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장악[2]
5장 장악[2]
절정에 다다른 고수쯤 되면 싸우기 전부터, 싸우는 도중에도 항상 몇 수 앞을 예상한다. 전투에 임하는 사고(思考)의 틀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공격을 막느라 뒤로 밀려났던 백사각주가 나와 스치듯 눈빛을 교환했다.
눈에는 항상 여러 감정이 담겨 있기 마련이었고 고수는 하수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백사각주는 그래서 당황하고 있었다. 내 눈은 차분했고 놈은 내게서 평정심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검을 슬쩍 흔들자 백사각주가 움찔거렸다. 내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니 그저 보이는 대로 몸이 반응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나는 놈의 다음 행동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피잉-
한줄기 검기가 날아들었지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예상대로 백사각주는 거리를 벌린 채 검기를 쏴대며 나를 견제했다.
검기를 막아내는 나를 주시하며 내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요량이겠으나.
피잉-
나는 그저 보법을 밟는 것만으로 가볍게 검기 다발을 피해내고 있었다. 동시에 놈과의 거리를 점차 좁혀갔다.
그러자 백사각주의 안색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놈은 결국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시 거리를 벌려 계속 견제만 할지, 거리를 좁히는 나와 제대로 맞붙을지. 전자는 놈으로선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역시나 백사각주는 견제를 멈추고 정면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챙!
내 검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놈의 공격을 쳐냈다. 부드러움과 빠름이 공존하는 운류검법에서 쾌를 배제하고 유를 극대화한 검식이었다.
남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변형시킨 것이고, 인극의 경지에 들어선 내가 펼치는 검이라 기존의 운류검법과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나와 백사각주는 삼십여 합을 겨뤘고 이때부터 놈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검법이 부드러움에 치중했다는 걸 깨달았다는 듯 놈의 공격이 거칠어졌다. 내 검식 자체를 찢어발길 심산이었다.
쾅!
점차 서로의 검에 내공이 실리기 시작하면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검을 피하고 쳐낼 때마다 한 걸음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유검(流劍)은 강검(强劍)을 정면으로 막아내기엔 상성이 좋지 않았으니까.
내원 중앙에서 시작된 싸움은 어느새 외원과 경계를 나누는 담벼락까지 이어졌다.
“와-아!”
“저 건방진 새끼, 도륙을 내주십쇼!”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던 백사각 무인들도 점차 기세가 살아났다.
그 기세를 등에 업은 백사각주가 더욱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콰득!
고개를 비틀어 피하자, 놈의 검이 담벼락을 대번에 박살 냈다. 쉭. 부드럽게 휘어들어 간 내 검은 놈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큰 상처 없이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나와 백사각주는 다시 서로의 기색을 살폈다. 초반과 달리 놈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여유로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싸움은 내가 주도하고 있었다.
흑사방주 다음으로 강하다는 백사각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끌었을 뿐.
놈을 통해 흑사방주의 수준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연기는 이쯤이면 충분할 듯싶었다.
우-웅!
하단전이 아닌 중단전을 통해 끌어올린 내공이 더해지자 내 검이 한차례 진동했다. 활짝 펴있던 백사각주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런 놈을 향해 검을 가볍게 그었다.
쩌억!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흡사 천둥이 내리꽂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낸 백사각주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쭉 밀려나 한바탕 바닥을 굴렀다.
놈이 다시 일어나 자세를 잡아갈 때쯤 나는 벌써 몸을 날린 상태였다.
“큭!”
억눌린 신음과 함께 놈이 또 한 번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색이 창백했고 반격은커녕 내 검을 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나는 냉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이제는 내가 여기에 온 게 낭패라는 생각이 드나?”
“...”
대답은 없었다. 그래, 그럴 틈이 없겠지. 놈은 대답 대신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겠다는 듯.
나는 검을 계속 휘두르면서 놈의 시선을 주시했다. 섬이라서 도망칠 수는 없을 거고, 이대로 가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
“뭣들 하느냐! 보고 있지만 말고 노부를 도와라!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백사각주가 헉헉대면서 발악하듯 소리쳤다. 온몸이 이미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그 추잡한 말로에 백사각 무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주춤거렸다.
백사각주를 압도하고 있는 내 기세도 한몫했을 테고.
나는 슬슬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검을 직각으로 올려잡았다. 백사각주 또한 이번 공격을 막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직감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잠시. 대화 좀 하세.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러는 게 아닌가?”
이번엔 나를 향한 정중한 어조였다. 처음 봤을 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는 초라한 면모에 조소가 새어나왔다.
“돈? 돈을 원하나? 돈은 차고 넘칠 정도로 주겠네. 아니면 여자? 지위? 백사각이 싫다면 아예 흑사방으로 올려보낼 줄 수도···.”
나는 무시한 채 내공을 끌어올렸다.
“개 같은 놈이!”
무시를 당한 게 분했던 건지 아니면 죽음에 내몰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백사각주는 눈이 뒤집혀 마구잡이로 검기를 쏟아냈다.
콰과광!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흩뿌린 검기는 나를 비롯해 백사각 무인들까지 덮쳐갔다. 나는 그 혼란을 무시하고 오롯이 검을 떨쳤다.
내 검이 번쩍이는 순간.
