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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18화 (18/150)

6장 기습[3]

6장 기습[3]

“이게 맞는 겁니까?”

적사가 앞장서 걸으면서 연신 나를 돌아봤다.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설마 혼자서 흑사방주를 치러 나설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흑사방주가 그렇게 무서운 놈이냐?”

“...”

적사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껏 모셔 왔던 주인이니 그렇지 않을까 싶다가도 지금은 모반에 가담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에겐 선심 쓰듯 일만 냥을 약속하고 스스로는 십만 냥을 챙겼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돈밖에 모르는 추잡한 늙은이죠. 노주 뒷골목에서 행여나 정천맹이 잡으러 오진 않을까 숨어지내는 주제에 밑에 놈들에겐 거들먹거리기나 하는.”

한번 피어오른 반감은 불이 번지듯 적사의 전신을 휘감았다.

나로서는 흑사방주나 적사나 그놈이 그놈인지라 가만히 그를 뒤따랐다.

길을 걷는 내내 적사는 연신 흑사방주에 대해 떠들어댔다. 여태 쌓여왔던 온갖 불만부터 그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약점은 어떤 부분인지 등.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계속 이동해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산의 초입이었다.

“백사각은 섬. 흑사방은 산속. 적사각은 어디 지하에라도 숨어지내고 있겠네?”

“...적사각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별생각 없이 지껄인 말인데 때려 맞췄나 보다. 나를 향한 적사의 두려움과 경계심이 조금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됐고. 얼마나 올라가야 하지?”

“빠르게 이동하면 두 시진 정도 걸립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백의문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해가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서 다시 두 시진이면 기습하기에 알맞은 어둠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저 그런데···.”

내가 시선을 내리자 적사가 말을 이었다.

“여유가 되신다면 부방주도 같이 처리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이미 내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뒤라 흑사방주가 죽는다는 건 기정사실로 여기는 그였다. 하긴, 그랬으니 이곳까지 나를 안내했겠지.

“부방주?”

“예. 지위상 각주보다 높은 자라서.”

흑사방주가 죽고 남은 세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은?”

“오른쪽 귀가 없습니다. 짝귀는 흑사방에 부방주 한 놈뿐이라 보면 바로 아실 겁니다.”

*

유독 달빛마저 흐린 밤하늘이었다.

보초를 서는 무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잠자리에 빠져든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거목 위에 올라선 채로 흑사방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비가 체계적이라더니. 흑사방은 산속에 지어진 작은 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벽을 등에 지고 나머지 삼면은 거목들로 형체를 가렸다. 무림인이라고 해도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의 목책과 철문은 물론, 목재 망루가 사각을 책임졌다. 웬만한 자들은 저 안으로 숨어들 생각조차 못 하겠지만.

나는 거목 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그대로 치솟았다. 밤하늘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가로지른 뒤 망루 중 하나를 골라 그 꼭대기 위에 내려앉았다.

그 과정은 눈 깜짝할 새였고 옷깃 하나 펄럭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망루에서 보초를 서는 무인들은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좀 더 확장된 시야로 흑사방 내부를 살피며 흑사방주로 여길만한 기감을 쫓았다.

더 안쪽.

망루 위에서 다른 건물의 지붕으로 연기처럼 스며들 듯 이동했다. 이동할수록 기감이 점점 진해졌다.

정확히 일곱 차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고 나서, 나는 흑사방주가 집무실로 사용하는 듯한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아직 깨어 있었고 그 외에도 기척이 하나 더 느껴졌다.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

“백면공자의 위치를 찾았다고 보고를 받은 게 오전이었는데, 왜 소식이 없지?”

흑사방주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오른쪽 귀가 없는 중년인이 맞은 편에 선 채로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적사각주가 자존심도 버리고 청사각주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지금쯤 이미 놈의 목을 가지고 본방으로 복귀하고 있을 겁니다.”

흑사방주는 술잔을 들이킨 뒤 가볍게 웃었다.

“의외긴 했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인데 말이야.”

“방주님의 명령이 그만큼 지엄하다는 뜻이겠지요.”

아부성이 짙은 말이었지만 흑사방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갔다.

“백사각을 잃은 게 뼈아프군.”

삼각 중에선 백사각의 수입이 가장 컸다. 이번 달엔 영약도 하나 구해두었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더군다나 백면공자라는 놈을 처리하고 나면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유씨세가를 치기로 계획 중이었다.

“백사각이 없어도 유씨세가 따위는 본방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소공자만 확실히 죽이고 적당히 공격하다 빠지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여간, 마협문 새끼들도. 정파를 자처한다는 놈들이 속은 우리랑 다를 게 없다니까.”

“소문주라는 놈의 성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정파는 무슨.”

“돈을 주는 의뢰인인데 너무 씹진 말자고.”

“조심하겠습니다.”

흑사방주와 부방주가 낄낄거리며 술잔을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술을 들이켜려는 순간.

쉭-!

스산한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푹!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이어서 울려 퍼졌다.

흑사방주는 기겁하면서도 벽에 걸려있는 검을 순식간에 챙겨 창가를 노려봤다.

“너. 누구냐?”

놈의 질문에 신형이 어둠 속에서 방안으로 내려앉았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신형은 바로 나였다.

내가 은신하고 있던 창가에선 각도 상으로 부방주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기습을 대비하고 지어진 구조 같았다.

방 중앙으로 걸어가 술 마시던 자세 그대로 목에 검이 틀어박혀 죽은 부방주를 내려다봤다. 표정도 여전히 웃는 채였다.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테니 호상이네.

