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장악[1]
5장 장악[1]
운기를 하며 밤을 지새운 나는 객잔에서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에 옆방을 살펴보니, 왕삼은 연활팔식의 비급에 얼굴을 묻은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도련님. 이거 수준이 엄청 높습니다. 구결을 외우는 데만 며칠은 걸리겠어요.’
‘활검이요? 사람을 살리는 검이란 뜻이죠? 호위무사인 제게 딱 어울리는 검법이네요.’
‘잠자는 시간 빼고 저도 죽기 살기로 수련하겠습니다. 제대로 도련님을 호위할 수 있도록.’
어젯밤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대더니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하는 웃음 위로 가면을 뒤집어썼다.
조금 먼 거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백화루주였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면사만 쓴 채 걸어오는 발걸음엔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백사각의 본거지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 일종의 배신행위나 마찬가지라 여기는 걸 테지.
“쓰레기 치우러 간다고 생각해.”
인사 대신 대충 던지듯 말했다. 루주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백화각의 그 쓰레기들이 지금은 본진에 모여있어요. 유씨세가를 치겠다는 결정이 떨어지면 곧장 출전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다고요.”
어제 내가 떠난 뒤에 백사각의 상황을 알아본 듯싶었다. 루주의 표정과는 반대로 나는 차분해졌다.
“잘됐네. 한곳에 몰려있으니 일일이 치우러 다니지 않아도 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군요.”
루주는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려 앞장섰다. 그녀를 따라 반 시진 정도 걸어가니 분하강이 나타났다.
그곳엔 나룻배 하나와 초로의 뱃사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루주와는 안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주는 오랜만에 보오.”
“잘 지내셨어요, 어르신.”
“본각엔 무슨 일로 가려고? 저번처럼 동생을 보러 가는 게요?”
“예.”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으로 진입하기 위해 배를 탈 때부터 신원과 목적을 확인하다니. 자신의 안내를 받는 게 수월할 거라던 루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때 뱃사공이 나를 바라봤다.
“저자는 호위요?”
“맞아요.”
“그렇군. 출발하겠소.”
나에 대해서도 별말은 없었다. 루주의 지위가 백사각에서 나름 특별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배는 분하강을 한 식경 정도 가로질렀다. 이른 새벽이라 안개를 헤쳐가야 했는데 뱃사공의 노질은 거리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걷혔고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뭍에 배를 안착시킨 뱃사공이 우리를 바라봤다.
“여기서 두 시진 정도 기다리겠소. 두 시진이 지나면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거요.”
“명심할게요.”
루주가 대답하며 배에서 내렸고 나는 호위무사인 척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
섬은 사방이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더 울창했는데 길을 모른다면 한참을 헤맬 정도였다.
이 정도면 안가(安家)나 다름없었다.
“작정하고 숨어지내는군.”
무심결에 내뱉은 말인데 루주가 반응했다.
“다른 삼각보다도 백사각이 유독 심해요. 아무래도 다루는 물건이 그렇다 보니.”
“물건?”
내가 반문하자 루주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어 그녀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차례 접혀있는 작은 양피지였다. 양피지를 풀어헤치자 그 안에는 정체 모를 흰 가루가 들어있었다.
독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에 이로울 거라는 느낌도 아니었다.
“백락사(百樂沙). 여인이 먹으면 미약이고 사내가 먹으면 마약이 되는 백사각의 주요 사업 품목이에요. 한번 복용하면 다시 찾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중독성이 강해요”
미약과 마약은 무림은 물론이고 관에서조차 금지한 물건이었다. 백락사는 그 두 가지 효용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유통만 되면 확실히 돈벌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백락사는 제가 개발한 약이고요.”
뜻밖의 사실에 내가 루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길을 다시 걸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원래 노주에서 의방을 운영하던 평범한 의원이었어요. 그런데···.”
그녀의 사연은 퍽 기구했다. 처음엔 그저 환자와 의원의 인연이었으나 그 환자가 바로 백사각주였고 백사각주는 그녀의 실력을 눈여겨보고는 마약 제조를 의뢰했다.
초반엔 거절했지만 백사각주가 제시한 돈이 워낙 컸고 은근한 협박까지 곁들여져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만들어진 마약이 시간이 지나 백락사로 완성됐는데 루주는 백락사의 위험성을 깨닫고 폐기하려 했다.
“그때 제 남동생이 백사각 소속의 무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소릴 들었어요.”
겉으로는 그랬겠지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주변 상황이 강제적이었으니 그녀는 하릴없이 백사각주를 따라야 했을 테고.
“그리고 지금은 백화루가 백락사의 여러 유통장소 중 하나가 됐죠.”
“단순히 장사나 잘되는 기루가 아니었네.”
“동생만 아니었다면 저 혼자 멀리 도망쳐서 숨어 지내면 되지만···.”
루주가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백사각의 건물을 쳐다봤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입구는 단단한 철문이 지키고 있었고 옆으로 이어지는 담벼락 위로는 표면이 날카로운 철사가 엮여있었다.
은밀한 위치에 삼엄한 방비를 보니 확실히 구린 놈들의 안식처란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뭐지?”
내가 묻자 루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제대로 안 올렸네요. 언예령이라고 합니다.”
“저 안에 있다는 동생 이름을 물어본 건데.”
순간 루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동생 이름은 언사룡입니다.”
나는 무안해하고 있는 언예령을 뒤로하고 건물 앞으로 다가가 철문을 쿵 두드렸다. 잠시 뒤 철문 중앙 부분의 작은 틈새가 밀리듯 열리며 두 개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쓰레기 치우러 왔다.”
