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기습[2]
6장 기습[2]
“이렇게 대놓고 정착해있을 줄이야.”
적사각주가 목전에 둔 장원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청색무복의 사내, 청사각주 또한 실소를 지었다.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썩어 넘쳐나 보지.”
두 사람의 뒤로는 대략 서른 명의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적사각과 청사각에서 정예들만을 뽑아 대동한 것이다.
이마저도 백면공자라는 놈이 혹시나 도망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데려온 숫자였다.
적사와 청사. 자신들의 합공이면 솔직한 말로 흑사방주와도 붙어볼 만했다. 단지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 협력이라는 행동 자체를 고려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청사각주는 내심 우스워하고 있었다. 며칠 전 적사각주가 백면공자를 처리하는 일에 손을 빌려달라며 찾아온 것이다.
매사에 ‘만약’을 염두에 두고 무슨 일을 하던 신중을 가하는 그의 성격 탓이겠거니 싶다. 사내란 놈이 그딴 나약한 마음을 품고 살다니.
청사각주는 자신과 상반되는 성격의 적사각주를 흘겨봤다.
도와주면 적사각의 사업체 하나를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하기에 함께 온 것이니만큼, 실력행사는 제대로 해줄 심산이었다.
“들어가자. 백면공자인지 뭔지 잡으러.”
“바로 들어가자고? 좀 더 살펴보자니까.”
“뭘 살펴봐, 이 새끼야. 그냥 들어가서 목이나 따면 되는걸.”
“병신아. 백사각주를 일대일로 죽였다잖아.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약쟁이 노인네 따위. 우리도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이길 수 있었어.”
“지랄. 왜? 조만간 아예 방주님도 이길 수 있다고 해보시지.”
“솔직히 말해서 아니냐? 우린 젊고 살날도 많다. 세대교체는 언젠가는 이루어지기 마련이야.”
청사각주가 속내에 들어있던 야심을 슬쩍 내보였다. 적사각주라고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놈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놈과도 제대로 싸워야 할 날이 오겠지.’
적사와 청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대화네.”
별안간 담벼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사와 청사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당연하게도 내가 서 있었다.
“어, 언제부터···.”
몰랐을 것이다. 기척을 지운 내가 꽤 오래전부터 담벼락 위에 서서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가볍게 놈들 앞으로 내려섰다.
“안 들어오고 뭐 하나 했더니 둘이서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군.”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챙!
청색무복의 사내가 검을 뽑아 들이밀었다. 꼴을 보니 이놈이 청사. 옆에서 내 기세를 살펴보려는 놈이 적사였다.
나는 두 사내와 서른 명의 무사들을 대충 훑어봤다. 적사와 청사는 각자 백사각주보다 한 수에서 두 수 정도 실력이 떨어졌다.
다만 두 놈이 합공해오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공손량의 말대로 백사각주 정도는 꽤 쉽게 찜쪄먹을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물론 나를 상대로는 그 반대겠지만.
나는 잠재워두었던 기세를 피워올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왜 백사각주 때와 달리 네놈들을 직접 찾아가지 않고 기다린 줄 아나?”
기세에 압도된 탓인지 적사각주는 주춤 물러섰고 청사각주는 검을 든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적사와 청사는 안중에도 없었거든. 흑사나 백사쯤 되면 모를까. 대어(大魚)와 잡어(雜魚). 아니, 잡어 새끼 정도의 차이려나?”
“잡어 새끼? 미친놈이 우릴 뭐로 보고···.”
적사는 여전히 침묵 중이었지만 청사는 반응이 왔다.
“흑사방주가 유씨세가와 전쟁을 벌이는 대가로 얼마를 줬지? 은자 오천 냥? 만 냥?”
“...”
내가 금액까지 정확히 알고 있자 놈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네놈들에게 각자 일만 냥. 그럼 흑사방주는 얼마나 챙겼을까?”
놈들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나도 궁금했다. 마협문이 얼마나 쥐여줬을까.
나는 대충 되는대로 씨불였다.
“흑사방주는 약 십만 냥은 벌었을 거다. 그것도 놈은 뒤에서 명령만 내리고, 앞장서는 건 네놈들 같은 잡어 새끼들 뿐이야. 그러다가 네놈들이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신경이나 쓸까? 새로운 적사. 새로운 청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
“...십만 냥?”
이번 대답은 적사에게서 나왔다. 청사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속이 들끓는 중이려나.
“네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데?”
청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었다.
“백사각을 누가 불태웠는데?”
내 반문에 청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사각이 싹 털렸으니 뭔가 나오긴 했겠다는 눈치였다. 더욱이, 백의문의 문이 열리고 공손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사실입니다.”
“당신은?”
청사와 적사가 공손량을 알아봤다. 나름 백사각의 총관이었기에 모를 리가 없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오지? 설마 백사각주를 죽인 놈 밑으로 들어간 건가?”
“제가 백사각주 같은 자를 따르고 싶어서 따랐겠습니까? 그리고 그건 흑사방주도 마찬가집니다.”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서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흑사방주를 향한 적의까지 드러냈다. 역시 현명하군.
나는 혼란의 틈을 비집고 제안을 던졌다.
“흑사방주를 죽여주지.”
*
내 제안에 적사와 청사가 서로를 바라봤다. 각주라 불리는 놈들이니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들었을 테고.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눈 놈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원하는 게 뭐냐?”
적사가 청사의 마음마저 대변하듯 말했다. 나는 숨기지 않고 의도를 전했다.
“흑사방주를 죽이고, 마협문을 친다.”
“뭐? 하하, 별 미친놈이···.”
적사는 대소를 터뜨리다가 내 표정이 차가워지는 걸 보더니 웃음을 멈췄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마터면 머리통을 부숴버릴 뻔했으니까.