피이이-잉!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백사각주의 뒤편까지 가로지른 채 서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백사각주는 가까스로 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경악으로 물든 표정과 함께 몸 곳곳엔 총 여덟 개의 관통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처 하나하나가 주먹만 한 크기여서 핏물과 내장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천일백야검법의 제이초식 팔섬관혼. 전력으로 펼치려면 이십 년 내공이 필요했지만 그 절반만 사용했다.
놈에겐 이 정도로도 충분했고 아직 백사각 무인들이 남아있었기에 내공을 조절해두었다.
쿵!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백사각주를 무심히 지나쳤다.
*
검을 손에 쥔 채 나는 내원 중앙으로 걸어갔다. 내 보폭에 맞춰 백사각 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오십은 넘어가는 숫자였는데 그 꼴이 퍽 우스웠다. 구심점이 되는 수장을 잃은 집단이 대개 이런 식이다.
물론 아랑곳하지 않는 집단도 많다. 다만 백사각은 각주를 제외하곤 대부분 실력이 높지 않았다. 질 보다는 수에 중점을 두는 것이 사파의 특성이다.
모래알처럼 가벼운 형세는 백사각주가 죽는 순간 이미 무너졌고 놈들의 눈빛은 대항할 기력조차 없다는 듯 흐리멍덩했다.
혹시나 해서 내공도 충분히 남겨두었는데.
그때, 놈들 사이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사십 대 초반쯤 돼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감히 한 말씀 올리고 싶은데,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조아린 채 물어왔다. 분위기를 보아 백사각주 다음 지위의 인물인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쳐다보았고 중년인은 내 긍정을 알아차린 듯 이어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각주를 제외한 저희는 별 볼 일 없는 놈들뿐입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대인께 덤비지 않겠습니다. 부디 살길을 열어주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인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를 기점으로 나머지 인원들도 뒤따라 투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한차례 훑어본 뒤 다시 중년인을 바라봤다.
“백사각이 저지른 악행은 그냥 눈감아달라고?”
노주에 머무른 지 고작 하루였다. 그 하루만으로도 놈들의 악명은 충분히 뇌리에 각인 될 정도였다.
중년인이 다급하게 부연했다.
“변명 같겠지만 백사각주의 폭정에 억지로 끌려다닌 자들도 분명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랐던 자들도 있고 또···.”
“변명 같은 게 아니라, 변명이지. 먹고 살려면 정당하게 일해서 벌어 먹고살면 되잖아? 네놈들은 그냥 편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야. 힘없는 사람. 정당하게 일하는 사람. 그들의 노력을 뺏고 재산을 강탈하고 시간을 착취하는 게 더 편하니까. 아니야?”
중년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백사각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절박함은 여전히 느껴졌고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나를 마주 바라봤다.
“정말 죽어 마땅한 놈들까진 바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멋모르고 백사각에 투신했다가 억지로 따르던 놈들. 각주가 두려워 망부석처럼 따르던 자들. 이들만이라도 선처해주십시오. 다시는 악행을 벌이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께 다짐하겠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고?”
“...대인께서 거두시고 지켜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와. 나는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중년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대화를 이끌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언예령과 언사룡이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공자님. 저도 같은 처지입니다. 공자님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시던 저도 이들과 같이 뜻에 따르겠습니다.”
언예령이 중년인의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인. 저는 인질로 잡혀 와서 잘은 모르지만, 이중엔 분명 저 같은 피해자들도 있습니다. 여기 총관님께서 그런 저희를 살펴주시기도 했는데···. 아무튼, 거두어주신다면 저는 평생 따르겠습니다!”
언사룡은 아예 바닥에 이마까지 처박았다.
다음은 다시 중년인 차례였다.
“그리고 이건 무척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한 번 여쭤봐도 되는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은 내 근처까지 와서 나만 들리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덕분에 나는 중년인을 다른 시선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꽤 현명해 보이는데 왜 백사각주 같은 놈을 따랐지?”
“그저 잔꾀 부리는 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변명이겠지만, 백사각주는 사람을 부릴 때 약점을 쥐고 흔드는 자여서 저도 어쩔 수 없이···.”
언예령과 엇비슷한 사연인 것 같아 그러려니 했다.
“백사각의 총관이라고 했나?”
“이것저것 잡일을 도맡았던 놈일 뿐입니다. 공손량(孔遜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언사룡.”
“예!”
언사룡이 고개를 휙 들어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둘이서 좀 전에 말했던 억울한 자들과 아닌 자들을 구분해. 죽어 마땅한 놈들은 무공을 폐하고 백사각의 죄목과 함께 정천맹에 압송한다. 백락사를 비롯해 여기 건물은 전부 불태우고.”
“선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공손량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고 언사룡도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백사각주의 재산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재산?”
공손량은 건물 안에 백사각주의 금고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왔다.
그동안 벌어들인 돈 중에서 흑사방주에게 상납하고 남은 돈. 개인적으로 빼돌린 돈. 그 외 여러 가지 귀중품이 들어있다고 했다.
“당장 처리하기 힘든 것들을 제하고도 현금과 전표를 합쳐서 은자 이만 냥 정도는 될 겁니다.”
“...”
“그리고 흑사방주에게 바치기로 했던 영약도 하나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영약이라는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돈은 죄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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