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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20화 (20/150)

7장 무산[2]

7장 무산[2]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백의문에 마련된 거처에서 나는 운기와 수련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철혈검 마진탁. 절정고수 중에서도 다시 상위권을 차지하는 무인.

질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도 없었다. 싸움을 대비해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나흘째가 된 당일에는 잠도 충분히 자두었다.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가보니 해가 중천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내원을 지나쳐 외원에 다다를 때까지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백의문은 현재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공손량이 내가 지시했던 대로 소문을 퍼트릴 준비를 하기 위해 백의문의 무인들과 함께 동분서주하고 있던 까닭이다.

덕분에 나는 고요함 속에서 외원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뜨거운 햇살이 전신으로 녹아들고,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열기를 달래주었다. 환생했던 날은 한여름의 중반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두 달 정도 지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다사다난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유진휘의 삶과 동화되는 게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최근에는 가면을 쓴 백면공자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결국 유씨세가와 유진휘의 평범한 삶을 위한 일이었다.

문득 내가 죽던 날 소이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넌 뭐 하고 살 건데?’

‘저요?’

‘그래. 언젠가 너도 그만둘 때가 오게 된다면. 뭐 하고 살래?’

‘그냥 뭐, 고향에 내려가서 가업도 잇고 무공수련도 하고 평범하게 살겠죠. 이래 봬도 제 가문이 고향에선 꽤 유명한 무가 아닙니까. 말씀드렸었죠? 그래서 제 검법도···.’

소이겸이 꿈꾸던 평범한 삶. 그 꿈이 지금은 내 꿈이 되었다. 어머니가 평범한 무가의 자식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 막연히 소이겸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탓이다.

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막상 지내보니,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평범하게 살아본 적이 있어야지.

마종태와의 시비로 벌어진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싸우고 죽이는 일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가면을 쓰고 단죄하는 게 최선이었을 뿐. 후회 따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로써 일이 마무리될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레 빠져든 상념이다.

그때 저 멀리서 백의문을 향해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세를 보니 청사였다.

천천히 운기조식을 마무리하고 정문을 나서자 청사가 때맞춰 내 앞에 다다랐다.

“애들은 먼저 보내놨습니다. 적사 놈도 지금쯤 흑사방 무인들을 이끌고 이동하고 있을 겁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라고 전했지?”

“예. 마협문을 칠 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나 일반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셨다는 말도 다 전해뒀습니다.”

그런 놈이 있으면 마협문주보다 먼저 베어버리겠다고 경고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말씀하신 것도···.”

청사가 죽립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과 똑같은 죽립을 청사도 쓰고 있었다.

놈뿐만 아니라 청사각, 적사각 그리고 흑사방 무인들까지. 그들 모두 이것과 같은 죽립을 쓰고 있을 것이다.

죽립을 건네받아 착용하자 얼핏 보면 청사와 나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미 무복도 야습에 걸맞은 칠흑색으로 맞춰 입은 상태였다.

마협문이 있는 곳은 산서의 신강(新絳)현.

근처 객잔에 말을 준비해뒀다고 하니 지금 출발하면 시간에 맞춰 도착할 것이다.

“가자.”

“예.”

나는 청사를 앞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백락사를 왜 못 구해?”

마종태가 침상 위에 기대앉은 채 신경질적인 기세를 뿜어댔다. 반라의 모습이었는데 왼편에는 겁먹은 시비 한 명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게···.”

침상 앞에는 마종태의 호위를 담당하는 무인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소문주님께서 병상에 누워 계실 때 백사각주가 죽고 백사각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뭔 개소리야?”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일 때문에 한동안 백락사는 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마종태가 인상을 구겼다. 백사각주가 죽은 것 따위는 관심이 없었지만, 백락사를 못 구하는 건 문제가 됐다.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성욕과 더불어 백락사의 쾌락을 향한 욕구가 전신을 지배했다.

오늘을 위해 간신히 참고 버텼더니 백사각이 갑자기 사라져?

“아버지가 흑사방을 이용해 유진휘, 그 새끼 집안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셨다더니 문제라도 생겼나?”

“그 일과는 별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마종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비를 바라봤다.

“들었지? 백락사가 없다니까 네년이 그만큼 노력 좀 해야겠다.”

이어 마종태가 시비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시비가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넌 이만 나가봐. 백락사를 대신할 거라도 찾아오고.”

“...예.”

무인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비를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몸을 돌리자.

“어서 빨아, 썅년아.”

“소, 소문주님. 제발···.”

“제발 뭐? 오. 그 표정도 나름 괜찮은데.”

마종태의 폭언이 터져 나왔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색욕과 광기가 심해 보였다. 한낱 호위무사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무인이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방문이 밖에서부터 먼저 열리며 죽립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의 반이 가려져 입가만 드러낸 상태였는데 입가엔 조소가 가득했다.

“저 새끼는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염병을 떨고 있네.”

막 나가려던 무인이 흠칫 놀라 물러섰다가 재빠르게 검을 뽑았다.

“누구냐!”

“누구냐고 물을 시간이 있으면.”

죽립인이 눈앞에 겨눠진 검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당황한 무인은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일장을 얻어맞았다.

“검을 휘둘렀어야지, 병신아.”

피를 토하며 붕 날아간 무인이 방구석에 처박혀 그대로 절명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마종태가 재빨리 자신의 검을 찾으며 살기를 피워올렸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뭐 하는 새끼냐고?”

죽립인이 슬쩍 정체를 보여주자 마종태가 움찔 놀랐다.

“청사각주? 당신이 왜 마협문에?”

마종태가 말을 하다말고 반쯤 열린 방문을 쳐다봤다. 여태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밖이 소란스러웠다.

‘기습이다!’