나는 활처럼 쏘았던 검을 회수한 뒤 고개를 돌렸다. 흑사방주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모양새였다. 내가 흑사방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고 이곳까진 어떻게 들어왔는지.

“백면공자?”

놈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놀랐나?”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놈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놈은 대답 대신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 줄을 하나 잡아당겼다.

나는 잠자코 놈의 행동을 지켜봤다. 보아하니 침입자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 이 건물의 경비를 서는 무인들을 부르는 장치 같았다.

예상대로 놈은 방문을 연신 힐끔거렸다. 그 꼴이 퍽 우스웠다.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희망 품지 마.”

건물을 지키던 여섯 명의 무인은 이미 다 처리하고 오는 길이었다.

“...네놈이야말로 객기 부리지 말아라. 여긴 흑사방이다.”

“알지. 흑사방인거. 그러니까 왔지.”

나는 여유롭게 탁자의 술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사이 놈은 다리를 움찔거리며 도망갈 틈을 노렸다.

하지만 창가 쪽. 방문 쪽. 나갈 구멍은 나를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었다. 부방주가 죽는 순간에야 겨우 내 기척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놈은 나를 자신보다 고수라 여기고 있는 듯싶었다.

꼴을 보면 백사각주보다 볼품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저 꼴이 바로 백사각주보다 강하다는 증거였다.

백사각주는 내 실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덤벼들었던 거고, 흑사방주는 내 실력을 제대로 보고 싸우면 죽는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살고 싶나?”

내가 묻자 놈의 눈이 흔들렸다. 대답하자니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그렇다고 아니라 할 수도 없고.

“그 전에. 대경 무슨 이유로 흑사방을 노리는 건가?”

“그걸 질문이라고? 네놈이 그동안 해왔던 짓을 떠올려봐라. 이유가 한, 두 개냐?”

“설마 정천맹에서?”

“거긴 너 같은 잡놈까지 신경 쓰기엔 바쁘시다는데.”

“...후우.”

놈이 한바탕 욕을 내뱉으려다 참는 게 보였다. 그래, 살려면 참아야지. 살려줄 생각은 없다만.

나는 본심을 숨기고 계속 말했다.

“살고 싶으면 이유를 물을 게 아니라 방법을 물어야지.”

“원하는 게 뭔가?”

“마협문.”

“그게 무슨.”

놈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의도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도록 내가 먼저 원하는 바를 건넸다.

“유씨세가를 치는 대가로 마협문에게 얼마를 받았나?”

“...액수가 궁금한 건가? 아니면 그 사실 자체를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한 건가?”

“후자겠지.”

흑사방주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를 내주면 목숨은 보장해주나?”

“증거만 확실하다면야.”

대답과 동시에 놈이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마협문주와 한 장씩 나눠 작성한 계약서다. 선수금 오만 냥. 일이 마무리되면 추가로 삼만 냥.”

일이 끝나고 돈을 떼먹히지 않으려면 계약서는 있어야 할 테고, 그걸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품속에 지니고 있었던 건가.

“그게 네 목숨줄이다. 내놔.”

내가 손을 뻗자 흑사방주가 망설였다.

“검부터 집어넣고 얘기하시게.”

“그러지.”

나는 순순히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놈은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여전히 손으로 붙잡고 있긴 했지만.

“하나만 더 물어보겠다. 정체가 뭔가? 누구기에 본방과 마협문 사이의 일에 관심을 가지냔 말이다.”

“꽤 궁금한가 보네.”

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가면을 벗어 품 안에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사방주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부릅떴다.

“하. 하하하.”

이어지는 허탈한 웃음이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실소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빌어먹을 애새끼로군. 애초에 살려둘 생각조차 없었던 것 아니더냐?”

“없었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흑사방주가 사나운 살기를 내뿜었다.

내가 가면을 벗고 유진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고작 이런 어린놈한테 자존심을 내던졌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았을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 또한 나를 죽이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을 터.

챙! 놈이 검을 뽑았다. 뽑자마자 검 위로 시퍼런 검기가 치솟아 올랐고 놈은 그 상태로 내게 단숨에 짓쳐들어왔다.

초점은 이미 분노와 살기로 흐려진 상태였다.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은 덕분인지 동작이 컸고 빈틈도 몇 군데나 보였다.

어느 정도 의도한 부분이다. 오늘 싸움은 큰 소란 없이 단숨에 끝장낼 생각이었으니까.

끌어올린 내공 일부를 안력(眼力)에 집중하자, 세상이 느려졌다. 검을 치켜들고 나를 양단할 기세로 쇄도해오고 있는 흑사방주도 지금은 멈춰있는 과녁이나 마찬가지였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나는 평소처럼 움직였다. 검 손잡이를 쥐는 동시에 오른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내공의 흐름에 따라 낮게 깔렸던 상체가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검이 소리 없이 뽑혔다.

극쾌를 추구하는 발검술인 제일초식 일섬단세.

슁- 번쩍!

한줄기 섬광이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찰나의 순간을 두고 터져 나온 검기가 갈라진 틈을 한 번 더 가로질렀다.

동시에 느려졌던 세상이 원래대로 되돌아오면서 흑사방주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쥐고 있던 검을 힘없이 떨어뜨린 놈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런 실력을 왜 숨기고 살···.”

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몸통 위에 새겨진 혈선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촤아아악!

선이 갈라지며 놈의 시체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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