“네놈들은 흑사방주를 대신해 흑사방을 이끌게 되겠지. 적사방. 청사방. 이름이 별로니, 네놈들이 흑사가 되던지. 혹은 둘이 나눠서 이끌던지. 뒷일은 알 바 아니고.”
적사방. 청사방.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두 놈 모두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빛냈다. 적사가 먼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협문주가 누구인 줄 모르는 건가?”
“누군데?”
“철혈검(鐵血劍). 철혈검 마진탁이 마협문주다. 방주님도 마협문주 앞에서는 몇 수 접고 들어가는데, 네놈 따위가···.”
모르는 척했지만, 마진탁의 대해선 알고 있었다. 산서에서 철혈검의 명성은 그만큼 높았다.
“마협문주도 내가 죽인다. 네놈들은 그때까지 밑에 놈들이나 상대하면 돼.”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해서 네놈은 얻는 게 대체 뭐지?”
끝까지 신중하고 의심 많은 놈이었다. 반쯤 넘어온 청사와는 다르게. 해서 나는 놈들의 말을 빌렸다.
“세대교체. 산서제일문. 여긴 백의문의고, 내가 백의문주다.”
내가 뒤쪽의 장원을 가리키며 짐짓 장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또한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이었다. 산서제일문 따윈 관심도 없다.
다만 적사의 표정을 보니 놈은 점점 수긍하고 있는 듯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결정은 놈들 몫이다. 그리고 결정과는 관계없이 할 일은 마저 해야지.
스르릉. 내가 검을 뽑자 두 놈이 나를 노려봤다.
“뜻을 같이하자더니, 갑자기 무슨 짓이냐?”
나는 적사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같이하는 게 아니지. 네놈들은 내 밑에서 따라오는 것뿐이야. 애초에 날 죽이려고 찾아온 건데 모른척할 수도 없잖아.”
말에 힘이 실리려면 항상 그렇듯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내가 검을 든 채 다가서자 적사도 결국 검을 뽑았다.
“함께 왔으니 함께 덤벼. 병풍처럼 세워둔 수하들도 같이.”
“씨발. 그래, 네놈이 만약 흑사방주도, 마협문주도 죽일 실력이 있다면 네놈을 따라 마협문을 치겠다. 아니라면 농락한 대가로 사지를 찢어서 그대로 방주에게 갖다 바쳐주지.”
적사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좌측. 청사가 우측을 맡았다. 우르르, 달려든 서른 명의 무사들은 각자 병장기를 뽐내며 내 주변을 에워쌌다.
나는 검을 거꾸로 쥐어 칼등이 아래로 오게 했다. 놈들은 여기가 아니라, 마협문에서 싸우다 죽어야 할 테니까.
*
“따르겠다.”
“따르겠다?”
“...따르겠습니다.”
백의문의 정문 앞에서 적사와 청사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은 물론, 무복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온몸에도 멍 자국이 가득하리라.
서른 명의 무사들은 적당히 후려쳐 기절시켜두었다. 정예랍시고 데려온 것 같지만 그래봤자 이류에서 일류 사이.
검 하나에 한 놈씩 처리한 뒤, 적사와 청사만 집중적으로 두드려 팼다. 가장 끈질기게 버티던 청사는 결국 팔과 다리 하나씩을 비틀어놓자 패배를 인정했다.
“부러트리진 않았으니 걸을 순 있을 거다. 청사, 너는 수하들 깨어나면 데리고 가서 마협문을 칠 준비나 하고 있도록.”
“...”
“대답은?”
“예.”
청사가 억지로 쥐어 짜내듯 대답했다. 적사가 옆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저, 저는 어쩌시려고···.”
“넌 나를 흑사방으로 안내해야지.”
“이런 씨팔. 왜 내가.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슬쩍 검을 검집째로 치켜올리자 적사가 말투를 다듬었다.
“왜 저입니까? 저도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데.”
“그나마 낫잖아. 그리고. 같이 가는 게 좋을 텐데? 흑사방주가 죽으면 뒷수습할 사람이 필요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겠지.
각주 정도 되는 위치이니 알아서 세력을 흡수하고 상황을 무마시킬 것이다. 그조차 해내지 못하면 애초에 자격이 없었다는 거고. 적사는 자신 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가 가야죠. 청사 놈은 뒷수습할 머리가 없으니.”
“이 새끼가?”
적사와 청사가 만신창이인 몸으로도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놈들을 잠시 뒤로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공손량에게 다가섰다.
“저놈들의 대화를 듣고 급조한 계획이 나름 먹혀들었군.”
“훌륭하십니다. 어차피 처리해야 할 적들인데, 서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공총관의 시선에도 괜찮아 보인다면 바로 진행해도 되겠네. 그럼 다녀오지.”
내가 마실 나가듯 가볍게 걸음을 옮기자 공손량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바로 가신다고요?”
“그래. 공총관도 놀라는데, 흑사방주 또한 내가 이렇게 곧장 찾아갈 줄은 예상도 못 하고 있을 테니.”
“기습적이기야 하겠지만 흑사방은 백사각과는 다르게 경비도 체계적이고 보초들도 실력이 높습니다.”
체계적? 보초? 그래봤자 시골구석의 사파 집단이다. 천영검대가 익힌 잠행술은 정천맹의 경비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다.
맹주만을 따르던 기밀검대이니만큼 누구도 모르게 드나들 필요가 있었고 그만큼 혹독히 훈련해둔 잠행술이었다.
“다녀오십시오.”
결국 공손량은 만류를 포기하고 나를 배웅했다.
나는 여전히 투덕거리고 있는 놈 중 적사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가자. 앞장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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