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기습[1]
6장 기습[1]
장원의 관리는 공손량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거두어 살핀다고는 했지만, 언사룡을 비롯한 열다섯 명의 무인들을 전적으로 이끌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따르는 것은 ‘백면공자’지 유진휘가 아니었다. 유씨세가의 평범한 소가주에겐 불필요한 자들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손량의 지위를 확립시켜주어야 했다.
“공총관.”
“예?”
“공군사.”
“그게 무슨···.”
“공감찰관.”
“대인. 왜 그러시는 건지 이유라도···.”
“공문주.”
“...”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내게 공손량이 황급히 다가섰다.
“문주는 빼주십시오.”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인께 선처해달라고 부탁한 게 저였으니 제가 책임을 져야겠지요.”
“역시 현명하군. 공총관. 공군사. 공감찰관.”
“...총관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지.”
내가 씩 웃자 이번엔 공손량이 제안해왔다.
“장원의 이름은 백의문(白意門)으로 짓겠습니다. 백면공자의 의지를 따르겠다는 뜻으로 문파 형식이 저들을 관리하기도 좋겠지요.”
“문주는 나보고 하라는 소리군.”
“힘없는 제가 대인의 이름이라도 빌려야 열다섯 명이나 되는 무인들을 감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수긍했다. 내 결정에 공손량은 감복한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쩌실 계획입니까?”
정식으로 백의문의 총관이 된 공손량이 물어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사방과 마협문.
둘 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특히나 마협문은 더욱이. 마음 같아선 백사각 때처럼 무작정 쳐들어가 패 죽이고 싶지만 흑사방은 가능해도 마협문은 아니었다.
객관적인 평가로 지금의 나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실력의 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내공의 부재가 가장 컸다.
개인이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내공 관리였다.
초식을 펼치는 건 물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내공을 싣고 안 싣고는 위력이 천지 차이였고 안력을 비롯한 오감의 활용에도 내공이 소모됐다. 상대의 실력이 높을수록 소모량도 심화할 것이고.
그 모든 행동을 신경 쓰며 내공을 안배한다 치더라도 언젠가는 동나기 마련.
내공이 마르는 순간 아무리 나라도 수적 열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협문은 문주는 물론 그를 대신해 수하들을 이끌 간부나 고수가 많으므로 백사각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도 않을 테니까.
애초에 마협문주씩이나 되는 자가 도발 따위에 넘어와 일대일 대결을 펼쳐줄지도 의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수하들로 차륜전을 펼쳐 내공을 갉아먹고 시작하겠지. 괜히 산서제일문을 노리는 최상위 문파겠는가.
어쨌든, 결국은 내 실력이 문제였다.
“나는 일단 신로객잔으로 돌아가 며칠 수련할 생각이다.”
신로객잔은 왕삼이 머무르고 있을 그 객잔이었다.
“알겠습니다.”
수련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는 삼화구룡환을 복용하고 내기를 다스리려는 심산이었다.
영약을 통해 구 년 내공을 온전히 흡수하고 일영청심공의 운기에 며칠 시간을 쏟아부으면 현재 삼십일 년에 가까운 내공이 정확히 사십 년에 다다를 것 같았다.
삼십 년과 사십 년은, 확실히 유의미한 격차였다.
“공총관은 백의문을 통해서 흑사방을 주시할 수 있도록. 흑사방주. 적사나 청사. 누구든 움직임이 보이면 객잔으로 찾아오고.”
“그러겠습니다. 남는 시간엔 틈틈이 훈련도 시켜놓고 언의원 쪽도 살펴보겠습니다.”
시키는 일 외에도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는 뜻이어서 나는 홀가분하게 백의문을 나섰다. 단전이 슬슬 품속에 지니고만 있던 삼화구룡환의 영기(靈氣)를 탐내고 있었다.
*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왕삼은 객잔에 없었다.
의아함에 객잔 주인에게 물어보니 요 며칠 해가 뜨면 밖으로 달려 나갔다가 해가 질 때쯤 몸이 흙범벅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했다.
나를 제대로 호위할 수 있도록 강해지겠다던 녀석은 착실하게 다짐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위치를 보니 곧 돌아오겠다 싶어 음식 몇 가지를 미리 주문해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대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예의 그 노부부가 나를 알아봤다.
“알고 계셨던 게지요?”
“뭘 말입니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노인을 응시했다.
“노주의 무림인들 사이에선 백면공자라고 불린다던데. 그분이 흑사방 놈들을 벌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분 덕에 흑사방이 상납 날짜도 까먹고 찾아오질 않고 있다오.”
“그렇습니까? 잘된 일입니다.”
“우리 같은 장사치들에겐 감사한 일이지. 강호에 그런 분이 많이 생겨나야 할 텐데. 마침 오늘 음식값을 받지 않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많이 드시오.”
“사양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과 달리 푸근한 미소가 가득한 노인이었다. 흑사방이 나타나기 전까진 원래 그랬다는 듯 자연스러운 미소여서 나도 함께 웃었다.
때마침 객잔 문으로 왕삼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노인 말대로 머리부터 발까지 땀과 흙이 뒤엉겨있었다.
“앗! 도련님!”
“누가 보면 네가 흑사방 놈들을 상대하고 온 줄 알겠다.”
“꼴이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왕삼이 무안하다는 듯 옷매무새로 급히 얼굴이나마 닦아냈다.
“밥이나 먼저 먹자.”
“네!”
왕삼은 나를 향한 반가움과 고된 수련 뒤에 찾아오는 허기짐이 합쳐져 소처럼 달려들었다.
