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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15화 (15/150)

5장 장악[3]

5장 장악[3]

명령이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손량과 언사룡이 재빠르게 인원을 구분했다. 구제받은 백사각 무인들은 대략 이십 명 정도. 나머지는 전부 단전을 부수고 사지를 포박했다.

모든 과정을 내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놈들은 순순히 처지를 받아들였다.

내 손에 죽느니, 정천맹에 투옥되어서라도 살아남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겠지. 물론 오판이었다.

과거의 내가 정천맹에 몸담았던 기간이 썩 길진 않았지만, 그동안 정천맹 지하감옥에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자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백락사 같은 마약과 연루됐으니,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놈들은 죽을 운명이었다.

“금고도 깨끗이 비웠습니다.”

공손량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 이만 냥과 귀중품들은 마차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리고 이게 말씀드렸던 그 영약입니다. 흑사방주에게 상납할 물건이었기에 그다지 좋은 영약은 아닙니다만.”

이해했다. 자신이 복용할 영약도 아닌데, 백사각주가 굳이 애써서 상(上)품을 구했을 리가 없었다.

목함을 열어보니 세 알의 환약이 들어있었다. 한 알을 복용하면 삼 년. 세 알이면 총 구 년의 내공을 올려주는 삼화구룡환(三化九龍丸)이었다.

한, 두 알만 갖다 바치고 남은 건 자신이 먹겠다는 의도가 훤히 드러났다.

내가 피식 웃자 공손량이 역시나 하는 얼굴이었다.

“눈치채셨나 봅니다.”

“그래. 다 늙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게 인간이지.”

영약을 살펴보는 사이에 이십 명의 무인들은 주방에서 가져온 기름을 건물에 쏟아붓고 있었다.

이어 그들은 각자 횃불을 손에 쥐었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공손량이 그들을 이끌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더 이상 백사각의 무인들이 아니다. 우릴 옭아맸던 백사각주는 죽었고 연명의 대가랍시고 무고한 이들을 괴롭게 만든 백락사 또한 불타 사라질 것이다.”

“예!”

“우린 앞으로 못난 놈들을 구원해주신 대인 밑에서 도리를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이 다짐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라.”

“따르겠습니다!”

이십 명의 무인이 하나 되어 소리쳤다. 동시에, 공손량과 언예령, 언사룡을 비롯한 모두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전부 태워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건물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어우러져 하늘로 치솟았다.

눈이 빛날 정도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인원들은 저마다의 상념과 함께 침묵에 빠져들었다.

삼각 중 하나인 백사각이 강호에서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

“각주님!”

젊은 무인 하나가 각주실의 문을 벌컥 열고 쳐들어왔다. 예의 따위 차릴 경황이 없다는 태도여서 각주라 불린 이도 따지지 않았다.

“뭔데 그리 호들갑이야?”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그러니까 그게···.”

무인은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핏물에 담갔다가 빼 오기라도 한 듯한 적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론만 간단히 말해.”

“...백사각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뭐?”

적사각의 주인인 사내, 적사각주가 멍한 눈으로 무인을 쳐다봤다.

“백사각주도 죽었답니다.”

“그 약쟁이 노인네가 죽었어?”

“백사각주 밑에 있던 자들도 정천맹으로 끌려갔고요.”

“이런 미친.”

적사각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확실해? 어디서 들은 정보야?”

“이미 노주 전역에 소문이 다 퍼졌는데요.”

강호의 소문은 와전될지언정 빠르고 나름 정확하다. 무림인들이 괜히 강호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명성에 목매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정천맹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니 진위 따위는 가려낼 필요가 없었다.

“죽으려면 진즉에 쳐 죽을 것이지 왜 지금 죽고 지랄이야.”

백사각주가 뒤지든 망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흑사방의 삼각은 흑사방주의 명령이 없는 한 독립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나 다름없는 세력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흑사방 전체가 유씨세가와의 전쟁을 앞둔 상황이었다. 전력을 하나라도 더 끌어모아야 할 판에 백사각이 통째로 뜯겨나가다니.

“방주께서 일 벌이지 말고 자중하고 있으랬더니. 그 노인네는 왜 뒤지셨데?”

“흑사방을 노리는 인물이 있는데, 그놈한테 졌답니다.”

“...”

지금까지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백사각주는 흑사방 서열 이(二)위의 무인이다. 그런 그가 졌다고?

“그놈이 누군데? 정천맹에 끌려갔다더니, 진짜 맹에서 나서기라도 한 거야?”

마약 사업은 돈이 되는 만큼 위험부담도 크다. 그래서 가장 실력이 좋은 백사각주가 맡고 있었다.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천맹 인물은 아니라고 하는데, 노주에서 그를 백면공자(白面公子)라 부른답니다.”

“백면공자?”

처음 들어보는 별호였다. 그동안 활동이 없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 인물이 왜 갑자기 흑사방을.

“방주께서는 무슨 말씀 없으셨나?”

“있었죠. 그게 제가 달려온 가장 큰 이유인데요.”

“뭔데.”

“백면공자 잡아 오래요. 그때까지 유씨세가와의 전쟁은 잠시 보류한다고.”

“...하.”

백사각주도 못 당해낸 놈을 무슨 수로.

“적사각에 떨어진 명령 맞아? 청사각 아니고?”

“예. 우리 맞아요.”

장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사각주는 한숨과 함께 결정을 내렸다.

“일단 청사각주부터 만나야겠다.”

*

“백면공자?”

내가 황당해하며 공손량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내 눈이 아닌 가면 위에 꽂혀 있었다.

“소문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백화루에서 대인을 본 자들도 있고 정천맹 노주지부로 사십 명을 압송하는 과정에도 함께하셔서 눈에 띄었을 겁니다.”

