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무산[1]
7장 무산[1]
흑사방주의 시체를 뒤로하고 먼저 계약서를 챙겼다. 이번 일에 마협문이 엮여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액수도 예상과 엇비슷하게 팔만 냥. 말 그대로 엄청난 거금이다.
마협문의 후계자가 나 같은 놈에게 얻어맞은 사건이 이만큼 분노할 일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싶으면서도, 그게 명문이 살아가는 방식이려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예. 자존심. 그것을 지키려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마협문의 이름을 되뇌면서 주변도 살펴봤다. 딱히 챙길만한 건 또 없는 것 같고.
무심히 여러 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적사였다.
어둠 속에 숨어 흑사방에 잠입한 나와 달리 적사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와 이 건물의 일 층에서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지라, 나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얼굴도 이미 가면으로 가린 후였다.
“마침 부방주가 같이 있길래 처리했다.”
“예.”
흑사방주와 부방주. 두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적사는 나를 대하는 게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진 느낌이다.
이길 줄은 예상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러던 적사가 별안간 흑사방주의 시체를 짓밟기 시작했다.
“개 같은 늙은이. 네까짓 놈한테 여자나 납치해서 데려다 바치려고 내가 무공을 배운 줄 아나. 잘 뒤졌다, 씹새끼야.”
그간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한 듯 놈은 한바탕 폭언을 터뜨리다가 잦아들었다.
“후. 죄송합니다.”
“그래.”
나는 별로 관심도 없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적사의 말에는 관심이 생겼다.
“방주는 돈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여서 현금은 들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 재산은 어느 곳인지도 모를 전장에 맡겨두고, 평소에도 추적할 수 있는 전표만 소량 들고 다닙니다.”
“전장이라. 그건 좀 아쉽네.”
전장에 맡겨 둔 돈은 본인이나 직계가 아니면 찾을 수 없다. 흑사방주가 죽었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대신 늙은이가 병장기에 수집욕이 조금 있어서. 혹시 필요하시면 병기고라도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적사는 곧 흑사방이 제 손안에 떨어질 거라는 기대감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로 인해 가능했던 일이라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눈치였다.
혹은 내 실력이 상상 이상인지라 심기를 거스르기 싫다는 뜻일 수도 있고.
병장기라는 말에 나는 흑사방주가 사용했던 검을 슬쩍 살펴봤다.
확실히 뛰어난 검이긴 했다.
일격과 이격이 존재하는 일섬단세의 초식. 원래라면 흑사방주의 시체는 이등분이 아니라 사등분으로 갈라졌어야 했다. 놈이 들고 있는 검까지 베어버릴 기세로 초식을 펼쳤으니까.
하지만 놈의 검이 초식의 일격을 막아냈다. 툭 치면 쪼개질 정도로 금이 가긴 했지만, 저 정도 강도면 보기 드문 명검임이 분명할 것이다.
검신 영감이나 나나, 아무리 고수라도 좋은 검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흑사방주가 초식의 이격까지 피할 실력이 있었다면 놈은 좀 더 오래 살아남았겠지.
내 눈치를 살피던 적사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앞장섰다.
“이 건물의 지하에 병기고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일 층 구석에서 특별한 장치를 손봐야만 입구가 열리는 곳이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섰던 적사가 불을 밝히자 병기고 내부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여러 종류의 무기와 호신갑 같은 방어구가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관상용으로 놔둔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가져가셔도 됩니다.”
나는 밀실을 한 바퀴 돌면서 무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검. 도. 창. 절편. 부. 겸. 비도. 그중에서 내가 지닌 청로검에 버금가는 명검 하나를 발견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예기나 강도. 손에 잡히는 균형 등. 모난 곳 없는 훌륭한 검이었다.
과거의 나는 원래 두 자루의 검을 사용했었다. 발검술인 천일백야검법의 일초식을 싸우는 도중에도 언제든 발휘할 수 있도록. 상대방으로선 예상하지 못할 비장의 한 수였다.
나는 그 검과 함께 비도 한 쌍도 챙겨 넣었다. 왕삼에게 챙겨줄 도 한 자루도 잊지 않았다.
연활팔식은 검보다는 검날이 넓은 도로 펼치는 게 어울리는 무공이었다.
나는 만족한 얼굴로 밀실에서 빠져나왔고 적사가 뒤를 따랐다.
“흑사방은 제가 확실히 장악해두겠습니다.”
적사가 믿어달라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나흘.”
“예?”
“나흘 내로 흑사방을 수습하고 마협문을 칠 대비까지 끝낸 뒤 백의문으로 보고해.”
“나흘··· 이요?”
적사가 그건 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못하겠으면 청사를 부르고.”
“아닙니다. 나흘. 충분하죠.”
“직접 보고하러 올 필요는 없다. 대비가 끝나면 너는 흑사방을, 청사는 네놈이 이끌던 적사각을 포함한 청사각 인원들을 데리고 양면에서 기습할 거야. 마협문 위치는 알지?”
“산서에서 마협문이 어딨는지 모르는 무림인은 없습니다.”
적사가 계획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중얼거리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쩔 거냐는 눈빛이었다.
“기습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혼란을 틈타 마협문주를 친다. 마협문주를 죽인 뒤에 나머지는 함께 정리하도록 하지.”
흑사방이 간부와 문원들을 상대하는 사이, 마협문주를 처리한 내가 흑사방 쪽에 가담한다면.
