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면[3]
4장 가면[3]
“소녀가 공자님의 실력을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그자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이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루주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간절히 빌었다. 떨리는 눈빛은 내 발밑에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그러지.”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기세를 꺾을 요량으로 위협한 것이기에 나는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마자 그녀는 방문을 열고 다급히 소리쳤다. 누군가를 부르는 외침에 무인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섰고 그들은 죽기 직전인 사내를 둘러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반응을 보아 가장 신뢰하는 수하라는 건 사실인 듯싶었다. 묵묵하고 충실하며 무공도 일류를 넘어서니 그럴 만도 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를 살렸다는 생각에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려 있었다.
“그럼 가서 백사각주를 불러와. 흑사방을 노리는 인물이 있고 지금 그 인물 때문에 백화루가 날아가게 생겼다고.”
가면으로 정체는 숨겼지만,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는 이유는 유씨세가를 향한 흑사방의 이목을 내게 쏠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방금 들어왔던 무인들이 지금쯤 보고를 올리고 있을 거예요.”
하긴. 업혀 나갔던 사내가 백화루에서 가장 고수였는데 그런 고수를 아무런 상처도 없이 쓰러트렸으니 반응이 있겠지.
그러나 루주의 입에선 내 예상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보고가 올라가도 당장 백사각주를 보긴 힘들 것 같지만요.”
“백화루가 백사각이 관리하는 사업 중에선 꽤 큰 편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한데.”
이다음 말하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듯 루주가 침을 삼켰다.
“최근엔 큰 싸움을 대비한다고 백사각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어요.”
“유씨세가를 말하는 건가.”
“네. 알고 계시네요.”
당연히 알 수밖에. 나는 짐짓 자세히는 모른다는 태도를 보였다.
“듣기로는 유씨세가와의 전쟁에 꽤 큰돈이 엮여 있다고 했어요.”
“큰돈?”
이번에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유씨세가와 전쟁을 벌이려는 게 마종태 때문이 아니었나? 내가 궁금해하는 눈치이자 루주가 잠깐 주변을 돌아봤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시겠어요?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드리기에는.”
그녀는 처음에 내가 죽였던 무인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기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도 궁금했고.
나는 그녀를 따라 백화루의 사 층으로 이동했다. 올라와 보니 사 층 전체가 백화루주를 위한 장소였다.
“술은 충분히 드셨을 테니 차라도 한잔 내오겠습니다.”
즉묵노주를 얘기하는 거여서 나는 피식 웃었다. 취기를 밖으로 내모는 게 아까울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
“사양하지. 이야기나 마저 했으면 좋겠는데.”
“네.”
내 말에 그녀는 맞은편 탁자에 앉아 아는 바들을 털어놨다.
“며칠 전에 흑사방주의 이름으로 삼각의 각주에게 각각 은자 오천 냥이 전해졌다고 들었어요. 유씨세가와의 전쟁이 끝나면 그만큼의 돈을 더 내준다고도 했다고 하고요.”
각자 오천 냥이면 도합 만 오천 냥. 거악부 같은 악인을 삼십 명은 넘게 잡아들여야 할 만큼 큰 금액이다.
“평소엔 흑사방주가 그런 돈을 주지 않나?”
“삼각은 흑사방 밑에 있긴 하지만 독립적인 세력이기도 해서, 재정적인 부분은 도와주지 않아요. 오히려 삼각이 벌어들이는 돈을 흑사방주가 갈취하는 형태죠.”
“그런 놈이 오히려 돈을 내줬다.”
“네.”
“확실히 뭔가 있긴 한 것 같네.”
“제가 좀 더 알아볼까요?”
루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쪽은 백사각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고. 다만 그녀가 원해서 백사각주를 따르는 게 아니라는 건 깨달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녀가 물었다.
“왜 흑사방을 치려는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유? 이유야 명확했다. 놈들은 건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게다가 저잣거리를 돌며 놈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별소리를 다 들었다.
뒷골목의 왕처럼 군림하는 놈들은 수없는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러왔다. 불법도박, 미약과 마약. 납치. 인신매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를 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었다.
정마대전 이후 정천맹이 내부적인 일을 수습하는 동안 사파의 기세가 날로 늘어가니 흑사방 같은 놈들도 이때다 싶은 거겠지.
결국 결론은 이거였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니까.”
“협··· 인가요?”
협(俠)?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과거의 내게는 의협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내 가문을 건들인 놈들을 벌하고 복수하는 것뿐이다. 지난 생에서처럼 거창한 복수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또 이렇게 됐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와중에 그녀는 혹시 누군가 듣고 있진 않은지 주변 눈치를 봤다.
“쥐새끼 하나 없으니 이야기해.”
기감에 잡히는 존재가 없었기에 내가 확언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쉽사리 말을 내놓지 못했다.
해서 내가 대신 말했다.
“흑사방이 사라지길 바라는군.”
“······.”
루주는 무언은 긍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백사각주는 오지 않을 거다?”
“백사각 소속 무인들을 몇 보내긴 하겠지만 본인은 오지 않을 것 같아요.”
“백사각의 위치는 알지?”
“알지만, 설마··· 무작정 백사각으로 쳐들어가시겠다는 건가요?”
“지금까지 나는 계속 백사각뿐만 아니라 흑사방을 치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게 그냥 있는 그대로 하신 말씀이라고요?”
“그럼?”