그렇게 둘이서 말도 없이 음식을 싹 비웠다. 백의문에 있을 때도 식사를 신경 써서 챙겨 먹었지만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좋네요.”
왕삼의 말이 내 기분을 대변해주었다.
“그러냐.”
“네. 고작 며칠만인데, 도련님과 식사하는 게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
“그만큼 열심히 수련했으니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눈친데.”
“헉.”
속내를 들켰는지 왕삼은 귀신이라도 본 눈을 하고 있었다.
“먹는 것만 봐도 알겠더라. 오늘은 어째 나보다 더 먹은 것 같다.”
“수련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도련님의 식성이 왜 그렇게 늘어나는지. 물론 도련님처럼 생사가 눈앞을 오갈 정도로 몰아붙이는 수련은 아니었지만···.”
왕삼이 겸연쩍은 얼굴로 애꿎은 검을 쓰다듬었다. 연활팔식이 썩 마음에 들었나 본데.
“고생했다. 앞으로도 고생해야겠지만.”
“네, 더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생은 도련님이 하셨죠.”
왕삼은 말을 하다 말고 목을 숙였다. 손으로는 입 모양까지 가린 채였다.
“백면공자의 정체가 도련님 맞죠?”
“그게 누군데?”
“...가만 보면 도련님도 거짓말은 참 못하시는 것 같아요.”
“하하.”
나는 숨기지 않고 백사각을 처리했던 경과를 알려주었다. 환생했다는 사실 말고는 나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는 왕삼이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물론 알고 있어도 놀라는 건 당연했나 보다.
“정말로 혼자서 백사각을···. 공총관이란 분은 도련님 정체도 알고 계시고, 이만 냥, 의원 사업, 백의문···.”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의 왕삼을 이끌고 나는 삼 층 객실로 올라갔다. 녀석은 하루의 수련을 끝내고, 나는 수련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객잔의 노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뒷마당을 통째로 빌렸다. 돈을 지불하려 했으나 노부부는 한사코 거절했다.
“자재와 장작이나 쌓아두는 공간이라 오전에만 가끔 나와보는 장소이니 편히 쓰시오.”
“고맙습니다.”
그곳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낮에는 일영청심공에 몰두했고 해가 지면 왕삼의 수련을 조금씩 교정해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서도 나는 여전히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내기를 쌓아갔다. 그 결과. 사 일째 되는 날, 내공이 정확히 삼십일 년에 다다랐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일영청심공의 축기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과거에는 복수심만이 가득했던 때라 누구의 무공인지 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환생하고 나서야 무학에 올바른 관심이 생겼고 그래서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의 무공일까. 천일백야검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과거의 무공을 전부 회복하고 지극의 경지에 다시 올라 그다음을 넘보는 순간이 올 때. 천극의 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에는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판단이 섰다.
훗날 때가 되면 기회가 생기겠지.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망설이지 않고 품 안에 잠들어있던 삼화구룡환을 복용했다. 세 알로 나누어져 있던 영기가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하나로 합쳐졌다.
그 기운은 용 한 마리가 창천을 거닐 듯 내 전신을 한 바퀴 휩쓴 뒤에야 단전에 똬리를 틀었다.
정확히 구 년 내공이 더해져 이제는 사십 년의 충만한 내공이 단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말했듯이 삼십 년과 사십 년은 뚜렷한 격차를 보였다. 인극의 경지에 올라서긴 했지만 삼십 년 내공으로는 반쪽짜리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사십 년 내공이면 천일백야검법의 중반부 초식으로 접어들게 된다.
전반부와 같이 중반부도 세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십 년 내공이면 제사초식 진광결인(振光結刃)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그 이후 오초식은 오십 년 내공, 육초식은 일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니 차치하더라도.
화악!
소리 없이 꺼내든 검 위로 환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절정고수의 근거를 검기를 펼칠 수 있냐 없느냐로 판가름했다. 그리고 인극고수는.
검 위에 맺힌 빛이 겹겹이 중첩되어 종국에는 완연한 칼날의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검강(劍强).
유진휘의 몸으로는 처음 발현시킨 검강이었으나 내공이 부족했을 뿐이기에 완숙하기 그지없는 검강이었다. 천일백야검법의 중반부가 검강을 다루는 내용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로써 나는 낡은 객잔의 초라한 방안에서 인극의 경지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겼다.
*
수련을 마치고 객잔 일 층으로 내려온 나는 한구석에 앉아있는 공손량을 발견했다. 방에서부터 이미 그의 기감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에게 향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러웠다.
맞은 편에 앉아 음식을 하나 집어 들며 내가 물었다.
“흑사방주가 움직였나?”
“흑사방주 본인은 아니고, 적사각주가 문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청사각주도 함께하고 있는 것 같고요.”
백사각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서열 이위라는 백사각주를 일대일로 쓰러트렸다. 적사나 청사가 홀로 나서기에는 부담이 있었겠지.
나로서는 둘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 기꺼운 마음뿐이었다.
“이미 언의원 쪽에 사람이 다녀갔답니다.”
“그럼 곧 백의문으로 찾아오겠네.”
언예령에게는 만일 흑사방 무인들이 찾아오거나 하면 숨기지 말고 백의문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말해뒀었다.
나와의 관계는 그저 백면공자의 협박에 못이겨 백사각의 위치를 밀고한 것이라 여길 수 있도록. 내 탓으로 돌리면 놈들도 굳이 언예령을 들볶지 않을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주님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둘의 합공이면 백사각주 뿐만 아니라 흑사방주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괜찮냐고? 괜찮지 않을 리가. 놈들은 고작 꼬리에 불과했다.
“가자. 백의문으로.”
나는 객잔을 나서며 가면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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