적사는 그 과정을 먼저 머릿속에 그려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실력을 직간접적으로 체감한 덕에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 될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해서 나도 그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담’따윈 없을 테니까.
*
“백의문주의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
청사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기절했었던 수하들이 깨어나자 그들만 먼저 돌려보낸 뒤 공손량을 따라 백의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온종일 공손량을 쫓아다니며 묻고 있었다. 지금은 아예 집무실에 눌러앉은 상태였다.
공손량은 적당히 상대하다가 돌려보낼 심산으로 대꾸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문주님은 그저 문주님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좀 알려주십쇼.”
“안 돌아가십니까? 마협문을 칠 대비를 하고 있으라고 문주님께서 말씀하신 건 기억하고 계시고?”
“대비는 무슨. 싸우러 가는데 뭔 대비요.”
원래에도 이미 유씨세가와의 전쟁을 위해 본진에서 집결 중인 상태였다. 명령만 내리면 수하들은 단숨에 출전시킬 수 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청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문주가 적사각주를 앞세워 흑사방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깨달았습니다.”
공손량은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었다. 청사는 계속 말했다.
“마협문. 흑사방. 둘 다 엎어버릴 계획이구나.”
공손량이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머리보다 감정이 앞서는 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병신입니까? 그 정도도 눈치도 없게. 적사 놈은 이미 방주 자리에 눈이 멀어서 그런 판단조차 못 하고 있겠지만.”
공손량은 청사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계속 눌러앉아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저라도 살 수 있을까요?”
공손량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장내에 내려앉은 침묵을 청사가 먼저 깼다.
“부각주, 아니 이제는 백의문의 총관이지. 공총관께서는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백사각에서.”
공손량은 청사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 이십 대 후반쯤 되는 나름 젊은 나이에 청사각의 각주가 된 사내는, 지금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공손량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빌었습니다.”
“예?”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청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손량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청사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게 다입니다. 결정은 문주님이 하시는 거겠죠.”
공손량의 시선을 건네받은 내가 청사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놈은 내가 뒤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퍽!
뒤통수를 후려치자 청사가 도끼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눈을 깔았다.
“버,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고작 몇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방주를 처리하고 왔냐는 뜻이었다.
“다녀왔지. 난 할 일을 하고 왔는데, 넌 왜 여기 앉아서 공사다망한 공총관을 들볶고 있지?”
“이미 다 들으셨잖습니까.”
다 들었지.
첫인상은 적사가 냉철하고 청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놈이었다. 한데 그 반대였다니.
“내 계획도 알아차렸겠다. 살고 싶으면 그냥 도망치면 될 일 아니었나?”
“...저와 적사 놈을 두들겨 팰 때, 검에다가 추혼향을 발라두셨잖아요. 백화루주가 구해줬겠죠.”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었군.
그의 말대로 언예령은 개원을 준비하면서 금창약과 내상약, 추혼향 등 여러 가지 약재와 물건들을 백의문에 지원했다.
놈들이 행여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다른 마음을 품거나 도망칠 것을 대비해 사용한 것도 맞고.
“너도 나름 각주라 이거냐.”
수장이나 간부는 그에 걸맞은 자질을 가진 인물이어야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게 정천맹의 맹주든. 뒷골목 쓰레기들의 대장이든.
그때, 청사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시키시는 일은 뭐든 따르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쇼.”
나는 잠시 공손량과 눈빛을 교환했다. 어쩔까 하고 물었더니 결정은 내 몫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청사가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를 응시했다.
“나흘 후에 마협문을 칠 거다.”
청사는 경청하겠다는 듯 듣기만 했다.
“야밤을 틈타 흑사방 전원이 기습하게 되겠지. 그날, 너는 마협문의 소문주를 확실하게 처리해라.”
“마종태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뜸을 들이자 청사가 나를 올려다봤다. 지금 시키는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살 방법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적사의 숨통도 네가 직접 끊어라.”
“적사 놈을···.”
“마협문주는 내가. 지금쯤 흑사방을 장악하고 있을 적사는 네가.”
그동안 몸담아왔던 흑사방의 마지막을 직접 마무리 짓는 일이다. 고민할 법도 한데, 청사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한 뒤에도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고려해보지.”
“예.”
“그럼 돌아가서 청사각과 적사각 인원들을 준비시켜놔.”
길이 보였다는 듯 청사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떠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공손량이 차 한잔을 내밀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살려주실 겁니까?”
“말한 대로야. 마협문이 기습에 무너질 만큼 만만한 세력도 아니고, 서로 큰 타격을 입을 텐데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먼저겠지. 그보다.”
내가 흑사방에서 가져온 계약서를 건네줬다. 공손량은 계약서를 살펴보면서 눈이 가늘어졌다.
“증거가 있었군요.”
“품에 고이 간직하고 다니더군.”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마협문이 흑사방을 이용해 유씨세가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흑사방과 분란이 생겨 오히려 서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소문의 중점은 두 세력의 마찰이고 나와 백의문, 유씨세가는 크게 언급되지 않게.”
사파와 엮여서 일을 벌이려다 도리어 패가망신했다는 소문이 돌면 놈들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것은 자명했다.
목숨은 물론 놈들이 그렇게 중요시하는 명예 또한 함께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사흘 후에 맞춰 소문이 자연스럽게 퍼질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돈을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마음껏 써.”
돈이야 백사각에서 가져온 액수가 워낙 크다 보니 아직 꽤 남아있었다. 공손량이 대답과 함께 계약서를 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지금부터 움직여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듯.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