‘막아라!’

‘문주님께 보고하고 대주들을 불러와!’

익숙한 목소리들이 악을 쓰며 어딘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뒤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상황파악을 끝낸 마종태가 이를 악물었다.

“씨발, 흑사방 따위가 감히.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아버지가 나서면···.”

아버지라는 말에 청사가 대소를 터뜨렸다.

“네 아비가 뒤지는 게 빠를까? 네놈이 뒤지는 게 빠를까?”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린지는 지옥에 가서 네 아비에게 물어봐라.”

청사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검을 뽑으며 마종태에게 달려들었다.

*

“기습이다!”

“침착하게 수비해라!”

한밤중의 기습에도 마협문의 대처는 재빨랐다. 여러 건물에서 무인들이 차례차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채채챙!

촤악!

피가 튀고 쇳소리가 난무하는 와중에, 나는 흑사방 무리에 섞여 전황을 주시했다.

기습의 이점을 지닌 채 숫자로 밀어붙인 덕에 초반 승기는 흑사방 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이미 스무 명 가까운 마협문의 무인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어라!”

간간이 내게 덤벼오는 자들도 있었지만.

쉭!

가볍게 휘두른 일검에 목이 잘려나가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창 흑사방의 기세가 치솟아 오르고 외원을 휩쓸며 내원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다듬어라! 우리가 왜 마협문인지 똑똑히 알려주거라!”

“문주님이 오셨다!”

“대주님과 장로님들도!”

안쪽에서 사뭇 다른 기세를 풍기는 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마진탁을 위시한 장로와 대주급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마협문의 무인들을 이끌며 반격에 나서자 전세가 뒤바뀌었다.

흑사방 쪽에도 적사를 비롯한 여러 고수가 있었으나 철혈검이라 불리는 마진탁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마진탁은 순식간에 흑사방의 무인 몇 명을 베어 넘기더니 정체까지 파악한 상태였다.

“흑사방. 네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느닷없이 본문에 침입해? 흑사방주는 어딨느냐!”

내공이 가득 실린 그의 일갈에 흑사방 무인들이 일순 주춤거렸다. 단 한 명의 초절정고수가 분위기를 휘어잡은 것이다.

그 찰나의 소강상태가 만들어낸 틈을 노리고, 내가 비도 한 쌍을 날려 보냈다.

쉬쉭- 푹!

마진탁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중년인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동시에 오른쪽 반대편에선 대주라 불리던 사내가 미간에 비도가 틀어박힌 채 허물어졌다.

간부의 숫자가 둘 줄었으니 내가 마진탁을 상대하는 동안 마협문과 흑사방은 비등한 형세에 놓여 서로를 갉아먹을 것이다.

그때, 마진탁의 두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쥐새끼처럼 거기 숨어있었더냐!”

비도가 날아온 방향을 유추해 내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나를 흑사방주로 오해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가 단번에 바닥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내가 먼저 몸을 날린 상태였다.

쾅!

내가 있는 힘껏 휘두른 검을 막아낸 마진탁이 나타났던 방향 쪽으로 쭉 밀려났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쾅! 쾅!

이미 서로의 검에 검기가 피어오른 뒤였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터지고 불꽃이 튀었다.

마진탁은 연신 밀려나다가 내원의 가장 안쪽, 문주전으로 보이는 듯한 장소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내가 슬쩍 물러섰다.

그 사이 마진탁도 호흡을 가다듬고 놀란 얼굴을 한 채 나를 노려봤다.

“실력을 보니 흑사방주는 아니구나. 네놈은 누구냐?”

꽤 당황한 목소리였다. 산서에서 자신을 상대로 이만큼 몰아붙일 수 있는 자가 있었나 싶은.

내가 쓰고 있던 죽립을 벗자 마진탁의 목소리가 더욱 흔들렸다.

“백면공자라 불리는 자가 백사각을 없애버렸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만. 네놈이 왜 갑자기 흑사방과 함께 본문에 쳐들어왔단 말이냐?”

“왜일까. 짐작 가는 바가 없나?”

“말장난할 생각하지 말고 이유를 밝혀라.”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기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적어도 흑사방주와 마협문주는 자신이 왜 죽는지는 알고 죽어야 했다.

내 행동을 지켜보던 마진탁으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너, 너는···.”

“이제 이유는 충분한가?”

내가 유진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마진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금방 냉정함을 되찾았다.

“후. 내 평생 오늘만큼 놀란 적이 없었다는 건 인정하마. 그래. 유진휘라고 했던가?”

침묵으로 긍정하자 마진탁이 말을 이었다.

“흑사방까지 역으로 끌어들여 본문으로 쳐들어온 걸 보면 내막은 다 알아차렸다는 건데. 설마 흑사방과 네놈이 전부인 게냐?”

“봤다시피?”

“하하, 어려서 그런가. 마무리가 아쉽군. 네놈들뿐만 아니라 유씨세가의 무인 전원을 데려왔어야지. 네 아비도 함께. 감히 나를 상대로 고작···.”

슁-!

내가 가볍게 검기를 날려 놈의 같잖은 설교를 끊어냈다. 마진탁이 몸을 날려 피한 자세 그대로 나를 노려봤다.

“이게 뭐 하는···.”

“이봐. 마진탁이.”

내가 하대하자 마진탁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설교 따위가 아니라 유언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데. 아니라면 그냥 죽어라.”

“애송이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오냐!”

말과 함께 마진탁은 일직선으로 짓쳐들어왔다. 여전히 가소롭다는 듯 오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쉭! 팟!

회피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진 내 한 수에 순식간에 깨져나갔다. 놈은 옅게 갈라진 어깨의 상처를 슬쩍 보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제 처지가 고작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 따위였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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