주고. 궁금한가?”
내가 가면을 벗는 시늉을 하자 점소이가 황급히 양팔을 내저으며 바짝 엎드렸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살려주십쇼, 대협!”
“그럼 가서 여기 책임자든 관리자든 불러와. 그리고 흑사방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네가 알아서···.”
“제가 전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눈치 빠른 점소이였는지, 그는 그 말과 함께 튕기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피 튀지 않은 음식들을 대충 골라 집어먹으며 얌전히 기다렸다.
*
쾅!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었는데 복장이 고급지고 화려했다.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보고 당황한 그녀는 오직 사내 한 명을 대동한 채였다. 적어도 대, 여섯 명은 끌고 올 줄 알았더니. 물론 사내의 기세를 느낀 나는 그 결정을 이해했다.
단순히 어중이떠중이 수준은 아닌 일류를 넘어서기 시작한 고수였다. 거악부보다 조금 강한 정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게 전부였기에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여인에게 다시 집중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변명해보시죠.”
변명이랄게 있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음식을 마저 집어넣으며 물었다.
“여기 루주요?”
“예. 제가 백화루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해보시죠? 고작 돈이 없어서 이런 짓을 벌이신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녀는 차오르는 분노를 눌러 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나에 대해 파악하려고 무던히 눈을 굴렸다.
술값 때문에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차렸고 나름 루주라고 머리도 비상해 보여서 나는 둘러대지 않았다.
“백사각주를 만나고 싶은데.”
내 말에 루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짐짓 태연한 척하는 것 같았지만 시체를 봤을 때 보다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각주님을 뵙고 싶다면 당신의 정체를 먼저 밝히는 게 예의 같은데요?”
“그럴 거면 이걸 왜 쓰고 왔겠소?”
내가 가면을 툭, 가볍게 두들겼다.
“좋은 의도로 만나려는 게 아니라는 거군요.”
이번에는 묵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루주는 잠시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불가합니다. 의도가 뭔지도 뻔하고, 그보다는 그쪽이 벌인 행패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게 먼저겠죠? 물론.”
그녀는 몇 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뒤편에 서 있던 사내와 위치를 바꿨다.
“그 대가는 목숨이겠고요.”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녀는 사내에게 눈짓으로 명령했다.
사내는 일언반구도 없이 곧장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아갔다. 나는 여전히 루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락이나 구하려고 온 게 아니야. 원하는 게 백사각주뿐만도 아니고.”
“그건··· 무슨 소리죠?”
“백사각을 비롯한 삼각. 그리고 흑사방. 내가 원하는 건 그 모두니까.”
“혼자서 흑사방 전체를 무너트리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일단은 윗대가리인 놈들부터 없애야지.”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보죠? 거기다 감히 흑사방주를 거론하다니.”
루주는 코웃음과 함께 다시 사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 말이 허튼소리로 들렸다는 표정이었다.
말에 힘이 실리려면 행동을 보여야지. 나는 루주에게 시선을 거두고 검을 뽑았다. 스릉.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동시에 나도 기세를 피워올렸다.
“흡.”
내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숨을 들이켜며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 기세에 맞서기 위함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사내를 기세로 압도하고 있었다.
“그쪽도 백사각. 그러니까 흑사방 소속 무인인가?”
내가 묻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젓는다.
“난 백화루주만을 따르는 사람이오.”
그럼 죽진 않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오른발을 내밀었다. 공격하는 척 내디딘 가벼운 허수가 섞인 한 걸음이었으나 내 기세에 짓눌려 있던 사내는 움찔 놀라더니 바닥을 박찼다.
쐐엑!
그는 내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고 여겼는지 초반부터 공격 일변도로 몰아붙였다. 내공을 잔뜩 머금은 검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내 사혈을 노렸다.
자신보다 실력이 한 수 높은 고수를 상대할 땐 사내처럼 초장에 승부를 보는 게 맞았다. 올바른 선택이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였다.
챙! 챙챙!
나는 제자리에 선 채 적당한 내공이 실린 검으로 사내의 공격을 하나하나 쳐냈다. 공격이 내 옷깃에도 스치지 못하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초식이 점점 더 과격해지고 빨라졌다. 나는 여전히 발걸음 하나 떼지 않고 검만 앞세워 초식들을 파훼했다.
터-엉!
회심의 일격이라 여기고 심장을 노려 찔러낸 검까지 내가 가볍게 막아내자 사내는 주춤 물러섰다. 꿈쩍도 하지 않는 거대한 바위를 마주한 표정이었다.
그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루주의 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표정 또한 놀람과 경악으로 물들어있었다.
의도한 바였다. 흑사방주나 삼각의 각주들이 절정 혹은 절정에 가까운 고수라 들었다. 루주는 지금 나의 실력을 보고 그들을 떠올리고 있겠지.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내 말에 조금 더 힘이 실리려면.
나는 숨을 고르고 있는 사내를 응시한 채 내공을 끌어올렸다. 검에 실린 기운이 보다 강해졌다.
사내도 그걸 깨달았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곧추세웠다. 이번엔 자신이 공격을 막아내겠다는 자세였다.
그건 틀린 선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막지 못할 테니까.
쉭-
내가 순식간에 앞으로 튕겨 나갔다. 사내의 코앞까지 쇄도했을 때, 그의 초점은 여전히 내가 서 있던 곳에 있었다.
나는 몸을 낮게 깔고 돌진한 자세에서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이어 회전하는 힘과 내공이 맞물린 검을 그대로 올려 쳤다.
그제야 사내가 간신히 검을 방패 삼아 비트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또한 염두에 둔 공격이었고.
촤아-악!
내 일격은 사내의 검까지 통째로 그의 가슴을 크게 갈랐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한 사내가 부러진 검을 쥔 채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대로 사내의 등에 내리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다급한 외침에 돌아보니, 루주가 애원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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