“뭔 개소리야? 정체가 뭐냐고, 이 새끼야.”
분위기가 대번에 험악해지자 언예령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호위무사 역할은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문이나 열어. 박살 내고 들어가기 전에.”
“이 미친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박살 낼 수 있으면 박살 내봐. 이게 평범한 철문인 줄···.”
“그러지.”
“뭐?”
순순히 열어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단숨에 철문을 후려쳤다.
꽈-앙!
철문 중앙 부분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동시에 철문 자체가 뜯겨나가 뒤로 쭉 밀려나다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뒤에 서 있던 놈은 그대로 철문 밑에 깔려 절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훤히 드러난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소란에 몰려든 놈들이 나를 노려봤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놈부터 험악한 욕설을 내뱉는 놈들까지.
백사각의 전력이 집결한 채 대기 중이라더니 그 수가 족히 오, 육십은 넘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놈들과 더불어 적사각과 청사각 그리고 흑사방 놈들까지 한꺼번에 유씨세가로 몰려들어 갔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자연스레 살기가 피어올랐다. 내 팔다리를 자르겠다던 놈도, 내 눈깔을 후벼파겠다던 놈도, 온갖 맹수 새끼를 들먹이며 날 욕하던 놈도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상태로 천천히 걸어 나가며 놈들을 살펴봤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언사룡?”
“어? 저를 어떻게···.”
반응도 그렇고 생긴 것도 언예령과 닮아있는 젊은 사내였다.
“이쪽으로 와라.”
“예?”
언사룡이 분위기를 살피며 주춤거렸다. 그때, 언예령이 내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룡아!”
“누나?”
언사룡은 누이를 발견하곤 내 쪽으로 날 듯이 달려왔다. 남매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어느새 백사각의 인원들은 나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노인이 포위망 선두에서 나와 언예령을 번갈아 바라봤다. 풍기는 기세로 노인이 백사각주란 걸 깨달았다.
“백사각주?”
노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맞다. 네놈은 누구냐? 누구기에 백화루주와 함께 와서 이 소란을 피우는 게야?”
“얘기 못 들었나? 흑사방을 노리는 자가 있다고.”
“아. 그놈이군.”
백사각주가 알겠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 뒤의 본모습이 궁금하다는 듯. 그러더니 대뜸 기세를 쏘아 보냈다.
나를 압박하려는 심산이었겠지만 나는 손쉽게 기운을 튕겨냈다. 그러자 백사각주의 시선이 달라졌다.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놈이로구나. 어젯밤 보고를 들었을 땐 가끔 협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떨거지 같은 놈인 줄 여겼거늘. 수하 몇 놈 내보내 처리시키려 했는데 낭패를 볼뻔했어.”
백사각주가 픽 웃으며 나를 인정한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 조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백사야. 지금이 더 낭패일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대뜸 하대하자 백사각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같잖은 도발은 삼가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뒷방에 숨어 약이나 팔아 모은 돈으로 흑사방주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뱀 새끼, 라고 듣긴 했지.”
내가 슬쩍 언예령을 바라보자 그녀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 새끼가 맞는데 부정은 무슨.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백사각의 전력이 모여있는 이 중심에서 저런 말을 내뱉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들이었다.
“틀린 말은 아닌가 본데? 수하라는 놈들이 단 한 명도 아니라는 말을 안 하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놈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게 모르게 놈들은 이미 내 존재감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주인이 모욕당했음에도 달려들지 못할 만큼.
그러나 백사각주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썩 어린놈 같은데 심계도 부릴 줄 아는구나. 도발로 노부가 덤벼들게 만들어 일대일로 싸울 심산이었느냐?”
“자신은 있고?”
“하하, 미친놈이긴 하지만 오래간만에 유쾌한 기분도 드는군. 여기에 있는 멍청한 새끼들과는 다르게 머리도 좋아 보여. 백화루주를 꼬드겨 백사각의 위치까지 알아낸 것도 그렇고.”
껄껄거리며 말하던 그는 갑자기 낯빛을 바꾸었다. 언예령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배신이지. 그렇지 않으냐? 예령아.”
백사각주의 시선에 언예령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가로챘다.
“백락사라고 불린다지?”
“뭐?”
“백사각의 위치도 찾았고, 백락사의 존재도 알았으니 정천맹이던 관부던 고발하는 일만 남았군. 약쟁이 소굴쯤이야 금방 정리되겠지.”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번 도발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네놈이 여기서 살아 돌아갈 성싶으냐?”
“충분히?”
“기회를 봐서 백사각의 무인으로 받아주려 했으나 방금은 도를 넘었다.”
“너 같은 늙은이 밑으로 들어가느니 혀를 깨물겠다, 사파 새끼야.”
“오냐. 정녕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하여간 나이를 먹으면 말만 많아진다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내가 말을 끊어내자, 백사각주의 눈이 반쯤 돌아갔다. 챙! 눈 깜짝할 새에 뽑혀 나온 검은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나는 슬쩍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뒤 비튼 방향으로 회전했다. 휘도는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검을 뽑았고 그대로 백사각주의 옆구리를 노렸다.
쩡!
검과 검이 부딪혔고 백사각주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빈틈을 노린 거였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막아낸 것이다. 확실히 절정에 다다른 고수라 불릴 만했다.
백사각주는 백사각주대로 내 일검에 놀라고 있는 눈치였다. 예상보다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일렀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에는. 환생한 이후 처음으로 천일백야검법을 펼쳐 볼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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