무공을 폐했다고 하지만 압송하는 과정에서 하나, 둘 도망치는 놈이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기에 직접 가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백면공자라니. 하긴, ‘가면을 쓴 나’의 별호이니 아무렴 어떤가.

“흑사방주의 이목은 제대로 끌었겠네.”

“이제는 유씨세가가 문제가 아닐 겁니다. 더 급한 불이 생겼으니까요.”

그래. 이제, 나를 처리하기 전까진 유씨세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이미 처리하려고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고. 나로서는 바라던 바였다.

그보다는, 공손량의 입에서 유씨세가란 말이 흘러나온 상황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손량은 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미 들통난 사실을. 근데 어떻게 알아봤지? 가면을 쓸 땐 머리도 과장되게 묶어 올리고 나름 다르게 보이려고 무공이며 목소리까지 신경을 쓰는데.”

내가 가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물었다. 방안에는 나와 공손량 둘뿐이었으니까.

백사각이 있는 섬에서 빠져나와 가장 고민이 됐던 건 구제된 이십 명의 인원들을 어디로 데려갈지였다.

유씨세가는 당연히 아니었기에 고심하던 찰나 이만 냥이라는 거금이 떠올랐다.

적당한 크기의 장원 정도는 살 수 있는 액수여서 고민하지 않고 백화루 근처에 빈 장원을 매입했다. 물론 공손량을 앞세워 처리한 일이었다.

언예령에게는 백화루를 허물고 새로 짓든, 개조하든 하여 다시 의원을 차리라고 돌려보냈다.

돈이야 장원을 사고도 꽤 남아있었으니까. 이십 명의 무인 중 다섯 명은 그녀를 도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고 했다.

의원의 수입이 궤도에 오르면 매달 이익의 일부를 회수하기로 했으니 일종의 투자였다. 수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게 가장 절실한 건 무엇보다도 내공이다. 품 안에 들어있는 삼화구룡환이 그 절실함을 달래 줄 터였다.

그 외에는 언예령을 돕기 위해 떠난 이들을 제외한 열다섯 명의 무인들. 열다섯에는 뜻밖에도 언사룡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원에 남아 나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눈을 불태우길래 그러라고 했다. 놈들은···. 언젠가, 어딘가에는 써먹을 데가 있겠지.

마지막으로 지금 내 앞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공손량.

본래 학사였던 그는 백락사라는 마약에 중독된 친우를 도우려다 백사각주와 엮였다고 했다. 가면을 쓴 나를 유진휘라고 유추할 정도로 썩 혜안이 깊었다.

공손량이 조심스레 말했다.

“대인을 보고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그저 정황을 보고 추측해봤을 뿐입니다.”

“정황?”

“예. 무공이 너무 뛰어나셔서 긴가민가했지만, 흑사방이 급작스럽게 유씨세가와 대립하게 된 일부터 시작해서 마협문 소문주와의 사건이 시발점이 됐다는 것과 유씨세가 소공자의 과거, 거악부와의···.”

“충분히 이해했다.”

이대로 두면 한참 설명이 이어질 것 같아 그의 말을 끊었다. 새삼 검신 영감의 넋두리가 떠올랐다.

‘우혁아. 총군사가 말이 얼마나 많은 놈인지 너는 아느냐?’

‘그래서 회의 도중에 도망쳐 나오신 게 자랑입니까?’

‘이놈아. 네가 그놈과 한번 정세에 관한 얘기를 나눠보기라도 했더냐? 놈은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을 쉬지 않고 떠들어댈 놈이다. 자고로 현명한 자는 검으로도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야.’

그때 나는 맹주씩이나 돼서 엄살 피우지 말라며 영감을 총군사에게 잡아다 바쳤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과는 해야겠군.

자연스레 떠오른 과거에 다시 한번 웃자 공손량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면을 원래대로 착용하면서 그다음을 물었다. 애초에 공손량에게 듣고 싶었던 건 이 부분이었다.

“이번 일에 마협문이 관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어째서?”

“흑사방주가 느닷없이 유씨세가와 전쟁을 벌이기로 한 점부터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세간에는 흑사방주가 제자처럼 아끼는 마종태의 복수를 위해 나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공손량은 그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제자처럼 아낀 것이 아니라, 마협문의 소문주는 흑사방주에겐 그저 특별한 고객 정도로 여겨지는 자입니다.”

“고객이라면.”

“도박장. 기루. 가끔 백락사까지 찾기도 했던 그자가 흑사방에 갖다 바친 돈이 꽤 됩니다.”

성정부터가 글러 먹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들어보니 참 가관이었다. 문파 이름에 ‘협’이 아니라 ‘흑’이 들어가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그런 놈을 위해 흑사방의 명운까지 걸어가며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어 보이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언예령의 언급이 떠올랐다. ‘큰돈’이 엮인 일이라 백사각주가 자중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었지.

“마협문에서 돈을 주고 의뢰했다면? 그건 흑사방주가 움직일 명분이 되나?”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자라서 금살귀(金殺鬼)라 불리는 자입니다. 그쪽이 더 타당한 명분이겠지요.”

그런가. 결국은 마협문이었나. 민심에 동승하는 척하며 뒤에서 일을 꾸민 거겠지. 정말 그랬다면 놈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고작 애들 싸움에서 끝날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오다니.

내가 눈을 빛내는 사이 공손량이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딱히 증거랄 게 없다는 겁니다. 나름 주도면밀한 자이기도 해서 책잡힐 만한 건 남겨두지 않았을 텐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문제 될 게 없다.”

“예?”

“자백이 있으면 증거는 필요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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