“저는 저를 통해서 백사각주를 유인해 먼저 암살이든 독살이든, 아니면 적어도 일대일로 상대하시려는 줄 알고. 그 이후에 다시 다음 일을 도모하는 게 상식적······.”
루주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나를 비상식적인 놈으로 평가하는 발언이었으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로서는 무슨 평가를 하든 알 바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세력이나 집단을 와해시키려면 수장을 처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마교의 교주였던 천마. 정천맹주였던 검신. 그들이 천하를 울리는 고강한 무공을 지녔음에도 호위무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이유가 그거였다.
수장이라는 자리의 존재감과 상징성. 수장을 잃은 집단은 혼란에 빠지고 혼란에 빠진 집단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수장을 잃는 것만으로 자멸하는 곳도 봤다.
천마를 죽인 게 바로 나였으니까.
하지만 흑사방. 그리고 그 밑에 백사각 따위는 마교가 아니었다.
“위치나 말해. 대체 놈들이 어디에 숨어 지내는 건지.”
내 말에 루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굳이?”
“그편이 더 수월할 거예요. 제가 직접 가야만 하는 연유도 있고요.”
직접 가야만 하는 연유는 아까 묻지 않은 사연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더 수월하다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해.”
“그럼 시기를 정해주시면 제가······.”
“지금.”
“네?”
내 결정에 루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혹시 하나 더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
“이 일에 함께하는 동료라든가 수하들이 있으신 거죠?”
있을 리가. 왕삼이 있긴 하지만 데리고 가기엔 위험했다. 언젠가 녀석이 연활팔식을 오성까지 익히게 되는 날이 오면 마음 놓고 데리고 다닐 텐데.
“없어. 나 혼자야.”
루주의 눈이 더욱 커졌다. 직접 나를 안내하겠다고 한 선택이 실수는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고민되면 직접 가지 말고 밑에 사람 아무나 하나 붙여줘. 백사각의 위치를 아는 놈이 또 있을 거 아냐?”
“아니에요. 제가 모실게요. 제 동생이··· 백사각에 있어요.”
“그러던지.”
나는 백사각으로 떠날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주가 그런 나를 붙잡고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
아쉽지만 ‘지금’이라는 내 결정은 무산됐다. 설마 백사각의 본거지가 강 위에 있을 줄은.
‘여기서 멀지 않은, 분하강 하류에 작은 섬이 있어요. 백사각은 그 섬에 있고요.’
나는 백화루에서 빠져나와 왕삼이 있는 객잔으로 돌아가며 루주의 말을 떠올렸다. 아직 야밤이고 물살도 거센 편이라 뱃사공을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보편적으로 적의 기습이 야밤에 이루어지는 걸 생각하면 백사각의 위치는 기습을 대비하기에도 탁월했다. 하지만.
‘내일 동이 틀 시간에 맞춰 제가 공자님이 계신 곳으로 모시러 갈게요.’
동틀 녘의 기습이 더 기습적일 수도 있지. 그런 생각과 함께 길을 걸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가면을 벗었다.
갑갑했던 얼굴을 달래주는 밤바람과 함께 어느덧 객잔에 도착한 내가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도련님!”
왕삼의 목소리가 객잔 이 층 창가에서 들려왔다. 반나절 안 본 것치고는 썩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왕삼이 자리 잡은 객잔 이 층으로 올라갔다. 보아하니 음식 하나 시켜놓고 깨작거리며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왕삼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다친 곳은 없으신 것 같고,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풀렸다. 백사각의 위치를 알아냈으니까.”
“반나절 만에······. 대체 그놈들은 어디에 숨어 지낸답니까?”
“강 위에 있는 무인도에 장원을 세웠다던데. 흑사방이나 다른 삼각들도 그만큼 은밀한 곳에 있겠지.”
“놈들도 지들이 뒤가 구린 놈들이라는 걸 아나 보네요. 나쁜 새끼들.”
왕삼은 한숨과 함께 연신 흑사방 놈들을 씹어댔다. 낮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놈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격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왕삼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곳 객잔 주인이 노부부인데, 매달 흑사방 놈들이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 간다고 합니다. 며칠 뒤면 벌써 수금하는 날이라고 하소연하는 걸 얼핏 들었어요.”
보호비. 무림인들의 전형적인 돈벌이 수단 중 하나였다. 정도를 자처하는 문파들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받는 금액이 합당한지, 대가를 제대로 치르는지의 차이가 있다. 이 객잔이 위험에 처했을 때 흑사방 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앉은 자리에서 힐끗 시선을 돌리자 일 층 계산대에 앉아있는 노인이 보였다. 왕삼의 말대로 근심거리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배가 좀 고픈데.”
나는 노인을 바라보는 채로 말했다.
“음식 좀 새로 더 시킬까요?”
“그래.”
왕삼은 곧장 일 층으로 내려가 내가 평소 즐겨 먹던 육류 위주에 채소를 곁들인 음식들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부 둘이 함께 음식을 내왔다. 보아하니 이 시간에는 점소이를 쓸 여력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차례대로 음식을 내려놓는 두 사람에게 슬쩍 언질을 줬다.
“앞으로는 보호비 따위 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허리춤에 있는 내 검을 보고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흑사방에게 당한 게 있으니, 무림인이라면 가장 먼저 경계심이 피어오를 테지.
“그냥,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시선을 거뒀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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